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16화 (116/252)
  • 116화.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지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우리는 슬로프를 다 내려와서 스키장 장비 대여점 앞 로비에 모였다. 스키가 익숙하지 않으 동석이는 내 리드로 조심히 내려왔다.

    “… 몰라 망했어.”

    “여긴 왜 쫓아왔대?”

    “쫓아오긴 누가 쫓아와? 우리는 오늘 한목대 입학처와 미팅 있어서 한목대 들렀다 오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녀석들에게 말했다.

    -최동석, 너희 비발스 가냐.

    오늘 아침에 동석이에게 문자를 보냈었고, 동석이는 그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어서 문자를 이렇게 보냈다.

    -비발스에서 여자애들까지 같이 1박2일 놀러 가는 거 다 알아. 내가 거기 가는 거 비밀로 하면 너는 용서해 주마.

    그래서 동석이는 우리가 비발스 스키장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우리 교사들끼리의 워크샵 일자 및 장소가 너희의 졸업여행 일정과 겹쳤던 거다. 그리고 이정석.”

    “네, 넵!”

    “너는 아직 스키 기초도 모르는 애한테 초보자 코스에서 타 보라고 시켜?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내가 리드해서 데리고 내려온 동석이는 아직 A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다.

    “아무리 실전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10미터도 제대로 못 내려가는 애를 이렇게 해? 슬로프 끄트머리에서 더 연습해야 할 거 아냐.”

    “그게… 죄송합니다.”

    정석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김은장 너도 마찬가지야. 이제 성인 됐다고 이렇게 나올 거야?”

    “죄송합니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들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정석이 어머니께서 나한테 연락 주셨다. 얘네 이틀 자고 오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아….”

    “대학 합격하니까 부모님 태도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

    “네.”

    “하지만 아직 너희는 고등학생이야. 성인 된 지 며칠 안 되었다고. 그러니까 외부로 나가는 거에 있어서는 걱정이 되실 수밖에 없어.”

    내 말을 듣던 태성이, 정아, 채영이도 뭔가 뜨끔했는지 몸을 쭈뼛거렸다.

    “일단 기왕 온 거 재밌게 놀자. 대신, 우리가 인솔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부상자가 나오면 안 돼. 각자 실력에 맞춰서 슬로프에서 놀아.”

    “지, 진짜요!?”

    “그래. 대신 정석이는 동석이 오늘 일일 메이트로 계속 붙어 다녀.”

    “네 알겠슴다!”

    나는 녀석들을 슬쩍 둘러보고는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리고 스키장 왔는데 시합이나 한번 할까?”

    “선생님 스키 잘 타세요?”

    “뭐 대충은. 박 선생님도 잘 타시지.”

    박 선생이 손에 들고 있는 개인 보드를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고수의 포스를 풍기는 박 선생을 보며 학생들이 긴장감 서린 눈을 했다.

    “지는 팀이 오늘 저녁 요리 하는 거다.”

    내 말에 녀석들이 알겠다며 내기에 동의를 했다. 명천이, 태성이, 채영이가 학생 대표로, 나와 박 선생, 지석 선배가 교사 대표로 출전했다.

    시합 방식은 상급자 코스에서 누가 더 덜 넘어지고 내려오는지였다.

    어릴 때부터 보드를 탔던 태성이와 채영이가 상급자 정도는 별거 아니라면서 자신 있게 올랐다. 명천이도 해외 놀러다닐 때 많이 탔다면서 반드시 이기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심판은 차 선생과 은장이가 보기로 했다.

    “시작!”

    * * *

    학생들은 짐을 정리하고 리조트에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지석 선배의 픽업을 받아 우리가 잡아둔 펜션으로 놀러 왔다.

    “미쳤어… 그 정도면 준 프로급 아니냐고.”

    은장이가 투덜대며 찌개 요리를 준비했다. 채영이와 태성이도 그 옆에서 술안주로 제육볶음을 준비했다.

    “알고 보니 스키 강사였던 거 아냐?”

    “어떻게 알았냐? 나 예전에 스키 강사 알바도 했었는데.”

    내 말을 들은 학생들이 그럴 줄 알았다, 사기 친 거 아니냐며 있는대로 불평을 쏟아냈다.

    “진 사람들이 말이 많네. 너희 어디 가서 스키나 보드 탄다고 하지 마라.”

    “쌤이 너무 잘 타시는 거예요!”

    채영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정석이와 명천이도 맞아 맞아,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영어쌤도 엄청 잘 타시고… 특훈이라도 받으셨어요?”

    “난 대학 다닐 때 레포츠 동아리였어서 레포츠 어지간한 건 다 잘해.”

    박 선생이 어깨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학생들은 숨겨진 고수들한테 당했다면서 투덜거렸다.

    “빨리 요리나 해. 정아는 고기 구웠어?”

    “하고 있어요.”

    녀석들은 그렇게 찌개, 술안주, 바비큐까지 역할을 분담해서 저녁밥을 준비했다. 동석이는 처음으로 탔던 스키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구석에 앉아서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동석이는 운동 좀 해야겠다.”

    “으… 그러게요.”

    다리를 주무르던 손을 놓고 동석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쌤, 저는 진짜 괜찮은 거죠?”

    “그래. 너는 덜 부려먹을게.”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동석이는 내 얼굴에서 그런 의도를 읽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안한데….”

    “쌤! 드세요!”

    정석이의 외침에 나는 방 안에서 노닥거리는 교사들을 불렀다.

    “윤 선생님은 들어가셨습니까?”

    “응. 역시나 외박은 힘드신가 봐. 방금 스키장 셔틀 타고 가셨어.”

    “교감 선생님은요?”

    “잠깐 통화하고 오신다 그러시면서 나가셨는데 아직 안 들어오셨어.”

    지금쯤 한 교감이 통화를 한다? 상대가 누구일지 예상한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끼리 먼저 드시죠.”

    내 말을 신호로 차 선생과 홍 선생이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일손을 도왔다. 차 선생, 홍 선생은 3학년 수업을 많이 맡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나명천.”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고기를 먹으며 명천이에게 다가갔다.

    “왜요?”

    “가방 샀어?”

    “안 샀어요! 그리고 그거 내 거 아니라니까!”

    “네 거 산다며? 핑크였는데.”

    “아.”

    명천이가 당황해서는 어버버했다.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냐며 호기심을 갖고 다가왔고, 명천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 갔다.

    다른 교사들도 학생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좀 늦었네.”

    “교감선생님!?”

    학생들이 고기를 집던 젓가락을 멈추고 한 교감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원망의 얼굴을 했다.

    “워크샵이라 했잖아.”

    나는 능청스럽게 녀석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쨌든, 한 교감까지 합류하면서 우리는 바비큐와 찌개, 술안주를 먹었다. 이제 녀석들도 성인이어서 내가 맥주와 소주를 권하기도 했다.

    “OT에서 술 못 마시면 더 힘들어. 오늘부터 연습한다 생각해.”

    “암, 그렇고말고. 자고로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지.”

    술을 따르는 나를 보면서 지석 선배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는지 학생들이 술을 기분 좋게 받았다. 특히, 정석이, 채영이가 신이 나서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 와중에 명천이와 동석이도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은장이와 정아도 맥주 한 컵을 두고 홀짝댔다.

    “오늘 이렇게 마시는 건 비밀이다?”

    “네!”

    박 선생의 말에 학생들이 힘차게 답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술이 들어가고, 점차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흐어….”

    둘러보니 하나둘 술에 취한 사람들도 나왔다. 한 교감도 술을 마시더니 기분이 좋은지 내 어깨에 팔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에 강 선생이 큰일 했어!”

    “교감선생님, 잠시만요.”

    나는 한 교감의 팔을 내리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갑자기 진지해진 내 얼굴에 교사들과 학생들이 하나둘 나에게 집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너희들, 올해 내가 합격, 아니 여기 계신 쌤들이 합격시킨 거나 다름없는 거 알지?”

    “당연하죠 쌤! 진짜 쌤들 아니었으면 저 서울한국대는 꿈도 못 꾸고 있었을 거예요.”

    “…덕분에 의대 갔으니까.”

    “저도 쌤 아니었으면 연천대를 어떻게 갔겠어요, 헤헤.”

    녀석들은 술이 들어간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몇몇은 쑥스러워했고, 몇몇은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가슴을 팡팡 쳤다.

    “그래. 그러니까 올해 후배들도 좀 도와줘야 한다.”

    “에이 쌤 당연하죠! 저희도 그 정도는 다 예상하고 있었어요!”

    “특강을 그렇게 많이 하셨는데, 내년에도 뭔가 있는 거죠?”

    은장이의 말에 채영이도 맞장구를 치면서 안주로 놔둔 과자를 집어 먹었다. 동석이와 정석이도 어떤 걸 시킬지 자기네들끼리 예상해보면서 키득거렸다.

    “좋아, 그럼 1년간 또 잘 부탁한다!”

    나는 손에 든 잔을 들고서 건배를 외쳤다.

    “후배들 위해서 하는 거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쌤한테는 도움 드릴 게 많으니까요. 열심히 할게요!”

    학생들이 각자의 대답을 하면서 내 1년 조교를 하겠다고 확답을 했다. 기분 좋게 잔을 든 채영이에게 박 선생이 중얼거렸다.

    “이래서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하는 거야.”

    “왜요?”

    “너희들 술김에 오케이 했잖아. 당한 거라고.”

    그 말에 정석이가 불안해졌는지 들고 있던 맥주캔을 따다 말고 물었다.

    “쌤, 어떤 걸 도와줘야 해요?”

    “아 별거 없어. 후배들 진로진학 멘토링, 합격생 인터뷰, 합격생 수기,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선배의 조언 영상 촬영, 전공자 특강, 전공 선배와 함께하는 방학 캠프, 선배만 믿고 따라와 대학 탐방….”

    “조교 알바비는 있어요…?”

    이어진 태성이의 물음에 나는 무슨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당연히 재능기부지, 알바비를 왜 받아?”

    “…악마다.”

    “오대천왕….”

    학생들의 푸념을 들으면서 나는 녀석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담임 말 어긴 벌이다 이놈들아. 어딜 감히 남녀 같이 1박 2일을 놀러 와? 너희 아직 성인이지만 고등학생인 거 알아 몰라?”

    “하지만 이젠 성인이라 술도 마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학교 졸업했냐? 했어? 어디서 말대꾸야 말대꾸는.”

    태성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학생들을 노려봤다. 녀석들은 마시던 술도 깨는지 슬금슬금 내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방금 말한 거 전부 싹 다 준비시킬 거니까 그렇게 알아. 올 1년, 내 조교라 생각하고 소처럼 일해라.”

    “너무해….”

    “교감선생님도 허락하신 일이야. 그렇지요, 교감선생님?”

    나는 한 교감을 돌아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가 잠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더니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작년 합격생들 수기도 받고 하면 올해에도 좋겠지!”

    “분명 올해도 입시실적이 좋을 겁니다. 여기 있는 합격생들이 주축을 이루어 도와준다면 말입니다. 물론, 올해는 차 선생님과 홍 선생님 역할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차 선생, 홍 선생이 잘은 모르겠지만 맡겨만 달라며 힘차게 답했다. 아직은 그 두 사람이 주된 역할을 맡지는 않겠지만, 곧 그럴 때가 올 것이었다.

    할 말을 마친 나는 교사들과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스텝을 향한 단계들을 구상했다.

    내가 합격시킨 합격생 선배들이 후배들을 돌봐주는 그림. 그 그림이면 강문고의 이미지와 함께 나의 이미지도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1월은 슬슬 언론에 내 이름을 뿌릴 시기였다. 그동안 숨겨왔던 강문고 합격 신화를 보여 준 교사가 누구인지 드러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사진도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이고, 민 부장 라인의 힘은 더 줄어들게 된다.

    ‘그쪽은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 * *

    강명문이 학생들과 비발스 스키장에서 만나 워크샵이자 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 오석상은 교무실에서 류지훈과 함께 앉아 있었다.

    “받았나?”

    “네.”

    “뭐라 그러나?”

    오석상의 물음에 류지훈이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는 말했다.

    “강 선생이 말한 대로 오늘 이사진 회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잠깐 저보고 노량진으로 오라고도 했고요.”

    “자네도 노량진인가?”

    오석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류지훈은 그런 오석상의 웃음에 맞춰 따라 웃었다.

    “강 선생… 이걸 경계하고 있었군.”

    오석상은 류지훈에게 이동하라 고갯짓하면서 의자 옆에 세워둔 엑스칼리버를 손에 쥐었다.

    “그럼 한번 가 보세. 강 선생의 예측이 어디까지 맞아떨어질지 기대해 보자고.”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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