180화. 작성하세요.
“너, 너 그거 어디서….”
“말했잖습니까. 조신자, 한무회 두 분에게서 들은 게 있다고요.”
사실, 그 두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들은 건 아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었다.
-제보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정책제안 프로젝트가 열리기 하루 전, 박 선생이 나를 은밀히 불러 알려 주었다.
바로 강세혁 검사가 박 선생의 아버지, 박성혁 검사에게 보고를 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걸 굳이 나에게 알려 준 이유가 조금 의외였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는 게 이유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박성혁 검사는 나에게 이 정보를 알려 주었을까.
그러나 박 선생도 그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언젠가 한번 만나게 될 사람이니까.’
궁금한 점은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갖고 있는 자료를 무기로 천우원을 압박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주 지저분하게도 노셨더군요. 젊은 여성들이 몇 명입니까 이게. 하나, 둘, 셋….”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 둔 사진을 하나씩 옆으로 넘기면서 천우원에게 보여 주었다. 마치 자랑하듯이 보여 주는 내 모습에 이사장이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자식도 둘이나 있고 손주도 보신 분이 굳이 룸과 모텔에서 이런 모습이나 보여야겠습니까?”
강세혁 검사는 조신자로부터 강문고 이사진의 지저분한 활동 자료를 제보받았다. 건너 듣기로는 소심한 ‘복수’를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아마 자신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가지치기하듯 잘라내 버린 이사진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컸을 터였다.
한무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곽형조와 천우원, 주현서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을 했고, 약간의 반항심 비슷한 마음을 품은 것이었다.
그런 이유들 덕분에 강세혁 검사가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바로 천우원 이사가 룸살롱에서 젊은 여성들을 끼고 놀고 있는 사진과 젊은 여성과 모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조신자, 한무회 두 분이 갖고 있는 사진들, 제가 다 받았습니다.”
“워…원하는 게 뭐야.”
천우원이 처음으로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나를 만족시킬 정도의 태도는 아니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는 학생들 입시 준비하게 조용히 지내십시오.”
“….”
“대답 안 하십니까?”
내 물음에 천우원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 모습에 겁이라도 먹은 척 몸을 살짝 움츠리면서 미리 준비해 둔 연락처를 보여 주었다.
“건방진 망나니 새끼….”
“어어어, 자꾸 그러시면 이거 누릅니다?”
“어디 해 봐. 해 봐 이 새끼야!”
내가 보여 준 연락처는 바로 박 프로님, 이었다. 바로 박 선생의 아버지인 박성혁 검사의 번호였다.
“그러죠.”
천우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박 프로님, 이라고 적혀 있는 연락처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터치했다. 순식간에 통화연결음이 이사장실에 울려 퍼졌다.
“자, 잠….”
[강명문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핸드폰 너머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천우원이 얼굴이 오뉴월 서리라도 맞은 듯 얼어붙었다.
“검사님 안녕하십니까. 제보 드릴 게 있는데, 익명으로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어떤 겁니까?]
“사학재단 장학금 사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책걸상 교체 비용인데 3억을 해쳐먹으려고 한….”
거기까지 말하자 천우원이 다급하게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연신 통화 종료 아이콘을 터치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좀 봐주게.”
여전히 태도를 확실하게 굽히지 않는 그를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것 보세요, 이사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컵에 따라져 있는 녹차를 들었다. 뜨거운 물에 담긴 녹차팩이 종이컵 안을 둥둥 떠다녔다.
그 녹차팩을 꺼내서 천우원 앞에다 대고 흔들었다.
“지금 이사님 위치는 이 녹차팩과 같아요. 알고 계십니까?”
녹차팩은 내가 움직이는 대로 허공을 누볐다. 그러나 내가 잡고 있는 줄 이상으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는 오픈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뭘 오픈해?”
천우원은 짐짓 태연한 척 말했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뭐긴요, 이거 말입니다.”
나는 종이컵에 손가락을 담갔다 뺐다.
그리곤 물 묻은 손으로 책상 위에 보이지 않는 글자를 그렸다.
뿌득. 뿌득.
“…끄응.”
천우원은 그 글자를 보기도 싫은지 찡그렸다.
GF 파일.
그 이니셜 두 글자만으로 그는 꼬리를 밟힌 뱀처럼 꿈틀댔다.
“여기에 모든 게 담겨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왜 가만히 있는지 아십니까?”
천우원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바로, 올해 고3 제자들의 입시가 곧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게 분노 때문인지, 분함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고 할 때 받아들이세요. 그렇지 않으면 싹 다 까발릴 겁니다.”
“…저 파일이 자네에게 있을 리가 없어.”
“이상하네요. 아까는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분명 정책 제안 프로젝트 쉬는 시간에, 천우원은 GF파일이 뭔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그 때의 말이 떠올랐는지 천우원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 파일은 저에게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 노트북에 열어둔 엑셀 파일 하나를 보여 주었다. 천우원은 노트북 화면을 잠시간 보더니 낯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 어어, 어떻게….”
“어디서 얻었는지는 영업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게 어떻게 저한테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사님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는 게 더 중요하죠.”
노트북을 덮으면서 천우원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조용히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 넘어가시겠습니까?”
이제 천우원은 선택의 기로에 남겨져 있었다. 조용히 있겠다 하면 그의 부정행위들은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에게 패배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반면, 모른 척 넘어가려 한다면 부정한 일들이 모두 밝혀진다. 박성혁 검사와 통화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으니, 내가 고발하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결국, 천우원에게 있어 지금의 선택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수치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개자식이.”
“말씀이 험하시네요. 평소의 인자한 말투는 다 어디 갔죠?”
내가 아니라 이사장이 천우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아, 여보세요. 네, 박 검사님! 아이고 아닙니다. 방금 글쎄 횡령 범인인 천우….”
“할게!”
핸드폰을 쥐고 통화라도 하는 척 연기를 하던 나를 보면서 천우원이 소리쳤다.
“조용히 있을게! 그러니까 자네는 학생들 입시에나 집중하게!”
“약속하시는 겁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천우원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준비해 둔 종이를 꺼냈다.
“작성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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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서>
1. 본인 천우원은 강문고등학교 학생들의 입시 준비에 있어 부정부패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학생들의 입시 준비에 해를 가하지 않음과 동시에
2. 만일 입시 준비에 해를 주는 언행,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실이 발각될 경우 즉각 이사진에서 퇴진하고 강명문의 ‘몽둥이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임을 굳게 맹세하며
3. 상기 사항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감수할 것을 서약함.
일: 2011년 5월 6일
주소:
전화번호:
천우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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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늘의 약속을 어기실 경우 각서 내용대로 하겠습니다.”
“강명문 이 새끼…. 법적 효력도 없는 각서를…!”
“누가 법적 효력 때문에 각서 쓴다고 합니까?”
내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다시는 담배 피우지 않겠습니다, 술 끊겠습니다, 하면서 쓰는 각서요. 그런 겁니다 이거는.”
천우원의 얼굴에 수치심과 함께 분노가 한층 더 새겨졌다. 금방이라도 내 멱살을 잡을 것 같은 그를 향해 혀를 찼다.
“어허. 그러다 입시에 또 해 끼치는 일을 하시겠습니다. 제가 작년 입결 대박 난 건 아시죠?”
나는 몸을 뒤로 뉘면서 천우원을 내려다봤다.
“제가 없어지면 그만큼 입시 공백 생깁니다. 이것도 해 끼치는 겁니다.”
내 말에 천우원이 혈압이라도 올라갔는지 뒷목을 잡고 마사지하듯 주물주물했다. 아니, 그냥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건가? 그게 그건가, 아무튼.
“…좋아.”
천우원이 자신의 이름 옆에 사인을 하는 것을 끝으로 각서 작성이 완료되었다. 나는 각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사진을 찍었다.
“뭐…하나?”
“아, 혹시나 지금 자리에서 찢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찍어 뒀습니다. 핸드폰에서 지울 생각도 마세요. 이미 제 이메일로도 보내뒀습니다.”
핸드폰을 들어서 내 이메일에도 사진이 보내졌음을 천우원에게 증명이라도 하듯 보여 주었다.
천우원은 이제 대꾸할 힘도 없다며 눈을 감고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 * *
천우원은 그 뒤로 나와 강은숙 이사장의 잔소리를 삼십여 분은 듣고 나서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서윤수 교수와의 약속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나는 이사장과 남은 차를 마셨다.
“강 선생님, 각서는 언제 준비하셨어요?”
“아까 프로젝트 끝나고 바로 준비했습니다. 대충 분위기 보니까 이렇게 작성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있던 또 하나의 각서를 꺼냈다.
“물론, 딴소리했을 때를 대비해서 예비 각서도 준비해뒀죠.”
“호호호호!”
이사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신나게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천우원을 놔 줘도 괜찮나요?”
사실 천우원이 각종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번 책걸상 교체 역시 천우원이 주도했다는 사실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천우원을 놔준 이유가 있었다.
“천우원은 지금 룰렛을 돌리고 있을 겁니다.”
나에게 목줄이 잡힌 것처럼 연기를 하고는 뒤에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방법.
이번에는 패배했지만, 곧장 이겨 주겠다며 공격 수단을 찾는 방법.
그가 돌리는 룰렛에는 이렇게 희망적인 선택지들만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룰렛에 있는 선택지들은 모두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뭘 선택하든 그거부터 시작이다.’
걱정되는 건, 학생들의 입시 시즌에 일을 터트리면 어떡하나, 하는 점이었다.
“가급적 몸 좀 사려 줬으면 하는데, 그게 또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아 불안합니다. 애들 입시 준비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역시, 강 선생님은 자나 깨나 입시 걱정, 학생들 걱정뿐이군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진로진학 방향을 설정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녹차를 들고 마시면서 말하자 이사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를 해 주었다.
“그런데 이사장님.”
“네?”
“아직 GF파일 원본 오픈 안 하셨죠?”
방금 전 천우원에게 보여 주었던 엑셀 파일. 그건 연천대에 입학하면서 컴퓨터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동석이에게 부탁해서 만든 파일이었다.
진짜 GF파일이 아닌, 조신자와 한무회의 제보 내용에 기반한 자료였다.
-쌤! 이 정도면 되나요?
동석이가 보여 준 엑셀은 딱 한 부분만 보여 주면 GF파일이라고 속여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자료였다.
천우원, 조신자, 한무회가 저지른 부정 목록들과 간략한 액수.
그 목록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둔 엑셀이었다.
당연히, 천우원이 그 파일을 느긋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속여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고, 온갖 수치를 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순간 보여 주는 그 엑셀파일이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일부 단어들만 보여 줘도,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동석이 치맥이라도 사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은 녹차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이사장에게 말했다.
“저한테 안 보여 주셔도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지 마세요.”
GF파일의 원본. 그 원본이 이사장에게 있었다는 건, 지난번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사장이 곽형조에게 그 파일을 넘겼다고 했을 때도, 복사 해둔 파일이 있거나 원본 파일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사장의 할아버지인 강진 어르신이 남긴 파일이다. 그 정도의 의미를 가진 그 자료를, 예비용 자료 하나 없이 아무렇게나 다룰 리가 없었다.
“강 선생님에게는 정말 숨길 수가 없네요.”
“숨기셔도 됩니다. 어쨌든, 그 원본 파일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 주세요.”
이사장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럼 저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윤수랑 술 마시러 가죠? 저도 가도 될까요?”
그 질문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이사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서 교수였다.
“좋지! 우리 은숙이랑 간만에 술 한 잔 하겠구먼!”
“좋습니다. 가실까요?”
나는 그날 강남역 호프집에서 서 교수, 이사장과 함께 신나게 맥주를 마셨다.
이제야 2011년 강문고의 큰 사건들이 일단락되었다는 생각 덕분인지 술맛이 기가 막혔다.
‘당분간은 입시에 집중하면 된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당장 다음 주부터 학생들을 어떻게 굴려 줄까 고민했다. 2011년 입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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