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31화 (131/252)

131화. 칼과 칼집

“강은숙이가 아주 제대로 된 칼을 갈고 있네 그래.”

“칼이라니요. 그냥 저와 뜻이 같은 선생님들 몇 분 계신 것뿐입니다.”

강은숙 이사장은 이사장실을 방문한 천우원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천우원은 이사장이 내온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립다면서 말했다.

“형님도 녹차를 참 좋아하셨지.”

“…저희 아버지 이야기를 하러 오셨어요?”

천우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며칠 전에 민 부장이랑 한 교감이 신나게 까인 거 같던데.”

“까여요?”

“모른 척할 건가. 자네의 그 칼이 아주 뒤통수 제대로 베어낸 거 같더만. 다들 공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며칠 전, 릴레이 입시컨설팅과 그때 있었던 강명문과 민 부장, 김 부장, 한 교감의 이야기. 그 자리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이사장이 찻잔을 들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공포가 되는 것도 신기하네요. 켕기는 거라도 많은 모양이죠?”

“그럴 수도 있지. 은숙이도 잘 알 거니까.”

천우원이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소파에 등을 턱 기댔다.

“오래간만에 학교 한 바퀴 돌아보니까 좋더구만. 날씨가 더 따뜻해지고 벚나무라도 심어두면, 데이트 명소라도 되겠어.”

“강문고 교정이 예쁘기는 하죠.”

이사장의 답변에 천우원이 살기 어린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묘한 불안감을 느낀 이사장이 내려두려던 찻잔을 허공에 멈춰 세웠다.

“이 학교, 그대로 유지하고 싶지 않나?”

“….”

“자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우리 이사진이 이렇게 이 학교를 위해 힘쓸 일은 없었을 거야. 그건 알지?”

“….”

“그런데 이제는 학교 지켜 준 은혜도 모르고 칼춤 추고 노는 거 같더라고. 허허, 참나. 세월이 변해도 너무 변했지.”

천우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찻잔을 들고 이사장에게로 다가갔다.

“은숙아. 우리들하고 언제부터 사이가 이렇게 나빠졌냐.”

“나쁠 사이도 없지 않았습니까?”

“크크큭…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래도, 이번에는 도가 지나쳤어.”

그는 찻잔에 든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찻잔을 이사장 쪽을 향해 기울였다.

“이 학교를 유지하고 운영할 수 있는 건, 누구라고 생각하나?”

“….”

“우리 이사진이 똥꼬에 피나도록 노력한 건 생각 안 하고, 이제는 너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 거냐?”

기울여진 찻잔에서 남은 녹차들이 흘러내렸다. 허공에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녹차가 이사장의 구두 위로 떨어졌다.

“어디서 그딴 버르장머리를 생각해 왔을까, 응?”

이제 찻잔에 녹차가 남지 않았는지, 가냘픈 물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우리가 아니면 강남서초 명문이라는 강문고에도 미래가 없네. 우리 은숙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병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피식 웃으면서 천우원이 찻잔을 뒤로 내팽개쳤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찻잔이 박살 났다.

“그러니 칼은 내다 버리고 칼집만 들고 다녀. 우리 평화롭게 네 할아버지 유언 잘 지켜보자고. 알아듣나?”

이사장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인 천우원은 그 길로 이사장실을 걸어나갔다. 이사장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찻잔 조각을 하나씩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비싼 건데 아깝네.”

* * *

며칠 전, 강명문이 나간 교감실에서 세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웃었었다.

“이제 얼추 되겠지?”

“그럴 겁니다. 이 정도면 강 선생은 올해….”

“제대로 된 상담 한번 못하고 끝날 겁니다.”

민지정과 김영호가 흐흐, 웃으면서 비열하게 심지석과 박은환에게 끌려가는 강명문을 지켜봤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강 선생이 이번에 빠지게 된 만큼 자네들이 꼭 해줘야 하네.”

한명심의 말에 두 사람이 긴장한 얼굴을 했다.

“강 선생이 빠지면서 입시 실적이 더 떨어지면 그거야말로 진퇴양난이야. 그렇게 되면 안 되네.”

“알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실적을 작년보다 더 많이 내도록 하겠습니다.”

민지정은 주먹을 꽉 쥐면서 다짐했다.

‘이사진에게 밉보이는 순간 끝이다.’

이사진에게서 받은 공포는 그녀에게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게 해 주었다. 김영호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사진의 분노가 없었다면, 김영호는 올해도 적당히 성적조작, 대회조작, 과외 정도에만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민지정과 김영호는 3학년 학생들의 입시실적을 책임져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게 설령 공포라 해도,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감 떨어졌다 생각하지 말고, 분골쇄신하게. 그래야 우리가 살아.”

“명심하겠습니다, 교감 선생님.”

한명심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민지정과 김영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올해만 적당히 넘기면 된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자. 강문고에서만 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릴레이 입시컨설팅을 기점으로 산산조각나 있었다.

“미쳤어… 그 새끼는 미쳤다고!”

“진정해, 민 부장.”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교감선생님? 기껏해야 이제 3년 차인 교사입니다! 이제 초임 티 벗어나는 햇병아리 교사한테 우리가 다 농락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하게!”

한명심이 소리를 지르자 민지정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아직, 방법은 남아 있네.”

“무슨 방법입니까? 이번에도 강 선생이 실적을 싹쓸이하면….”

김영호가 달리 묘안이 있는지 붇자 한명심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강 선생의 실적이 우리보다 낮으면 되는 거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럼 우리가 더 많이 합격시키면 되지 않겠나.”

그 말에 민지정과 김영호의 몸이 움찔했다.

“왜? 자신 없는가?”

“그, 그건….”

“자네들 강 선생보다 몇 배, 아니 열 배는 더 교사생활을 한 베테랑들 아닌가. 그렇게 쫄아만 있을 거야?”

한명심은 이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베테랑 교사들이라고 하면 그들이 3년차 교사보다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강명문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보면서 지레 겁먹고 직접적인 견제를 하기 위한 방안만 구상했다.

“남은 건 정공법뿐이야. 두 사람도 올해 준비 잘 해 두게.”

“…알겠습니다.”

어렵게 입을 연 민지정의 대답을 들으며 한명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실적을 내기 위해 움직일 테니까 자네들은 자네들 나름대로 해 보도록 하게.”

* * *

“강문고 학부모들이 저렇게 우호적인 건 처음 봤어.”

한 주가 지나고 월요일, 나는 릴레이 입시컨설팅 이후 실시한 이벤트 당첨자 세 명을 만났다. 그들은 내 자리에 시간에 맞춰 왔다. 한 명씩 차례대로 자녀들의 자료를 면밀히 봐주고, 상담을 해 주었다.

“거의 뭐, 얼굴에 꽃이 폈더구만.”

“그러니까요. 강 선생님, 어떤 상담을 한 거예요?”

지석 선배와 박 선생의 말에 나는 별걸 다 묻는다면서 서류를 정리했다.

“평소처럼 했습니다. 그나저나 대회는 구상 좀 해 봤어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대회 건인데, 올해도 시사RPG대회 열 거야?”

지석 선배가 묻자 박 선생이 의견을 냈다.

“시사RPG도 좋은데, 뭔가 다른 형태가 되었으면 해요. 토론, 발표, 너무 뻔한 것 같아서.”

“흐음….”

박 선생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작년의 감사, 그리고 시사RPG대회, 수행평가 방식의 변화 등으로 인해 강문고의 올해 계획에는 발표, 토론 대회가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럼 학생들보고 창업 하나 해 보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모의창업이요?”

“모의창업이기는 한데, 계획서만 제출하고 끝이 아니라, 실제 지역 주민들에게 물건을 판매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실적을 두고서 경쟁하는 거고요.”

내 말에 박 선생이 재미있겠다면서 호응을 했다.

“저는 찬성! 경영학과나 미디어쪽 준비하는 학생들이 열심히 하겠는데요?”

“나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할 거면 2학년, 3학년 모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때?”

지석 선배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의창업 대회의 경우에는 꽤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많기에 3학년들은 참여를 꺼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2학년, 3학년 참가로 열어두죠. 하나만 더 고민을 해 볼까요?”

서로 머리를 맞대면서 계속 끙끙댔는데, 결국 이렇다할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 두 명의 남녀 교사가 교무실로 들어왔다.

“아, 그렇지, 차 선생, 홍 선생, 잠깐 와 봐.”

“네, 심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지석 선배는 둘에게도 의견이 없는지를 물었다. 차 선생이 팔짱을 끼고서 이야기를 했다.

“확실히 어렵네요. 대부분이 토론, 발표이다 보니….”

“혹시 이런 건 어때요? 착한 사마리아인 아시죠?”

홍 선생이 오늘 마침 수업 때 착한 사마리아인 미술작품에 대해 설명했었다면서 제안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대회, 어때요?”

“누가누가 더 착한가 보는 건가요?”

“선행상 같은 거기는 한데, 학생들 도와주는 학생, 학교를 위해 희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나는 홍 선생의 의견을 들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명확한 수상 규정이 필요하겠군요. 어떤 걸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손을 턱에 대고 잠시간 고민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의 선행을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대회로 준비해야겠네요.”

“선행을 홍보해요?”

박 선생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했다.

“네. 선행PR 같은 거죠. 방식은 자유입니다. PPT로 발표를 하든, 에세이를 쓰든, 동영상을 찍든. 모든 게 자유인 거죠. 단, 평가를 하는 선생님들은 정말로 학생들이 주장하는 선행이 실천되었나 조사를 해야 하겠고요.”

“손이 좀 많이 가겠는데, 괜찮겠어?”

지석 선배가 걱정하는 지점을 나도 고려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선행을 스스로 알리는 대회라면 몇몇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홍 선생님, 경필이 상담하셨습니까?”

“경필이 수요일에 하기로 했어요. 왜요?”

그 물음에 나는 씨익 웃었다.

“경필이에게 이 대회 추천해 주세요.”

내 말에 홍 선생이 알겠다면서 밝게 웃었다.

“상담 시 주의할 점은 다 기억하시죠?”

“네, 그럼요. 잘 해 보겠습니다!”

홍 선생의 답변을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대회 준비에 집중했다. 각 대회들의 규정 정리, 공지를 올리는 시점 등 일정을 정하면서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나도 슬슬 반 애들 상담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친 어깨를 두드렸다.

* * *

다음 날, 학생들이 제출한 <나를 소개해 줘> 종이를 하나씩 보면서 3반 학생들을 만났다.

정해진 수업 시간이 끝난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아니면 학생들을 만나기 어려웠기에 많은 학생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 꼭 만나야 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이태웅.’

태웅이는 내신 성적도 우수하고, 수상 실적도 많은 학생으로, 3반의 1등이자 전교 3등인 학생이었다. 민주도 공부를 잘 하지만, 태웅이 때문에 반 2등으로 밀려났을 정도로 내신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다.

‘모의고사도 이 정도면 안정적이고.’

고르게 1등급이 나온 태웅이의 2학년 모의고사 성적표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녀석이 사고를 친단 말이지.’

전생에 태웅이가 일으켰던 사고를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나는 이유,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태웅이가 제출한 <나를 소개해 줘> 종이를 확인했다.

<저는 서울한국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수능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서 경영을 배워 보려 합니다. 이후 진로는 그때 생각하려고 합니다. 수능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그때는 깊이 있는 상담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한 번 더 내용을 읽으니 미간이 좁혀졌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인상을 잔뜩 쓴 내 앞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태웅이가 들어왔다.

“그래, 앉아라.”

올해 강문고에서 벌어질 몇몇 사건.

그중 하나가 바로, 태웅이가 일으킬 사건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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