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37화 (137/252)
  • 137화. 부족한가?

    난데없는 태웅이의 고백에 은장이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럼 태웅이는 어떤 걸 공부하고 싶어?”

    “전… 어문학이요.”

    하지만, 태웅이는 여전히 자신의 진심을 모두 오픈하는 걸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지금 경영이 싫다고 한 것만으로도 일부 성과라면 성과였다.

    “어문학이면 국문학? 영문학?”

    “…뭐든 어문학 분야요.”

    “그럼 경영은 부모님이 가라고 하시는 거구나. 그치?”

    은장이의 말에 태웅이가 잠시간 침묵했다.

    “나도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다고 말했지?”

    “네.”

    “그때 담임쌤이 도와주셨었어. 그러니까 상담 다시 해 보면 어때?”

    은장이는 태웅이를 격려해 주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담임선생님을 찾아라. 선배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라. 아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다.

    “그러니까 우리를 믿고 언제든 연락해!”

    그런 이야기들을 듣던 태웅이의 눈에 물이 고였다.

    “어? 어어어?”

    “가…감사합니다….”

    갑자기 눈물이 고인 태웅이를 보며 은장이가 당황해했다. 나는 녀석의 옆에 가서 은장이와 정석이에게 들리게끔 말했다.

    “올해 울보는 너다.”

    ““아 쌤!””

    은장이와 정석이가 내 말에 반발하면서 항의를 했다. 내가 뭘? 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녀석들이 후배들 앞에서 창피하게 무슨 소리냐며 투덜댔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누나라고 하라니까?”

    “네, 누나.”

    태웅이는 흐르기 직전의 눈물을 소매로 닦더니 나를 향해 꼿꼿이 섰다.

    “선생님, 상담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학원 바쁘다며?”

    “청소 핑계 대고 1시간 늦게 가겠습니다.”

    “1시간이면 너무 늦는다고 문제 생기는 거 아냐?”

    “대청소했다고 하겠습니다.”

    녀석은 이제 본격적으로 나와 상담을 할 준비가 되었다면서 가슴을 폈다.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지만,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좋아. 그럼 빠른 시일 내에 하자.”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 태웅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태웅이는 은장이에게 한 번 더 감사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 얼추 마무리된 거 같으니 슬슬 ‘라떼는 말이야’ 인터뷰를 마무리하겠다.”

    “엥, 벌써 끝나요?”

    3반 학생들 사이에서 아쉽다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이제 수업 들어야지? 너무 아쉬워들 마. 여기 앞에 있는 선배들을 비롯해서 다른 합격생 선배들이 올해 너희들 입시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거다!”

    내 말에 은장이, 동석이, 정석이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살짝 긴장했다. 은장이는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슬쩍 바라보기도 했다.

    “후배들을 위해 이 정도 희생은 해야지. 안 그래?”

    내가 씨익 웃으면서 동석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대천왕….”

    정석이가 중얼거리자 3반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아, 시간의 마왕이라는 게 혹시….”

    “이런 거였구나….”

    덩달아 올해 3반 학생들의 눈동자에도 두려움이 조금씩 깃들어 갔다. 나는 정석이의 뒤통수를 종이몽둥이로 퍽 때렸다.

    “아야!”

    “헛소리 그만하고, 다들 일어나. 나갈 시간이다.”

    오늘 이 인터뷰 시간은 사실 태웅이를 위한 시간이었다. 태웅이처럼 속내를 숨기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또래 선배들에게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준 것이었다.

    다행히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된 것 같았다. 3학년 3반 학생들의 눈빛이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수고들 했다.”

    책상을 제자리로 돌리는 은장이, 동석이, 정석이를 보면서 말했다. 세 제자들이 씨익 웃으면서 내 격려에 화답했다.

    * * *

    강명문과의 만남 이후, 조신자는 곽형조, 천우원을 찾았다. 먼저 자리를 떠난 두 사람은 평소처럼 천우원의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과, 곽 이사님….”

    조신자는 곽형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그 일들만은….”

    “신자야.”

    조용히 조신자의 이름을 담은 곽형조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빈 종이컵에 비벼 껐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당장 나가라.”

    “하, 하지만….”

    되도 않는 수법으로 상대를 압박하려다 실패했다. 그건, 상대를 얕본 조신자의 실수였다. 초임교사라는 사실에 방심했고, 강문고이기 때문에 당연히 부정부패에 물들어 있을 거라는 속단이, 오늘의 결과를 불러 왔다.

    게다가 강명문은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을 강문고 학부모들이나 교사들이 가만 놔둔다? 조신자로서는 충분히 강명문에게도 불법적인 딜이 들어왔을 법하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자야, 네가 저지른 일들은 우리가 우선 담아 두고 있을 테니 당분간은 근신해.”

    천우원이 조신자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곽형조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며 입에 물었다.

    “아니. 너는 오늘부로 퇴진이다.”

    “형님!”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죄. 역으로 공격을 받아 휘말린 죄. 그 결과, 우리가 상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궁지로 몰아 버린 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쉰 곽형조는 담배 연기를 조신자의 앞으로 내뿜었다.

    “그리고 나를 쪽팔리게 한 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뱃재를 조신자 앞에 탁탁 털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가?”

    곽형조가 떨어뜨리는 담뱃재가 조신자의 앞머리를 스치며 떨어졌다.

    “그, 그건….”

    “부족하면 너의 ‘진짜 죄’를 꺼내 줄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한 조신자는 고개를 숙이며 곽형조를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그 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강문고 이사가 될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 더 많은 죄를 묻기 전에 썩 꺼져라.”

    곽형조의 무거운 목소리를 들으며 조신자는 다리를 벌벌 떨고는 문을 나섰다. 조심스레 닫히는 문을 향해 곽형조가 욕을 한마디 내뱉고는 천우원을 돌아봤다.

    “어떻게 생각해?”

    “이번 일로 강명문은 강문고 이사진을 무시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녀석… 마치 ‘네까짓 것들’이라며, 무시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우원의 말에 곽형조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힘을 주어 절반으로 접어 버렸다. 뜨거운 담뱃불이 손가락 사이에서 치직 꺼뜨려졌다.

    “방법을 강구해 봐.”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거면 강명문도 별수 없을 겁니다. 다만….”

    그는 곽형조의 옆에 가서 누가 들을까 걱정이라도 하듯 귓속말을 했다. 그의 제안을 들은 곽형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두 달은 걸리지 않겠나?”

    “어차피 입시 결과가 나오기까지도 8개월, 9개월은 걸립니다. 하지만 한두 달 뒤에 이 사건이 터지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해질 것입니다.”

    천우원이 씨익 웃으면서 곽형조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곽형조는 다리를 꼰 채 천우원이 건네는 찻잔을 손에 들었다.

    “무회가 전교 5등 어머니와 좀 친하지 않나?”

    전교 5등이라는 말에 천우원이 곽형조의 의도를 모두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우원의 답변을 들으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곽형조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 *

    “안녕하세요, 누나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며칠 뒤, 해피플레이스의 직원이자 박 선생의 동생인 박재우 씨가 학교로 찾아왔다. 학생들 동아리 개설과 관련된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분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뭐 이상한 이야기 들으신 건 아니시죠?”

    “말도 마십쇼. 강 선생님이랑 있으면 알 수 없는 아드레날린이 끓어오른다거나, 유대감을 형성한다거나, 같이 특강이라도 하면 강의하는 모습에 스스로도 흥분하게 된다거나….”

    “좋은 말로 할 때 그 입 다물어라, 응?”

    농담 삼아 물어본 질문에 박재우는 농담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었고, 그걸 듣던 박 선생이 도끼눈을 뜬 채 동생을 노려봤다. 박재우는 낄낄 웃으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방금 이야기는 농담이고, 좋은 이야기만 있었습니다.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분이시라고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해피플레이스의 박재우 주임입니다.”

    박재우의 명함을 받고 악수를 했다. 박 선생이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내 시선을 피하는 듯 피하지 않는 듯 애매하게 시선처리를 했다.

    “강문고 3학년 3반 담임인 강명문입니다. 국어 교사를 하고 있고, 올해는 해피플레이스 동아리 담당도 맡게 되었습니다.”

    가볍게 나를 소개하며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박재우, 박 선생과 함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교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교실로 들어서자 민주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용희와 은솔이는 민주가 내준 숙제를 풀고 있었고, 태웅이는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그럼 궁금한 거 하나씩 물어보면서 채워 볼까?”

    내 신호에 맞춰 학생들이 궁금한 점들을 하나씩 물어보았다.

    그중 가장 먼저 물어본 학생은 용희였다.

    “저희 정말 해피플레이스 동아리 허가되는 건가요?”

    “사실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벌써 허가는 됐어. 오늘은 그걸 알려 줄 겸 해서 오기도 했지.”

    박재우 주임의 말에 학생들이 조금 놀라워했다.

    “저 오늘 영업하려고 했는데!”

    가장 아쉬워한 학생은 민주였다.

    녀석 입장에서는 이번 동아리 신청 과정에서 자신의 마케팅 역량을 보여 주고 싶었을 테니까.

    “응? 영업?”

    그게 무슨 말인가 잠깐 생각해본 박 주임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가 보낸 동아리 계획서만으로도 충분히 어필됐어. 팀장님도 건축, 요리, 지역사회 개발을 한 번에 생각한 동아리 없었다면서 아주 좋아하시던데? 거기에 한국어교실 설립까지. 나중에는 해외로도 가겠다 하는 거 아니냐 하시더라, 하하하!”

    박 주임이 웃는 모습을 본 학생들이 그제야 표정을 되찾았다.

    “그럼 우리 뭐부터 할까?”

    “그래도 건축이 기반인데 건축봉사부터 가야 하지 않아?”

    “한국어 교실을 먼저 해야 하지 않나? 시험기간 전에 가기로 했잖아.”

    민주, 은솔, 용희가 한마디씩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봉사 일정을 정해나갔다. 태웅이는 옆에서 그 모습들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너희들 의욕 넘치는 건 좋은데, 오늘은 내 인터뷰 하기로 한 거 아니었니?”

    학생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란을 잠시 멈추고 박 주임이 말했다. 그러자 민주가 맞다면서 준비한 질문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해피플레이스는 건축봉사가 주력인데 봉사단체의 경우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나요? 기업의 후원이나 사회공헌 같은 사업을 같이 진행하기도 하나요?”

    지극히 경영스러운 질문과,

    “국내외로 봉사활동 하시면 어떤 게 많이 부족한지 보이실 거 같아요! 의식주 중에 현지 분들이 가장 많이 찾으시는 건 어떤 건가요? 혹시 음식이….”

    의식주 중에서 다분히 ‘식’에 맞춰서 물어보는 질문이 나왔고

    “실질적으로 저희가 건축 전문 기술은 없는데, 저희도 주택 조립해 볼 수 있나요? 다른 학생들 보면 판넬조립도 하던 거 같아서요!”

    건축에 딱 맞춘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써 줄 내용들이 많이 생기고 있네.’

    녀석들의 3학년 생기부에 채워질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어 갔다. 이 자리에서의 질문들과 거기에 대한 박 주임의 답변이, 올해 3학년 동안의 스토리텔링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럼 마지막 질문!”

    민주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저희 첫 봉사일은 언제인가요?”

    박 주임이 다이어리에서 일정을 확인하더니 하루를 콕 집었다.

    “빠르면 다다음주 토요일이겠는데?”

    민주, 용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학원 일정 조정이 필요하다면서 중얼거렸다. 태웅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가고 싶다면서 혼잣말을 했다.

    * * *

    태웅은 봉사동아리의 미니 인터뷰를 마치고 학원으로 향했다. 청소한다는 핑계를 대고 동아리 활동을 했다. 약간의 죄책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 죄책감을 덮을 만큼 그 시간이 즐겁기도 했다.

    “태웅아!”

    “어? 유미?”

    태웅은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한 소꿉친구를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요즘 바쁘다? 얼굴 보기 힘들어.”

    “3학년 되니까 정신없네. 넌?”

    태웅의 말에 유미는 맞다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태웅에게 도전장이라도 던지듯이 말했다.

    “야, 아무튼 올해는 진짜 진검승부야. 이번 중간고사, 내가 너랑 천일이랑 다 누르고 1등 찍는다.”

    태웅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잠깐 웃었다. 방금 전까지 봉사활동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과는 다른 이야기. 아니, 이게 오히려 고3답다면 고3다운 주제의 이야기였다.

    “그래. 난 꼴등 해도 좋으니까 서울한국대만 갔으면 좋겠다.”

    태웅의 농담에 유미가 깔깔 웃었다. 둘은 사이좋게 각자의 학원을 향해 걸어 갔다. 그런 두 사람을 도로에 세워둔 검은색 승용차 안의 여성이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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