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94화 (94/252)
  • 94화. 26일

    은장과 정석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매점 앞에 앉아 있었다. 매점에서 음료수 봉지를 들고 나오던 동석이 화들짝 놀라 둘에게 달려갔다.

    “얘들아! 정신 차려!”

    “오대천왕이… 두 명….”

    “마왕… 연합회…?”

    강명문과 오석상이 손을 잡고 달려든 <오감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들은 불과 이틀 만에 혼이 쏙 빠져나간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프로젝트 진행 강도로만 따지면 이전의 자기소개서 특강이나 면접 캠프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아니, 오히려 자습만 하면 되어서 편하다면 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관리 감독 교사로 오석상이 있었다.

    “권왕만 아니었어도….”

    강명문은 특강 때 잠깐 쉬는 것 정도는 허용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명문 대신 감독을 봤던 박은환이나 심지석의 경우에는 그랬었다.

    강명문은 여기저기 많이 불려다녔기에 그들을 감독한 시간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의 오석상은 달랐다.

    탕탕탕!

    “졸리면 커피 마셔라.”

    그는 조금이라도 조는 학생이 있으면 엑스칼리버로 책상 위를 두들겼다.

    퍽!

    “으악!”

    “벌써 세 번째 졸고 있다. 뒤에 간이 책상 두었으니 서서 공부하다 오도록.”

    언젠가 배웠다고 하는 택견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기도 했다.

    “이건 압수다.”

    심지어 준 프로급이라는 복싱 기술로 핸드폰을 몰래 훔쳐보는 학생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정말이지 현묘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아주 적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정석은 동석이 사다 준 캔커피를 마신 후 소리를 질렀다.

    “난 논술이니까 수기로 써야 해서 손도 아파!”

    “난 입에 침이 마를 날이 없어….”

    동석은 이미 자신이 합격한 상태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뒤에서 조용히 사이다를 마시고 있는 명천에게 물었다.

    “명천이는 어때?”

    “어떻기는 뭐가.”

    “이번 특강, 들을 만하냐고.”

    잠깐 입술을 굳게 다문 명천은 남은 사이다를 털어 마셨다.

    “비슷해. 할 만한 건지 익숙해진 건지.”

    “명천이는 대단하네….”

    정석은 고개를 흔들면서 두 뺨을 살짝 꼬집은 뒤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생각할 때, 이건 저주야.”

    “무슨 저주?”

    “뭐긴 뭐야, 오대천왕 저주지.”

    잠깐 주위를 둘러본 정석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튀자.”

    “뭐?”

    “야 안 돼, 땡땡이는….”

    “어디로 갈 건데?”

    “영화관이든 놀이공원이든 쇼핑이든 가야지!”

    “오 뭐야, 작당 모의야?”

    점심 시간에 맞춰서 쉬러 나온 태성과 정아도 정석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들 역시 수능이 끝나고 제대로 쉬지 못하는 현실에 개탄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언제 갈래?”

    “지금 바로 갈까?”

    “이거 신청 안 한 애들은 벌써 갔잖아.”

    “그럼 지금 강남역 고?”

    “고고고.”

    벌써 정석과 태성은 행선지를 정했고, 정아도 거기에 동참했다. 은장 역시 이들을 말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너무 달려만 오지 않았나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은장이도 가자.”

    “나는….”

    잠깐 고민한 은장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안 갈래. 너희끼리 가.”

    딱 1주일만 더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은장은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이정석. 너 내일 논술 시험인 거 알지?”

    하나하나 일정을 챙기는 은장의 모습에 정석이 뜨끔했다.

    “어, 어. 두세 시간만 놀고 바로 올 거야!”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은 정석은 황급히 대화 타겟을 돌렸다.

    “명천이는?”

    명천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정석과 태성을 바라봤다.

    “영화관보다는 놀이공원이 더 좋을 거 같은데, 어때?”

    대답은 명천의 입에서 나오지 않고 정석의 뒤에서 들려왔다. 정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 수험표 들고 가면 50%인가 할인 받잖아? 그걸로….”

    “아니, 놀이공원은 여기에 있지.”

    그 말에 정석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으허허허허헉!”

    정석의 머리가 좌우로 십여 번을 왔다갔다 돌아갔다.

    “으아아어헉 살려주, 푸허!”

    “아주 잘들 하는 짓이다. 이틀밖에 안됐는데 벌써부터 땡땡이를 계획해?”

    어지러워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정석의 머리를 팽개친 강명문이 말했다.

    “내가 이러니까 <오감 프로젝트>를 추진한 거야. 안 했으면 아주 입시 준비고 나발이고 진척이 하나도 없었겠다 그치?”

    강명문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학생들을 바라봤다. 땡땡이 주최자인 정석과 태성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강명문의 말을 기다렸다.

    “너희는 정신과 시간의 방으로 간다.”

    그 말에 정석과 태성이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쌤!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거기만은!”

    “안 돼. 어디 담임한테 말도 없이 땡땡이를 쳐? 차라리 하루 정도 쉬고 오면 안 되냐고 허락이라도 받던가.”

    그러자 태성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그럼 쌤, 저희 하루만 쉬고 와도….”

    그런 태성의 입으로 돌돌 말린 종이몽둥이가 날아 들어왔다.

    펑!

    “웁!”

    “이미 늦었다 인마. 정신들 똑바로 차려. 태성이 너는 논술도 방심하면 안 된다고 했지? 정석이 너는 내일 논술시험인 주제에 땡땡이를 계획해?”

    “하지만 쌤 이제는 손이 너무 아파서….”

    핑계를 대는 정석의 손목으로 종이몽둥이가 달려들었다.

    펑! 펑!

    한 명은 이마, 한 명은 손목을 부여잡고서는 고개를 푹 숙이며 괴로워했다. 강명문은 둘의 고통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손이 아프면 뭘 해라?”

    “책을 읽어라….”

    “책 보다 졸리면 뭘 해라?”

    “일기를 써라….”

    강명문은 맥 빠진 소리로 답하는 둘을 보면서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땡땡이 계획한 만큼 정신과 혼 쏙 빼놓을 줄 알아. 따라와!”

    “쌤 제발 정신과 시간의 방만은….”

    “으어어 쌤 살려주세요!”

    두 사람은 한쪽 귀를 강명문에게 붙잡힌 채 교실로 끌려갔다. 은장, 동석, 명천, 정아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후다닥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석은 끌려가는 둘을 보면서 한 번 더 생각했다.

    ‘미리 합격하길 정말 다행이다.’

    * * *

    나는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책을 읽었다. 오래간만에 신작 소설이 나와서 학교 근처 서점에서 구한 책이었다.

    “재밌네 이거.”

    수업 시간 일부를 활용해 완독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강 선생님, 강 선생님.”

    옆에 앉아서 영어 문제지를 검토하던 박 선생이 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쟤들 이대로 두기만 하면 돼요?”

    “네, 이대로 두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까요.”

    박 선생이 말한 쟤들은 구석 책상에 박혀서 논술 공부를 하고 있는 정석이와 태성이였다.

    땡땡이를 치려다 걸려서 특별 공부방으로 데리고 왔다.

    이름하여 ‘정신과 시간의 방’.

    교실 한 구석에 책상을 나란히 두고서 공부를 하는, 어떻게 보면 더 편할 수도 있는 그런 자리였다.

    그러나 그 방에는 나와 박 선생, 지석 선배, 류 선생, 윤 선생, 거기에 오 선생까지. 총 여섯 명의 교사가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과 시간의 방 두 번째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하러 온 다섯 교사들은 두 학생을 향해 연민과 한심함을 담은 시선을 동시에 보냈다.

    “근성부족이지. 강 선생이 참 이런 아이디어가 뛰어나구만.”

    어쩐지 비슷한 마왕들끼리 모여서 저러고 있다며 지석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런 공간도 필요했다.

    수능이 막 끝난 학생들의 마인드 컨트롤은 쉽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석이의 논술 시험일은 21일. 그런데도 토요일인 오늘 땡땡이를 치려고 했다 생각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오냐오냐 봐줬더니 이딴 식으로 할 거야?”

    “죄송합니다….”

    “내일 논술 시험 제대로 못 보고 오기만 해봐. 당장 이 기출문제부터 풀어!”

    나는 미리 준비해둔 성실성대 논술 기출문제 용지를 정석이에게 건넸다.

    “담임은 지금 네 시험 때문에 날밤 새 가면서 이거 만들고 있는데 말이야 엉?”

    “제대로 하겠습니다, 쌤….”

    몇 번이고 나는 잔소리를 했고, 몇 번이고 정석이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다 싶어서 이번에는 태성이에게 다가갔다. 태성이를 향해서도 삼십여 분간 잔소리를 퍼붓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1시간 지났다.”

    “…2시간 아니에요?”

    태성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1시간.”

    “하… 6시까지 언제 기다리냐.”

    “여기가 왜 정신과 시간의 방인지 알고 있냐?”

    이미 어제 저녁 시간에 이번 프로젝트를 신청한 학생들 중 한 명이 이 방을 왔다 갔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정신과 시간의 방 이용 후기를 친구들에게 소문을 냈다.

    -그 방만큼은… 가면 안 돼….

    후기 내용이 떠올랐는지 태성이가 두려운 눈빛으로 용서를 구했다.

    “쌤 제발….”

    “이정석, 안태성. 빨리 종이 펴. 해 줘도 불만이지? 입시가 어디 땅만 쳐다보면 합격하는 줄 알아? 입시 준비하다 실패한 녀석들은 마지막에 방심하는 녀석들이야. 미란이랑 국내 대학교 가고 싶다면서? 너도 대학생 되면 미팅, 소개팅 많이 하고 싶다 하고서는 전제조건인 대입을 소홀히 해? 그런 남자는 어떤 여자한테도 인기 없는 걸 알기나 하냐? 알아? 그걸 알면서 그렇게 한 거면 지금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부족하다. 아무리 지금까지 힘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앞으로 꼴랑 하루, 일주일 정도만 더 참으면 되는 걸 못 참고 그따위 짓거리를 하려고 해? 쉬는 시간이 밥 시간 1시간은 좀 길었다 그치? 어디 군대식으로 30초 만에 밥 다 처먹으라고 삼각김밥만 옆에다 수북이 쌓아놓고서 공부해 볼래? 내가 대치동 재종반에서 배웠던 스파르타식 훈련 제대로 알려 주면 지금 여기 앉아 있기도 힘들어 알아? 요 며칠은 시사상식 공부한 내용 보여주지도 않더라? 제대로 시사 상식용 기사는 보고 있냐? 안 보고 있어? 입시 준비 태도는 어디 밥말아 먹었냐? 매일 아침마다 나한테 어떤 이슈가 인상 깊었는지 하루에 하나씩 보내. 시험 끝나도 보내. 이건 괘씸죄야. 일어나기 힘들다는 핑계 대면 집 앞까지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녀줄까?”

    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잔소리를 해댔다. 그런 잔소리를 녀석들은 남은 4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들었다.

    1시간 잔소리 하고 10초 쉬고. 다시 1시간 잔소리 하고 10초 쉬고.

    이걸 네 번 반복하는 동안 적절히 육두문자도 섞어가며 잔소리를 했다.

    “네놈들이 그딴 마인드를 갖고 있으니까 #[email protected]%&^%*$%$^.”

    꾸준히 이어지는 잔소리에 두 녀석은 귀에 피가 나올 것 같다면서 괴로워했다.

    그 사이에 고1, 고2 후배들이 지나가면서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그럴 때마다 둘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갔다.

    정신과 시간의 방은 오후 6시가 조금 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친구들한테 후기 알려.”

    정석이와 태성이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네! 라며 힘차게 답하고는 도망치듯 교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이었지만 나는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오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후 4시쯤 되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쌤! 저 끝났어요!]

    “오 어땠냐.”

    정석이의 전화였다. 녀석은 어쩐지 흥분한 듯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어제 쌤이 주신 기출문제들로! 논술 만점 예상입니다!]

    절대 들키지 않는 방식으로 미리 성실성대 논술 예상 질문을 싹 다 준비시켰으니까.

    나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서 복도로 나갔다.

    “다 썼어 그래서?”

    [네, 제가 봤을 때 이건 진짜 완벽한….]

    “호들갑 떨지 말고. 글씨체도 괜찮았지?”

    [네 물론입니다!]

    정석이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이 들려왔다.

    “잘했어.”

    [쌤 그럼 내일 뵙겠습니….]

    “얼른 학교로 와.”

    핸드폰 너머의 정석이로부터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왜…요?]

    “동석이 하는 거 못 봤어? 이제 너도 다 끝났으니까 친구들 도와줘야 할 거 아냐.”

    동석이는 친구들이 피곤해하지 않도록 간식을 사 오기도 하고-이사장의 카드로- 교실 청소를 하기도 하면서 친구들을 돕고 있었다.

    나는 정석이에게도 그런 역할과 함께 면접 준비를 해야 하는 친구들의 면접 연습을 도와주라고 말했다.

    [쌤 그럼 그거 언제까지 해야 해요?]

    앞으로 남은 1주일. 그 1주일 동안 명천이의 면접, 태성과 정아 논술, 은장이의 면접이 몰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 마지막 일정인 은장이의 면접 전날을 이야기했다.

    “일단은 26일까지.”

    핸드폰 너머로 정석이의 절망 섞인 비명이 들려왔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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