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내 조교가 돼라
“목표라….”
서 교수의 질문에 나를 제외한 다른 교사들이 한 교감에게 집중했다. 잠시간 입을 중얼거린 그는 내가 일러둔 대로 목표를 정해 두었는지, 천천히 자신의 목표를 이야기했다.
“작년에 강 선생님과 논술 특강을 열었습니다.”
한 교감은 논술특강에서 자신이 수강 대상으로 삼았던 학생들의 특징을 이야기했다.
“강남구에 살아도 저소득층이 있고 학력 격차 문제를 겪고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모두 내가 조언해 주었던 내용들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교감은 논술 특강 이야기를 줄줄이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한 교감을 보면서 살짝 구역질도 났다. 하지만, 서 교수는 그런 내 모습을 파악하지는 못하고 한 교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강남서초권 학생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교육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박수를 쳤다.
“훌륭하십니다.”
“아닙니다. 저는 뭐….”
한 교감은 자신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보면서도 빙긋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무시한 채 서 교수에게 말했다.
“저희 강문고 선생님들이 모두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서 학생들 입시 준비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역시. 그런 거였구만.”
그가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 앉은 다른 교사들을 바라봤다.
“선생님들은 어떠십니까?”
“저도 작년 특강을 하면서 배운 게 많습니다.”
지석 선배를 시작으로 교사들이 한 명씩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서 교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있지만, 요즘에는 한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도 있어요.”
“복수요?”
“네. 강 선생님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거든요.”
교활하게 웃는 박 선생을 향해 나도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서 더욱 입술을 올렸다.
“두 분이 무슨 사건사고라도 있었습니까?”
“강 선생님이 입시 준비 때문에 저희를 정말 수하의 조교보다도 못하게 부린 것이 화근이었죠.”
박 선생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자 서 교수가 껄껄 웃었다.
“아이고, 그런 거였군요. 이거 참,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왜 교수님께서 미안해하세요. 이건 전적으로 강 선생님 잘못이에요. 강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말 한 번 안 했잖아요.”
“미안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면 진정성이 있어요? 하나도 없잖아요.”
“해도 뭐라 그러고 안 해도 뭐라 그러고….”
“뭐라고요? 이 선생님이 진짜.”
서 교수는 이전보다도 더 크게 웃으면서 왜 박은환 선생님이 복수를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다면서 즐거워했다. 박 선생은 교수님도 이제 아셨으니까 복수에 동참해달라며 농담을 던졌다.
참, 이런 거 보면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는….”
홍 선생과 차 선생은 아직 교사로서의 목표를 굳건하게 세웠다기보다는, 초임교사의 열정 정도였다. 학생들을 잘 이끌어 주고 싶다거나, 적응을 잘 못 하는 학생을 리드하고 싶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동석이 같은 학생이 있으면 앞으로는 제가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동석이? 아! 최동석 말씀이시군요!”
윤 선생은 내가 동석이를 상담해 주면서 가능성을 찾아 주었던 것처럼 앞으로는 자신도 그러고 싶다 밝혔다. 잠재력 있는 학생을 자신의 손으로 키워내는 것. 윤 선생은 거기에 재미와 희열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저는 갈대 같은 학생들의 진로를 잡아 줄 수 있는 멘토가 되어 주고 싶더군요.”
지석 선배는 자신이 지금까지 상담했던 학생들의 유형을 이야기하면서 아쉬운 점들을 말했다. 강문고의 특성상 쉽게 유학이나 가업을 잇는 걸 결정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마음가짐. 아직 유학을 간 학생들이 실패한 사례를 보지 못했을 지석 선배였지만, 그는 이미 어설픈 유학은 피를 볼 뿐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허어, 심 선생님의 목표도 참 멋지십니다.”
진심으로 감탄한 서 교수의 반응에 지석 선배가 멋쩍은 듯 고기를 후다닥 집어 먹었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그런 학생들도 많이 생겼고.’
변함없는 지석 선배의 마인드를 확인하면서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이제 제 차례군요. 저는….”
“아이! 강 선생 이야기는 됐네. 우리가 그런 걸 물어볼 사이인가?”
“네? 아니, 저도 좀 이야기를….”
“자자, 그러지 말고 다들 잔 드세요. 낮이라 술은 못 하지만 그래도 건배는 해야죠!”
박 선생의 주도로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잔을 들고 일어났다. 나도 얼떨결에 일어나서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정말 유익한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건배!”
서 교수의 인사와 김철웅의 건배로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잔에 든 음료수를 원샷했다.
오늘은 입학자문위원이 되고자 희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
아직 확정이 된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그려진 것 같았다.
우선은 이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특히 박 선생과 지석 선배는 서 교수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박 선생님의 복수극은 나도 좀 보고 싶은데 껄껄.”
박 선생은 좀 다른 방향으로 마음에 든 것 같았지만.
“참, 교수님 저희 식사비는 저희가 내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카드를 꺼내면서 결제를 준비했다.
“55만 원입니다.”
“…얼마요?”
“55만 원이요.”
점원의 말에 나는 카드를 꺼내다 말고 지석 선배에게 SOS를 보냈다. 선배는 한숨을 쉬더니 점원에게 말했다.
“아홉 명씩 나눠서 각자 계산할게요.”
“에이, 됐어! 내가 살게!”
나는 먼저 계산하려고 하는 서 교수를 막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교수님. 이건 더치페이하겠습니다.”
“어허, 안 그래도 된다니까.”
서 교수의 고집에도 나는 끝까지 그를 붙잡고 우리가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서 교수가 우리에게 밥을 사는 형태가 되면, 이후에 피곤한 이야기가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이 자리한 한 교감 때문에도 그랬다.
“아이고, 이건 제가 사겠습니다, 교수님.”
“교감선생님도 더치페이 하십시오.”
당연히 한 교감 혼자 다 내는 것도 안 되었다.
끄응, 신음하던 서 교수가 어쩔 수 없다면서 카드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점원이 나눠둔 금액에 맞춰 각자 계산을 했다.
“다음번에는 내가 꼭 사겠네.”
“아닙니다, 정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나는 서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다른 교사들도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서 교수와 김철웅 사정관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가?”
한 교감이라는 불청객이 포함된 교사들은 기대에 차면서도 다소 걱정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본 후 서 교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발스 스키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 * *
동석은 정석의 리드를 받으면서 스키를 배우고 있었다.
“어어어어!”
“야, 동석아! 거기는 다리를 좀 더 이렇게! 아니 잠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넘어지는 동석을 보며 정석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더 버텼다. 조금만 더 힘내 보자!”
“오늘 정석이는 동석이 가르치다가 끝나겠는데?”
옆에서 신나게 중급자 코스를 타고 내려온 태성이 정석의 옆에서 보드를 멈추며 말했다.
“그러다 오늘 초급자도 제대로 못 타고 끝나는 거 아냐?”
“몇 번만 더 연습하면 같이 탈 수 있을 거 같은데? 동석아 괜찮지!”
정석이 동석의 등을 두드리면서 응원을 했다. 동석은 정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괘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나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아냐아냐! 괜찮아 동석아! 야, 넌 왜 또 애 기죽게 만들어?”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동석아 괜찮아! 그리고 이제 실전 연습하면 되니까 기죽지 말자!”
은장의 타박에 정석도 당황해서 동석을 위로했다. 그리고는 몇 번 연습을 더 하고 같이 초급자 코스로 올라가는 리프트에 탑승했다.
“야 근데 이러다가 아는 사람 만나면 진짜 웃기겠다 그치.”
“아는 사람?”
“응. 뭐, 다른 반 친구라든가,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
“하긴, 선생님들도 방학이니까 놀러 다니실 수도 있지.”
리프트에서 수다를 떠는 은장과 정석, 명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석이 무언가 생각난 듯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냈다. 장갑을 벗고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한 동석은 놀란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응? 왜 그래?”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동석은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하면서 리프트에서 내렸다. 미리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던 태성, 정아, 채영이가 넷을 반겼다.
“오늘 처음으로 다 같이 타네!”
채영이 신이 났는지 보드를 한쪽 다리로 끌면서 다가왔다.
“근데 동석이 탈 수 있어?”
“이제 기초는 다 배웠으니까, 나머지는 코스에서 직접 경험하는 게 좋지. 준비됐어?”
정석의 말에 동석이 긴장한 얼굴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어, 어, 어, 어, 하, 하, 할 수 있, 어.”
“…못 할 거 같은데?”
“큰일이네. 내가 뒤에서 봐줄 테니까 일단 가자.”
정석이 동석의 뒤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뒤에서 친구들이 먼저 출발하겠다면서 출발 준비를 했다.
여전히 동석은 겁을 먹은 채 손발을 벌벌 떨면서 자리에 서 있었다.
“자, 간….”
“아직 준비도 안 된 애한테 뭘 시키냐?”
뒤에서 나타난 여성이 스키 폴대로 정석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헙.”
동석은 여성을 보자마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먼저 출발한 태성, 정아, 명천, 채영은 이미 스로프를 내려가고 있었다.
정석, 은장은 갑자기 등장한 여성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누군가 다치기라도 해 봐. 너희들 아직은 학생인 거 알지?”
그 말에 놀란 정석이 여성을 자세히 살폈다.
“헉, 영어쌤?”
“헐, 쌤도 여기 놀러오셨어요?”
박은환은 입가를 가리던 넥워머를 내리면서 밝게 웃었다.
“안녕, 역시 여기에들 있었네.”
“역시, 요?”
“응. 너희 담임쌤이 너희들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던데?”
그녀의 말에 정석과 은장이 놀란 토끼눈을 학서 박은환을 바라봤다.
“설마 두 분 같이 놀러오셨어요?”
“응? 아아, 둘이서만 온 건 아니고….”
“헐 대박. 두 분 사귀어요?”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나 이마를 짚은 박은환의 뒤로 심지석이 다가왔다.
“너희는 왜 여기에서….”
“사회쌤!?”
“뭐야, 삼각관계야?”
“아니 그냥 선생님들 다 같이 놀러오신 거 같아….”
동석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러자 정석은 동석의 표정이 핸드폰을 확인할 때 굳어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야, 최동석! 담임한테 네가 말했어!?”
“아니, 너희 부모님한테 들었다.”
뒤에서 스키를 타고서 나타난 남성이 정석의 옆에 다가와 호오 입김을 날렸다.
“으악! 내 고글!”
고글에 서린 김을 닦으면서 정석이 남성을 돌아봤다. 남성은 정석의 고글 위 이마로 딱밤을 날렸다.
“아주 잘들 한다. 내가 남녀 같이 1박2일 여행 가는 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그 말에 정석과 은장의 몸이 찬 기운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똑바로 서게 되었다. 동석은 그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방은 어디로 잡았어?”
“아하하하, 쌤 저희 당일치기로 왔죠, 숙소는 없….”
“여기 리조트에….”
발뺌하려던 정석이 은장의 답변에 놀라서 소리쳤다.
“야 김은장! 그걸 말하면 어떡해!”
“오호?”
밑으로 내린 넥워머 안으로 강명문이 악마처럼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큭큭 웃었다.
“역시 너희는 안 되겠어.”
강명문을 바라보는 학생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그는 학교에서 종이몽둥이로 학생들을 훈계할 때처럼 스키를 타고서 학생들 주위를 빙빙 돌았다.
“벌을 주겠다. 먼저 오늘 밤은 우리와 같이 보낸다.”
학생들의 얼굴이 절망에 빠진 듯 일그러졌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먼저 슬로프를 내려가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속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강명문은 폴대를 스키장 바닥에 팍 꽂으며 말했다.
“그리고, 전원 1년간 내 조교가 돼라.”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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