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태웅과 유미 (2)
태웅과 유미가 식당에 들어가기 얼마 전.
태성은 오래간만에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곧 시험기간이었지만, 강명문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변한 게 거의 없네.’
그래서 오래간만에 대치동 학원가를 돌아보기로 했다. 태성에게는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이기도 했기에 잠시간 고등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담임인 강명문을 만나기 전의 자신과 만난 후의 자신. 누가 물어보더라도, 만난 후의 자신이 훨씬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태성은 많은 부분이 변해 있었다.
“그래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냐 이거.”
담임의 도움을 받았으니 도와줄 생각이야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부르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오래간만에 대치동 학원 거리 산책 좀 해봐.
강명문은 그렇게 말하고는 하나를 더 덧붙였다.
-이태웅이라고 있어. 얘가 대치동 학원 다니니까 걔가 밥 먹을 때를 한 번 봐 봐.
그래서 학원가를 돌면서 이태웅이라는 학생의 사진을 보다가, 그곳을 지나가는 강문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다가를 반복했다.
“에이, 그래 정석이랑 동석이도 했다는데! 명천이도 강원도에서까지 올라와서 했으니까 나도 해야지!”
자기합리화를 마친 태성은 열심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강문고 학생들을 찾았다. 약 30분쯤 지났을 때 강문고 교복을 입은, 사진 속 주인공과 비슷한 남학생이 식당에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쟨가?’
학생이 들어간 식당은 최근에 새로 생긴 식당이었다. 깔끔한 외관의 가게여서 학원가에 오는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보였다.
태성은 밥이라도 먹자,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남학생이 들어간 가게로 향했다.
* * *
그리고 지금, 태성은 생각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내신 조작? 입원?’
아무리 생각해도 저게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대화인가 싶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교복은 강문고 교복이었다.
‘강문고라면…… 최상위권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태성도 강문고 최상위권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대략적인 소문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급식비리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태성은 지금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담임에게 전달했다.
그리고는 다시 두 학생의 대화에 집중했다.
“입……원?”
“응. 그냥 학교에서 한 번 떨어져서 다리 한 번 다치면 되지 않을까? 너무 높은데만 아니면 안 죽을 거야. 걱정하지 마!”
태웅은 유미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더 어울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거절할 자신 역시 없었다.
“그…… 꼭 병원에 가야 해?”
“나도 너희 부모님을 알잖아. 그냥 내신 버리겠다 그러면 믿으시겠어? 아파서 입원을 하든 해야 중간, 기말 다 포기하시겠지. 그러니까 한 달만 아파서 입원하고, 내신 버린다고 해 주라. 너 수능 잘 볼 거 아냐. 응?”
유미가 간곡히 부탁하자 태웅이 천천히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
태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미가 고맙다며 태웅의 한쪽 팔에 팔짱을 꼈다.
“고마워!”
둘이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는 태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먼저 일어날게. 수업 가야 해서.”
“응. 진짜 고마워!”
순수한 얼굴로 손을 열심히 흔드는 유미를 보면서 태성이 헛웃음을 지었다.
* * *
그날 학원 수업이 끝나고 태웅은 어머니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땠니?”
“응, 컨디션 괜찮아.”
태웅은 애써 유미와 있었던 일을 숨기고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태웅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 잘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엄마, 만약 내신 포기하고 정시만 올인하면 불리한 게 있을까?”
“내신을 포기해? 얘가 또 무슨 소리니?”
“아니, 그냥…… 아냐, 아무것도.”
이전에도 수능날 아파서 점수가 잘 안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었다. 비슷한 류의 질문에 태웅의 어머니도 심각한 얼굴을 했다.
“왜? 불안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봉사활동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니야, 그건.”
“그럼 왜 그러는데?”
태웅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아들의 망설임을 순간적으로 캐치한 태웅의 어머니가 매섭게 아들을 노려봤다.
“또 유미니?”
“어, 어? 아니야, 아니야. 유미 아니야.”
아무리 봐도 수상한 태웅의 모습에 태웅의 어머니가 눈을 부릅떴다.
“이 망할 년이 또…….”
“아, 아니라니까 엄마!”
태웅이 말릴 새도 없이 태웅의 어머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유미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서윤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뭐? 지금 우리 아들한테 또 이상한 짓거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이 년을 당장에…….”
“엄마! 진짜 아니라니까!”
그제야 태웅의 말을 들은 그녀가 몸을 돌렸다.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다 이야기해. 엄마랑 아빠가 싹 다 매장시킬 테니까.”
어머니의 말에 태웅은 든든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런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고개를 어렵게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온 태웅은 가방을 내려놓고 몸을 벽에 기댔다. 그리고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오늘 식당에서 봤던 유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꿉친구는 정말로 지금 힘들어하고 있었다.
양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시로 대학을 갈 생각이라 내신 성적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다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방금 어머니의 반응을 보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자기자신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지 않고서야, 내신 성적을 포기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야 다른 아줌마들한테도 자랑할 테니까…….’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아들.
전교 1등은 아니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성적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모의고사도 항상 최상위 백분위를 받아와서 서울한국대를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아들.
지금 태웅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태웅도 어머니의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방법이 없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마땅한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태웅은 핸드폰을 열어 지난번 ‘라떼는 말이야!’ 인터뷰 때 받은 선배들의 전화번호 목록을 찾았다.
<김은장 누나>
태웅은 그 번호를 보면서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했다. 수 분간 이어진 고민 끝에 태웅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어머니의 목소리에 놀라 종료 버튼을 연타하며 눌러 버렸다.
“아들, 이제 씻고 자야지! 5분이라도 늦게 자면 내일 바이오리듬 흐트러진다!”
태웅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접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으, 응! 지금 씻을게!”
태웅이 씻는 동안 태웅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나 태웅은 그 전화를 받지 못했고, 전화 수신 내역도 확인하지 못했다. 진동이 울리는 폴더 핸드폰의 배터리를 태웅의 어머니가 화를 내며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너 이거 압수야 당분간! 그 기지배랑 연락도 하지 마! 알았지!”
“……응.”
씻고 나온 태웅은 어쩔 수 없이 자그맣게 대답했다.
결국 태웅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전화내역을 확인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태웅은 마지막 교시인 미술 수업을 아프다는 핑계로 건너뛰고 유미를 만났다. 다른 친구들이 들으면 안 된다면서 유미가 빨리 만났으면 한다고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봐야 해?”
“응. 요즘 여기서 자연과학동아리가 텃밭 키운다고 열어 두거든. 지금이면 괜찮을 거야.”
유미는 태웅을 향해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태웅은 유미의 얼굴을 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그거…… 미안, 역시 못하겠어.”
“……왜?”
태웅은 어제부터 고민했던 대답을 생각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 태웅은 어렵게 입을 뗐다.
“내신도, 수능도 다 챙겨야 해. 안 그러면 내가 엄마한테…….”
“야, 이태웅.”
태웅의 말은 유미에 의해 중단되었다.
“너, 마마보이야?”
“어?”
“너 마마보이냐고. 왜 엄마 눈치를 봐?”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는 유미에게 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엄마한테 휘둘려? 내가 지금 그런 핑계 듣자고 널 부른 거 같아?”
사실 유미도 부모님에게 휘둘리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태웅은 지금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정말, 아직도 나는 부모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고만 있었나, 그런 의문만 품고 있었다.
“초딩이야? 언제까지 엄마한테 기대고 살 건데? 그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나도, 너도 다 ㅈ되는 거야. 알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유미는 스카이를 가지 못해 몇 년을 더 대입 공부에 시달릴 것이다. 자신은 소꿉친구의 부탁을 내던진 사실 때문에 평생 후회하면서 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태웅을 향해 유미가 중얼거렸다.
“너 따위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
유미의 말에 태웅의 눈이 놀라 크게 떠졌다.
“지금 뭐라고…….”
“너 따위, 그냥 여기 떨어져서 뒈졌으면 좋겠다고!”
유미의 목소리가 옥상 위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태웅을 향해 소리를 지른 유미는 씩씩대면서,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유, 유미야. 난…….”
태웅은 지금 유미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소꿉친구의 눈물과 서러움이 가슴으로 꽂히는 기분이었다.
“미, 미안해. 나는 그럴 의도가…….”
“미안하면…… 보여 줘.”
소매로 눈물을 슥 닦은 유미가 태웅을 노려봤다.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여기서 보여 줘.”
“!!”
유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태웅이 눈을 크게 뜨고 옥상 난간과 유미를 번갈아 바라봤다.
“지, 지금? 여기에서?”
“그래. 지금 당장! 여기서!”
태웅은 시선을 난간으로 돌렸다. 유미의 시선도 난간 펜스로 향했다. 태웅은 천천히 난간 앞으로 걸어갔다. 유미의 발걸음도 천천히 난간 앞으로 향했다.
뚜벅. 뚜벅.
텃밭을 꾸미기 위해 모아둔 모래들이 바람에 날려 두 사람의 발 아래를 덮어나갔다. 둘은 그 모래를 밟으면서 천천히, 확실하게 난간으로 걸었다.
그리고 난간 앞에 다다랐을 때, 태웅이 걸음을 멈췄다.
“올라가.”
“…….”
유미의 말에 태웅은 난간에 설치된 안전 펜스를 잡았다. 한 발짝 올라서서 보니 6층 높이의 바닥이 내려다보였다.
“헉!”
순간 공포감이 밀려왔다. 유미는 겁먹은 태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소리쳤다.
“눈 딱 감고 해! 잠깐이면 되잖아!”
태웅은 침을 꼴딱 삼키고 유미를 한 번 더 바라봤다. 빨리 넘어가라며 강조하는 얼굴을 보며 태웅은 다시금 펜스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찰캉, 찰캉.
한 발, 두 발. 이제 펜스를 넘어가기 직전, 태웅은 다리를 멈춰 세웠다.
이제 조금만 더 움직이면 펜스를 넘어간다.
펜스를 넘어가면, 6층 높이 건물에 안전망 하나 없이 노출된다.
삐끗,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추락.
그렇게 되었을 때, 살아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떨어지면, 유미는 부모님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태웅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유미의 말에 자극받은 태웅은 생각했다.
지금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강문고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소꿉친구를 위할 수 있었다.
‘그래, 유미한테 조금만 양보하자. 잠깐 아픈 거야. 6층이잖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오른손으로 몸을 받치고 천천히 펜스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이제 난간 끝에 선 태웅은 양손으로 펜스를 강하게 잡았다.
‘조금만 더 압박하면 되겠어.’
유미는 태웅의 긴장한 모습을 보면서 태웅이 모르게 살짝 웃었다.
“태웅아, 고마워. 너밖에 없어.”
“…….”
“조금만 더 하면…….”
“대단한 양보천사 납셨다 그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태웅과 유미가 동시에 옥상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쌔, 쌤?”
“가, 강명문……?”
“말이 짧다, 송유미.”
한쪽에 출석부를 끼고, 한 손에는 종이몽둥이를 든 강명문이 옥상 문 앞에 서 있었다.
“어, 언제부터…….”
“방금 왔다. 제보 받고.”
강명문은 턱에 손을 대고 어제와 오늘 아침에 받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이태웅이라는 애, 여자친구인가? 그냥 친구인가? 아무튼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애 때문에 사고 치겠던데요?
어제는 태성이의 제보가 있었고.
-쌤, 태웅이한테 밤늦게 전화 왔었어요. 제가 연락했는데 나중에는 핸드폰 꺼져 있다 하더라고요.
오늘 아침에는 은장이의 제보가 있었다.
‘멍청한 놈이.’
강명문은 태웅과 유미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태웅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야 인마, 이태웅.”
태웅은 담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 번만 더 말한다.”
이제 강명문은 손 닿으면 유미가 닿을 거리, 그리고 조금만 달리면 태웅의 손을 잡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강명문은 그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태웅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언젠가 상담할 때 꺼냈던 말을 한 번 더 이야기했다.
“양보는 이제 그만하자.”
태웅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컹.
밖으로 나간 다리 한쪽이 살짝 옥상 안쪽으로 넘어왔다.
“태웅……너……!”
“잘했다. 그거부터 시작이야.”
강명문과 유미의 표정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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