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74화 (174/252)
  • 174화. 코스프레를 해야 해서요.

    “왜 숨기셨습니까?”

    강철면 교장은 이사장실에서 강은숙 이사장과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앞에 놓인 녹차가 가득 든 찻잔을 손에 들고는 이사장에게 물었다.

    “할아버지의 파일이라면 누님 금고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왜…….”

    “아직은, 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강은숙 이사장이 평온한 얼굴로 녹차를 마시고는 작은 약과를 하나 집었다.

    강철면의 말대로 이사장은 10여 년 전, GF파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형조에게 USB로 파일을 전달할 때, 사본을 만들어서 제공했다.

    때문에 이사장에게도 파일이 담긴 USB가 별도로 존재했다.

    하지만 강은숙 이사장은 자신에게 원본 파일이 있다는 사실을 강명문에게 숨겼다.

    “게다가 강 선생님이 말한 파일이 우리가 알고 있는 파일과는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어디가 다른지 같이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강철면의 질문에 이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렇게 움직일 때가 아니야. 오히려 조심해야지.”

    강은숙 이사장은 지금까지 강명문과 함께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봤다. 확실히, 강명문은 그녀의 믿음대로 훌륭한 업적을 쌓아올렸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학생들의 입시 결과, 하나씩 밝혀내는 부정한 일들, 그걸 주도한 사람들을 향한 철퇴.

    모든 것이 이사장이 원하는 그림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장은 여전히 한 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강 선생도, 사탕 같은 달콤함에 빠지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강명문은 이사진들로부터 직접적인 제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전에 조신자가 방문했을 때도 어디까지나 강명문을 공격하기 위함이었지, 그를 회유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런 회유가 없었기 때문에 강 선생이 지금까지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강은숙 이사장의 마음 한켠에 담겨 있는, 마지막 하나의 의심이 바로 이것이었다.

    “할아버지의 파일을 보여 줄 수 있는 모습. 그것만 보여 주면 되는데 말이야.”

    “아직도 부족한 건가요. 누님, 너무 신중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허허.”

    강철면이 완고한 자신의 누나를 보면서 탄식했다.

    그로서도 이사장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이자 할아버지의 지인들. 그들이 바로 현재 강문고 이사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운영을 전적으로 믿고 맡겼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사진은 자기들 잇속을 챙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뚜껑을 열어 놓고 조금만 뒤적여 보니 여기저기 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믿음이 가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강명문 정도는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줬던 업적, 실적들이 그걸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장에게는 아직 무언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일단 더 지켜보도록 하자. 그가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들은 다 들어주면서, 정말 그의 마음이 변함없는지를 확인해야…….”

    라고 말하던 이사장은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 선생님?”

    “이사장님, 불쑥 죄송합니다.”

    강명문이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녀석들이 인터뷰 좀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쌤도 해 주셔야죠!”

    “맞아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이사장님 인터뷰도 할 거지만 쌤도 같이요!”

    민주, 은솔, 용희가 순서대로 강명문의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사장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하하하…… 하.”

    마지막으로 태웅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이 녀석들이 정책 제안 프로젝트 준비한다고, 학교 경영자를 만나고 싶다 하지 뭡니까.”

    “이사장님도 이사장님이지만, 쌤처럼 학교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도 할 거라니까요?”

    “맞아요! 인어공주쌤도 할 거고요!”

    민주와 은솔의 외침에 이사장실이 시끌벅적해졌다. 강명문은 학생들이 들이미는 질문들을 애써 거부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태웅과 용희는 어느새 자리 세팅을 하고 있었다.

    “강 선생! 이게 지금 무슨 소란이야!”

    “푸흡!”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사장이 한껏 웃었다.

    “푸하하하하!”

    강은숙 이사장은 방금 전까지 동생인 강철면과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날 것처럼 웃던 이사장은 난리를 치면서 등장한 학생들과 강명문을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특이해.’

    그리고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금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를 했다.

    “좋아요.”

    “오예!”

    용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됐지? 그럼 내 인터뷰는 나중에…….”

    “아 쌤!”

    강명문은 여전히 은솔과 투닥거렸다. 옆에서 민주는 이사장을 위해 준비한 질문리스트가 있다면서 종이를 한 장 펼쳤다. 태웅은 이사장이 앉은 테이블에 믹스 커피를 타서 내려두었다.

    “얼른 앉아요 강 선생님.”

    “하지만…….”

    “학생들이 원하잖아요. 입시 도와주셔야죠?”

    “하…….”

    결국 강명문도 크게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무기력하게 털썩 앉았다.

    “그래요, 궁금한 게 어떤 거죠?”

    학생들이 서로 누가 먼저 물어볼지 눈치를 봤다. 그러다 민주가 먼저 입을 뗐다.

    “처음 학교가 설립되었을 때의 배경? 사상? 가치관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궁금합니다!”

    “강진 어르신의?”

    이사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더 총명해 보였다.

    그 눈빛을 확인한 이사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RPG대회 생각나네.’

    작년, 정석과 동석의 발표가 갑자기 떠올랐다.

    강명문도 강진 어르신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의 미소를 확인한 이사장은 잠깐의 회상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학교 설립자이신 강진 어르신은…….”

    * * *

    서초역 인근의 카페, 그곳에서 강세혁 검사는 어떤 인물을 만나기로 했다.

    “흠…….”

    강세혁이 낮게 신음하면서 미리 알아본 상대의 정보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점에서 자신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왜 있는 건지 궁금했다.

    ‘자수는 아닐 거고.’

    그렇게 생각한 강세혁은 카페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문 앞에 오늘 만날 사람이 들어왔다.

    “강세혁 검사님?”

    노년의 여성이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치장한 모습으로 강세혁 검사 앞으로 다가왔다.

    “네, 맞습니다.”

    그 말을 들은 노년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핸드백을 열었다.

    “먼저 이걸…….”

    그녀는 작은 종이를 꺼내서 강세혁 검사에게 보여주었다.

    전 직장에서의 명함이었다.

    “소개는 됐습니다.”

    강세혁은 그 명함을 형식적으로 받아들면서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강문고 ‘전’ 이사이신 조신자씨.”

    선글라스를 벗은 조신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보할 게 있어요.”

    조신자가 자리에 앉아 또 하나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강세혁 검사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강남역 인근의 작은 호프집.

    류지훈은 천우원과 주현서를 만나고 있었다.

    “우리 제안을 받아 주는 건 좋아. 하지만…….”

    천우원이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었다.

    “왜 강명문과 같이 하려는 거지?”

    그 물음에 류지훈은 준비했던 답변을 꺼냈다.

    “강명문은 과거 행적도 깨끗하고, 주변의 사람들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행적에서 오점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던 류지훈이 잠깐 숨을 삼켰다.

    “그래서 제가 친한 척 접근하면서 약점을 잡아내겠습니다.”

    “흠…….”

    주현서는 작은 잔에 담긴 청주를 바라봤다. 손에 들고 잔을 빙빙 돌리면서 류지훈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저로서도, 비리척결이라며 날뛰는 강 선생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친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역으로 공격할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류지훈의 말을 들은 천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자네 뜻대로 하게.”

    주현서가 천우원에게 결정을 미뤘다. 천우원은 류지훈에게 잔을 내밀었다.

    “좋아. 민지정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지는 말게.”

    “네! 감사합니다!”

    “참, 그리고…….”

    천우원이 클클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테스트를 한 번 해 보고 싶은데.”

    그의 웃음을 보던 류지훈이 잠시간 당황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천우원의 비열한 웃음에 지지 않을, 가식적인 웃음이 호프집 내부를 장식했다.

    * * *

    “꼭 이 시간에 만나야 했어?”

    지석 선배가 툴툴대면서 맥주를 마셨다.

    “간만에 회포나 풀자는 거죠. 저도 오늘 하루종일 학생들 인터뷰 붙잡혀 있어서 피곤합니다.”

    선배에게 말한 대로, 나는 이사장과 함께 인터뷰를 한 이후, 학급의 녀석들은 물론이고 1학년, 2학년 학생들의 인터뷰까지 해 주어야 했다.

    민주를 통해 후배들에게도 나를 인터뷰했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후배들이랑 친해가지고.’

    그래도 그게 민주의 장점이기는 하니까. 학생부에 그런 이야기도 적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맥주잔을 집었다.

    “이젠 네가 술 마시자 부를 때는 겁부터 난다. 또 무슨 꿍꿍이야?”

    지석 선배의 물음에 나는 선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치킨을 선배 앞으로 밀면서 싱긋 웃었다.

    “선배, 정책 제안 나가십니까?”

    “정책 제안 프로젝트? 교사용? 나갈까 말까 고민 중이기는 한데. 왜?”

    선배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옆에 앉아 있는 박 선생에게도 닭다리를 건네주었다.

    “……왜요?”

    “저는 두 분이 같이 정책 제안 프로젝트에 나가셨으면 합니다.”

    “왜?”

    박 선생과 지석 선배가 인상을 팍 쓰면서 물었다.

    “그게…….”

    나는 말하기가 조금 그렇다면서 쭈뼛거렸다.

    “사실 제가 타깃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박 선생이 마시던 맥주잔을 거칠게 쾅!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당분간 저는 몸을 좀 사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석 선배는 내가 밀었던 치킨을 한 조각 뜯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제안하고 싶은 정책을 우리 입으로 이야기하게 해라?”

    “대충 비슷합니다.”

    최근 민지정의 문제까지 하면 내가 이사진에게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공격하거나 방해한 사건들이 꽤 되었다. 류 선생에게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제는 나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빼내려고 할 터였다.

    즉, 이전에는 내 주변의 동료 교사들이나 학생, 학부모들을 타깃으로 했다면, 이제는 다시 나에게로 타깃이 옮겨지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건 아니고요.”

    류 선생과 같이 팀을 이뤄서 정책 제안 프로젝트에 나가기로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류 선생이랑 같이 나갈 팀에서 매력적인 정책을 제안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제안할 정책은 퍼포먼스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도 적당히 코스프레를 하기는 해야지.’

    그게 앞으로 닥칠 위험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강 선생님을 다시 타겟으로 삼았다고요?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새끼들이…….”

    “어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나랑 박 선생이 팀으로 나갈까?”

    “네, 괜찮으시면 오 선생님도 어떻습니까?”

    사실 오늘 자리에 오 선생도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학생 상담이 급하게 잡히는 바람에 우리끼리만 모인 것이었다.

    “내가 한번 여쭤볼게. 박 선생도 괜찮지?”

    “좋아요.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훨씬 좋죠.”

    “감사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가볍게 맥주잔을 들었다. 세 개의 잔이 쨍-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만 참가하는 거야?”

    “아뇨, 홍 선생님, 차 선생님, 윤 선생님이 또 한 팀으로 참가하실 겁니다.”

    홍 선생은 내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정책 제안 프로젝트에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선배님 저랑 같이 해요!

    물론 그 제안은 거절했다.

    ‘나보다는 더 좋은 팀원들이 있어.’

    차 선생, 윤 선생을 홍 선생과 함께 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셋을 묶은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쪽도 팀원들이 좋네. 알았어. 그럼 그렇게 준비해 볼게.”

    이번 정책 제안 프로젝트는 1차 학생들의 발표도 중요하지만, 2차 교사들의 발표도 중요하다. 그 발표에서 나와 함께 갈 교사들의 역량도 보여 주고, 그들에 대해 알리는 것도 필요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싱긋 웃으면서 말하자 박 선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강 선생님, 나중에 빚 한 번에 털어 주셔야 해요. 알겠죠?”

    그 말을 하며 우리는 한동안 즐겁게 맥주를 마셨다.

    우웅-

    술자리가 마무리되기 직전,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앞에 앉은 지석 선배와 박 선생이 보지 못하게 핸드폰을 꺼내 잠금을 풀었다.

    <끝났어. 잠깐 전화 괜찮아?>

    류 선생의 문자를 확인하고는 지석 선배에게 말했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전화? 이 시간에?”

    누구냐며 묻는 지석 선배와 박 선생을 향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코스프레를 해야 해서요.”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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