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책임진다
방학식이 끝나고 크리스마스도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야, 나와.
올해도 외롭다며 술잔을 기울이는 지석 선배와 어울려 주다 보니 이틀이 내리 지나간 탓이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학교로 출근을 했다. 방학 중 당직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2010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는 시점이었기에 연락도 여기저기에서 많이 왔다.
합격한 학생 학부모들의 감사 문자와 전화가 가장 많았다. 그중에는 올해 특히나 신경을 많이 썼던 우리 반 학생들의 연락이 많았다.
-쌤! 저희 오늘 놀이공원 왔어요!
크리스마스에 자기들끼리 놀러갔다면서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그 사진에는 명천이가 어색하게 은장이 옆에 서 있었고, 동석이, 은장이가 기쁜 듯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었다. 태성이가 사진을 찍었는지 얼굴이 가장 가까웠고, 제일 뒤에서 정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석이는 연애하느라 빠졌다는 말도 문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름 자기들 식으로 놀러다니는 녀석들을 확인하면서 기쁜 듯, 아쉬운 듯 미소가 지어졌다.
“왔냐?”
“네! 오늘도 부탁드립니다!”
마치 무협지 사부님에게나 할 법한 자세로 채영이가 힘차게 대답했다.
아직 면접이 끝나지 않은 채영이는 주기적으로 내 수업을 받으러 왔다. 오늘도 면접 연습을 하기 위해 학교에 들른 것이었다.
“며칠만 더 힘내자!”
채영이의 연습이 끝난 뒤에는 동석이, 정석이, 동석이, 명천이가 학교를 찾아왔다. 녀석들은 테니스장에 설치해둔 야외면접연습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녀석들이 나가자 면접실을 철거했다. 윤 선생과 류 선생은 다시 테니스장이 열리자 기뻐하면서 테니스를 쳤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 소수를 제외하면 학교는 학생들이 많이 빠져나가 고요했다. 간혹 윤 선생처럼 스포츠를 좋아하는 교사들이 운동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좋네.’
간만에 느끼는 적막감을 온몸으로 즐기면서 서윤수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의 방문 일정을 알리자 서 교수는 자신도 시간을 빼두겠다면서 기쁜 마음으로 웃음을 날렸다.
* * *
채영이는 면접을 꽤나 성공적으로 치르고 왔다. 자세, 발음 모두 훌륭했고 답변 내용도 좋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약자를 잘못 말했는데 괜찮겠죠?”
전공 용어의 약자 중 한 단어를 잘못 말했다는 점이었다. 전공 지식을 물어보기에 이런 부분은 일부 감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대신, 다른 상황질문들은 적절하게 답변을 했다. 사고가 났을 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좋아하는 관광지를 기반으로 어떤 안내를 해 주고 싶은지 등의 질문들도 마찬가지로 괜찮았다.
“이 정도면 잘 했다. 자세 흐트러지지도 않았다고 했고, 발음도 좋았고. 결과 괜찮겠는데?”
내 평가에 채영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진짜요? 진짜죠? 하며 기뻐했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긍정적으로 기다려 볼 만하다.”
“그거면 돼요 쌤! 저도 보고 나오면서 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채영이의 호들갑을 잠재우면서 녀석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직 합격자가 된 건 아니니까 들뜨지 말고, 경건한 마음으로 결과 기다려.”
“네! 아 합격해서 친구들하고 스키장 갔으면 좋겠어요.”
“스키장?”
“네. 저도 합격하면 1월에 친구들 스키장 가는데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들어보니 동석이, 은장이, 정석이를 비롯한 3반 학생들이 강원도 스키장으로 여행을 간다는 듯했다. 보니까 1박2일로 다녀오는 것 같았다.
‘버스 놓쳤다는 핑계 대고 하루 자고 올 생각인가 보네.’
녀석들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생각에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1월 초 언제 가니?”
“아마 신정 다음 주일 거 같아요.”
채영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에게 많은 정보를 오픈했다. 채영이의 답변을 들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씨익 웃었다.
“꼭 합격하자. 놀러 갈 수 있을 거야.”
“네!”
채영이는 나에게 면접 수업 끝까지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녀석의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장님.”
[강 선생님, 오늘도 학교 나오셨어요?]
“네. 채영이가 면접 끝나면 학교로 오겠다 했거든요. 그건 그렇고….”
나는 주위에 누군가 없는지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년에 봉사활동 동아리 하나 해 봐도 되겠습니까?”
[봉사요?]
“네. 내년도 입시 준비를 위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차 선생에게 은솔이의 정보를 들었을 때 조금 놀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은솔이가 단순히 요리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료 급식 봉사를 나가서 요리까지 한다는 점이었다.
-아마 영양사 선생님 만나러 가는 건 레시피 배우러 가는 걸 겁니다.
그는 은솔이가 평소 관심이 있어 하던 분야가 무엇인지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오로지 요리, 요리, 요리.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성적은 4등급 대. 5등급까지 내려가는 경우는 없었다. 시험 기간에만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는 정도이기는 한 것 같았다.
-근데 아마 올해 급식봉사가 마지막일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지나가면서 들은 거기는 한데… 그 무료급식봉사 단체가 자금난 때문에 내년부터는 기부 사업을 접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사장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좋아요. 대신 어떤 봉사활동을 계획 중인지 알려 줄래요?]
“요리나 디저트를 만들어서 수험공부에 지친 학우들에게 나눠 주고, 지역 사회에도 기부하는 봉사동아리를 구상 중에 있습니다.”
꽤 구체적인 설계라고 여겼는지 이사장이 살짝 놀라면서 호호, 웃었다.
[만들어 보세요. 교감 선생님께도 말씀 주시고요.]
나는 감사인사를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제 향해야 하는 곳은 그곳. 연말을 맞이해서 은솔이가 있을 법한 장소였다.
* * *
서울 강남구의 한 동네.
작은 골목길 사이로 드문드문 나무들이 들어서 있었다.
주변으로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아 살얼음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눈을 배경으로 회색빛 지붕을 한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르신들을 위한 급식! 천사급식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런 동네의 한복판, 한 여학생이 트럭 앞에 서서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여학생의 배식을 받은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서도 고맙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 준비한 요리는 시래기된장국과 감자조림. 부족한 예산에서 최대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자 여학생이 업체 대표와 준비한 요리였다.
“다 끝났니?”
기부 단체 대표인 중년의 남성이 여학생에게 물었다. 여학생은 다 끝났다면서 국자를 들고 있던 손을 빙빙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약간 간당간당했지만, 겨우 끝냈어요.”
“하하. 그런 것 같더라. 아무튼 은솔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남성은 여학생을 향해 웃으면서 그간 학생이 해 왔던 봉사활동을 칭찬했다.
“은솔이 없었으면 오늘까지 하지도 못했을 거야. 고맙다.”
“에이, 저 아니어도 다른 분이 하셨겠죠. 그런데 정말 사업 접으세요?”
은솔이 아쉽다는 듯 국통에 든 국자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접어야지. 아무래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네.”
“그래도….”
은솔은 자신이 배식한 무료급식을 먹고 있는 독거노인 어르신들을 바라보았다.
은솔은 천사급식에서 3년 동안 무료 봉사를 해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이런 봉사가 반드시 필요함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그렇기에 지금 이 사업을 접으려는 천사급식의 대표를 최대한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천사급식 대표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부정적인 의견을 비쳤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대표님도 사정이 있으시겠죠. 그래도….”
혹시 밥이 더 있냐면서 다가오는 할머니의 부탁에 은솔과 대표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은솔은 밥솥에 조금 남아 있는 밥을 최대한 긁어서 할머니에게 덜어드렸다.
“고마워요.”
밥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은솔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 아쉽기는 해요.”
은솔이 고개를 숙이면서 빈 반찬통과 국통을 괜히 몇 번이고 더 바라보았다.
“밥 남았으면 나도 먹을 수 있을까?”
그런 은솔의 옆에 정장을 차려 입은 한 남성이 다가왔다. 많아봤자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고, 키도 제법 컸다. 이목구비도 또렷해서 잘생겼다, 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 죄송해요, 여기는 독거노인 어르신분들만 드려서….”
거기까지 말한 은솔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성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친하다기보다는 뉴스에 지나가는 얼굴로 봤던 것처럼.
“왜 그러니?”
남성의 물음에 은솔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의문을 품는 은솔에게 남성은 대답 없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은솔이 방금까지 배식을 했던 공간을 돌아보았다.
“저, 실례지만 누구….”
“혹시 네가 요리도 했니?”
남성은 천사급식 대표의 말을 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은솔은 대답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자 천사급식 대표가 대신 대답했다.
“요리는 저랑 이 여학생이 같이 했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학생 요리실력이 제법 뛰어난 모양입니다.”
남성은 오늘의 식단표를 확인하면서 은솔을 잠시간 관찰했다.
“배은솔.”
“네?”
난데없이 이름이 불린 은솔이 남성을 바라봤다.
“대학교는 어떻게 할 거니?”
남성의 질문에 은솔은 이를 뿌득 갈았다. 지금 은솔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가 대학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은솔은 자신이 강문고에 다니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은솔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식당을 했다. 지금은 은솔만 친척집을 빌려 올라와 이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다소 무리한 준비는 맞았다. 그러나 부모님의 학력 문제는 언제나 걸림돌이 되어 왔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딸에게 대물림해 주고 싶지 않다는 열망도 있었다.
그렇기에 은솔의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강남이나 서초권으로 보내고자 노력했다. 그쪽 동네에서 공부하면 대학을 잘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소지도 옮겼고, 결과적으로 강남서초의 명문이라 불리는 강문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 은솔의 부모님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어서 대학교도 분명 명문대, 적어도 인서울 이름있는 대학교에는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은솔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님이 고생해서 강남서초권 학교로 보내 준 만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식당 일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니면, 부모님 식당이 있는 지역의 전문대에서 조리학과를 전공 후 곧장 일을 도와드릴 생각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일을 부모님과 의논했다가 욕이란 욕은 다 먹고, 크게 싸우기만 했다.
“미리 깔아두는 거기는 한데, 전문대 갈 생각이었으면 일단은 그 계획 접어둬도 된다.”
남성의 말에 은솔은 과거 회상을 중단했다.
“요리를 배우고 싶지?”
“네.”
“학교 공부도 나름 소홀히 했던 편은 아니었고.”
“학교 선생님이십니까?”
성적 이야기가 나오자 천사급식 대표가 남성에게 물었다. 남성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맞다고 말했다.
“아!”
은솔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남성의 말에 그가 누구인지 떠오르려 했다.
“너, 연희대 가자.”
내신 4등급에 모의고사는 다 찍고 자는 강문고의 배은솔. 그녀에게 남성은 인서울 상위권 학교 중 하나인 연희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대학교 선정이, 은솔에게 최근 학교에서 입시로 유명하다고 불리는 한 선생님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강명문 선생님?”
은솔이 머뭇거리며 앞의 남성이 강명문인지를 확인했다. 강명문은 그런 은솔을 향해 누구보다도 믿음직하게 웃으면서 가방에 들어 있던 서류를 한가득 꺼냈다.
“네 입시, 내가 책임진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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