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13화 (113/252)
  • 113화. 강원도로

    은솔이를 만나고 다음 날, 나는 박 선생에게 부탁해서 민주와 학교에서 만났다.

    “오늘 또 빚지신 거예요.”

    박 선생이 티 나게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눈웃음만 살짝 던지고는 민주에게 은솔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줘야 해.”

    민주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민주에게 부탁한 건 은솔이의 교과 멘토링이었다. 은솔이가 공부를 벼락치기로만 하다 보니 기초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겨울방학부터라도 친구의 멘토링을 받으면서 국영수 과목의 성적을 올릴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방학 중에 학교 오픈해둘 거니까 자율학습으로 멘토링 해 줘. 그 멘토 활동도 학생부에 올리자.”

    당연히 민주의 학생부를 채우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고.

    “네!”

    민주는 내가 이야기했던 사항들을 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기사도 꾸준히 읽었고, 책도 많이 읽었다. 사회적기업, 공정무역을 향한 관심을 키우면서 관련된 기업들의 특징들도 조사했다.

    은장이가 입시 준비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해 온 민주를 향해 칭찬을 했다.

    “좋아. 내신은 어땠니?”

    “조금 올랐어요! 1.6 정도 나왔습니다!”

    이거 은장이에 이어서 다음 서울한국대 합격생은 민주가 될 것 같은데?

    “좋아. 서울한국대 준비해 보자!”

    나는 캘린더를 보면서 2012학년도 입시 일정을 가늠했다.

    ‘이 정도 준비해두면 괜찮겠네.’

    아직 만나지 않은 내년도에 내가 담당할 학생들. 미리 알아두고 가능성이 있을 학생들을 선별해두는 작업들. 내년 고3뿐 아니라 고2, 고1 중에서도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만나서 입시 스케쥴링을 만들어두는 일들.

    그런 일련의 계획들을 돌아보면서 1층으로 내려와서 운동장을 바라봤다.

    “뭐야?”

    언제 학교로 놀러 왔는지 동석이와 정석이, 은장이, 명천이가 눈이 쌓여 있는 운동장에서 눈사람들을 만들고 있었다.

    “어, 쌤!”

    은장이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정석이와 동석이는 이제 눈사람의 마지막 장식을 하고 있었다.

    가장 큰 눈사람은 한 쪽에 막대기를 들고 있었고, 앞에는 그보다 더 작은 눈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형태였다.

    “귀엽네.”

    나는 옹기종기 모여서는 손을 호호 불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앞으로 남은 한 달여의 기간. 2011학년도 입시도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12월 말일과 1월 1일 신정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는 오래간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학생들은 저들끼리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선생님!!!!]

    그리고 신정이 낀 주말이 지난 바로 오늘, 채영이의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채영이가….]

    채영이의 합격 소식은 채영이 본인이 아니라 채영이 아버지에게 듣게 되었다. 그는 딸이 이렇게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한 건 화장 이후로 처음이라면서 하루종일 그간의 여정을 이야기했다.

    “채영이에게 축하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채영이 아버지와의 전화를 끊고, 준비물들을 가득 적은 노트를 확인했다.

    “차 렌트도 해야겠네. 리프트권 예약, 펜션 예약은 했고… 아니 근데 이거 진짜 내가 다 내야 해!?”

    볼펜으로 항목들을 하나씩 체크하면서 괜히 화가 나 펜으로 줄을 직직 그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쯤이면 아마 이사장이 그에게도 말을 했을 것이다.

    “네, 강명문입니다.”

    [강 선생, 나 한명심이야.]

    예상대로, 전화는 한 교감에게서 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교감선생님.”

    [그래. 신년은 잘 쉬었나?]

    “교감선생님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나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면서 노트에 줄을 긋던 볼펜을 멈췄다.

    [오늘 당직인가?]

    “아닙니다. 오늘은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군. 음… 이번에 한목대에 방문하기로 한 일정 말인데.]

    한 교감은 말을 잇기를 망설이면서 주저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리면서 노트에 올려둔 볼펜촉을 뺐다 넣었다 반복했다.

    [나 좀 도와주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말했다. 내 물음에 한 교감은 부끄럽다면서 이야기를 했다.

    [한목대 서윤수 교수님과 미팅 자리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솔직히 나는 서윤수 교수님이 나를 초대한 이유를 잘 모르겠네.]

    그가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서윤수 교수가 한 교감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을 터였으니까.

    그런데도 이번에 한목대 미팅 자리에 초대가 되었다?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힘을 쓴 것이라는 생각만 들었을 것이다.

    [왜,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 설명회 때 딱히 많은 걸 도와드린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않나 허허….]

    나는 한 교감의 한탄을 무시하고는 그가 궁금해할 부분을 알려 주었다.

    “제가 추천했습니다.”

    [강 선생이?]

    “네. 이번 한목대 미팅에서 교감 선생님을 꼭 모시고 참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약간 과장이 들어가 있기는 했지만,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 교감은 앞으로도 필요한 사람이기는 하다.’

    미래에 한 교감이 사학비리를 옹호하는 사람이기는 했으나, 앞으로의 입시실적을 위해서는 그의 권력이 필요했다.

    작년인 2010년에도 그의 권력 덕이 없었다면, 내가 원하는 형태의 특강들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작년에 제 실적이 좋았던 것도 교감 선생님께서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신 덕분이 큽니다.”

    [그게… 암, 그렇지, 그렇지.]

    “이게 모두 교감 선생님께서 입시판도를 분석하시는 안목이 뛰어나신 것이지 않겠습니까. 작년에 정말이지, 교감선생님 안 계셨으면 동석이가 연천대 합격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자 핸드폰 너머에서 한 교감이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어느 정도 실력 테스트 같은 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진 내 말에 다시 웃음소리가 그쳤지만.

    [테스트?]

    “서윤수 교수님은 인성과 실력을 모두 겸비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가 서 교수님께 러브콜을 자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서 교수가 나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하는 것, 대학 입시 자문위원을 요청한 것, 그런 걸 떠나서도 나에게 보내는 호의적인 태도들.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족집게 강사처럼 분석력이나 예측력이 뛰어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인성적인 역량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 선생은 참, 합격시키는 학생들 보면 대단해.

    -어떤 점 말씀이십니까?

    -다들 무언가 하나씩은 부족한 학생들 아닌가. 내신이든, 상식이든, 아니면 태도든.

    그러면서 그는 언론에서도 오르내렸던 동석이와 은장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내가 강 선생을 더 좋아하는 거야! 공부만 잘 하는 멍청이들이 아니라 가능성이 갇혀 있는 녀석들을 키워 주잖아! 실제로 실적도 좋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서 교수가 선호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실력과 인성. 이 두 개를 모두 겸비한 사람이어야만 그의 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교감선생님의 실력은 이번 입시 실적에 이어졌던 특강으로 검증이 되었습니다. 그렇죠?”

    [그, 그렇지! 내가, 그, 안목이 없었으면 강 선생에게 그런 권한 안 줬지!]

    나는 한 교감의 말을 들으면서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남은 건 인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는 교감 선생님의 인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 교수님은….”

    조금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을 멈추면서 한 교감의 반응을 기다렸다. 핸드폰 너머에서 무언가 고민하는지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교감선생님께서 어떤 분인지 잘 모르십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나?]

    나는 핸드폰을 양손으로 잡고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감선생님의 최종 목표를 설정해두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최종 목표?]

    “네. 교감선생님께서 강문고에서, 강남서초권 명문고등학교의 교감선생님으로서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입니다.”

    한 교감은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비리 폭로에 반대했다. 제 한 몸 건사하고자 나를 언론에 팔아넘기고, 후배 교사들의 잘못으로 모조리 뒤집어씌운 사람이다.

    그럼 한 교감은 그때 왜 그랬을까?

    회귀하고 살펴본 그의 모습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권력이 있어 보이는 쪽에 붙고, 그렇지 않은 쪽은 내치고.

    그걸 자신의 필요에 맞춰서 색깔을 바꿔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침 작년 여름논술특강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지금은 학교 내에서의 영향력이 큰 나와 이사장 쪽에 맞춰서, 그의 색깔도 변해 갈 수 있었다.

    “그때의 취지를 기반으로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이전에는 한 교감에게 당하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한다. 그리고 일이 틀어져도, 교감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초임교사 코스프레를 하면 된다.

    이러한 계산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교감은 그런 내 속내를 전혀 모른 채 핸드폰 너머로 쾌재를 불렀다.

    [맞네! 맞아! 교육격차가 있는 학생들을 위해 우리 강문고가 힘을 썼지! 한국고는 생각도 못 하는 그런 일이었어!]

    “맞습니다. 그 논술특강을 허가해 주신 교감선생님, 언론에 나온 교감선생님의 모습이 바로 교감선생님의 인성이자, 교사로서의 최종 목표에의 그림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신이 났는지 기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자네를 잘못 봤어. 권력욕이라니, 이건 명예야!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고 교사야!]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는 한 교감을 무시하면서 나는 내 할 말을 했다.

    “그러니 이번 한목대 가기 전까지 준비 꼭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목대 방문은 이번 주 금요일이니까요.”

    [걱정 말게! 내가 더 고민해서 완벽한 스토리를 만들어 보겠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신이 나서 웃고 있는 한 교감의 말을 뒤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 한 교감의 방향성을 우리 쪽으로 돌리는 건 반드시 필요했다.

    작년에 나에게 호되게 당한 민 부장, 그리고 그녀의 라인인 임 부장과 김 부장이 어떤 꿍꿍이를 펼칠지 몰랐다.

    뭐, 그 사람들이 뛰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만, 만에 하나를 위한 보험은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바로 한 교감의 힘이, 민 부장 라인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지킬 큰 방어벽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계속 끌고 갈 위인은 아니지.’

    결국 한 교감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의 비리 때문에 스스로를 좀 먹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한 교감을 내치면서 그의 온갖 비리를 폭로할 계획이다.

    전생에 그가 나에게 거짓을 진짜처럼 포장했던 것과는 달리,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이다.

    생각을 마친 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강원도 여행 체크리스트를 다시 점검했다. 적당히 항목들을 정리하면서 한가한 오후 시간을 즐겼다.

    * * *

    “아 빨리 좀 와요!”

    2011년 1월 7일 금요일. 나는 멀리서 낑낑대며 캐리어와 개인 스키 장비를 끌고 오는 지석 선배에게 소리쳤다.

    “스키 장비 하나 없는 녀석이 이 고통을 알겠냐!”

    “그러게 왜 들고 옵니까. 전부 렌트해서 놀자니까.”

    “네놈 돈 아끼라고 그러는 거구만 그것도 몰라?”

    “저도 강 선생님 생각해서 개인 장비 가지고 왔는데 서운하네요.”

    지석 선배와 박 선생은 나에게 배려심이 없다느니 실망이라느니 하면서 불평을 날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냥 개인 장비로 타고 싶은 거잖아.

    나는 그들의 불평을 들으면서 인원을 점검했다.

    “지석 선배, 박 선생님, 윤 선생님, 차 선생님, 홍 선생님… 한 분 빼고 다 오셨네요.”

    “어? 두 분 안 오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 오 선생님과 지훈이가 아직 안 온 거 같은데?”

    박 선생과 지석 선배의 의문에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아, 저기 오시네요.”

    멀리서 캐리어를 끌고 한겨울 등산복을 입은 채 등장하는 남성을 보면서 다른 교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봤다.

    “오늘 한목대에 갈 인원들이구만! 다들 좋은 자리에 초대된 걸 축하하네!”

    한 교감이 환하게 웃으면서 모여 있는 교사들에게 말했다.

    “마지막 일행인 교감 선생님도 오셨으니까 출발해 볼까요?”

    교감선생님이랑 같이 여행 가는 거면 당장 짐 빼겠다고 말하는 박 선생을 겨우 말리면서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출발하겠습니다! 선배, 출발하세요!”

    “그래 가자… 아니 근데 내가 왜 운전기사야!?”

    “…나중에 죽었어 진짜.”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던가….”

    “강 선생님 너무해요….”

    “좋아!!! 출발하세!!!”

    한 교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개미보다 작은 소리로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면서 한껏 기대에 부푼 채 렌트한 승합차의 엔진 소리를 즐겼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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