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79화 (79/252)

79화. 자기주도판단

며칠 전, 명천은 여전히 은장에게 맞춤법 멘토링을 받았다. 이제는 얼추 맞춤법을 알아갔기에 자기소개서 문장들도 서서히 바꿔나갔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명천의 어머니, 학부모회장이 명천을 불렀다.

“이거 류지훈 선생님이 주라고 하시더라.”

학부모회장이 건넨 종이는 <수리논술모의대회 기출문제> 라고 적혀 있었다.

“… 됐어.”

“안 봐?”

“안 볼래.”

그런 명천의 모습에 학부모회장은 의외라며 놀랐다.

그녀의 아들은 지금까지 각종 기출문제라고 하면 항상 받아왔었고, 그에 맞춰 공부해서 점수도 적당히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출문제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 공식 대회는 아니지만, 어쨌든 대회의 일종이고 실력에 따라 상품도 준다고 했다.

그래서 학부모회장은 아들이 이번 대회에도 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 요즘 대회에 안 좋은 일들이 많아서 그러니?”

“그런 거 아니야!”

학부모회장의 말에 명천이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높은 소리에 학부모회장이 명천을 나무랐다.

“아니면 아닌 거지 성질은. 그럼 필요 없는 거야?”

학부모회장도 한참 입시 때문에 예민한 아들의 성질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정도까지만 하고 더 권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응. 내가 할래.”

“직접?”

“…응.”

명천은 자기들 스스로 일어난 동석, 은장, 정석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강명문의 상담과 지도로 변화한 녀석들이었다.

최근 자기소개서 특강 때 밥을 같이 먹으면서 명천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은장과 정석이 보여 주는 친근함, 동석이 보여 주는 배려. 자신처럼 이를 갈며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하고자 하는 일이 명확하고, 그걸 위한 진학 전략까지 잡혀 있는 친구들.

‘대체 뭐가 달랐지.’

몇 번의 대회와 수행평가 발표들을 거치면서 명천은 항상 고민했다.

앞선 셋과 자신이 무엇이 달랐을까.

공부 역량이라면 자신이 더 높았고, 부모님의 뒷 배경도 남들에 뒤지지 않는다 자신했다.

그래서 항상 무시하고,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녀석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역전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할 수 있어. 아니, 내가 할 거야.”

그들로부터 패배감을 느꼈고, 더는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명천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고, 키우고자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더 이상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의수리논술 대회를 위해 미친 듯이 공부했다.

평소에 이렇게 공부를 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주어진 문제는 수십 번을 반복해서 풀어 보았고, 기출문제를 기반으로 문제를 직접 만들어보며 공부했다.

작성한 풀이법을 모범답안과 비교해보면서 부족한 지점은 별도로 체크를 해두면서 수리논술 오답노트를 만들었다.

거기에 정해진 공식 이외에 또 다른 방식의 풀이법은 없는지 연구해 보기도 했다.

그 노력이 나름대로 결실을 보이고자 했는지, 모의수리논술대회 때 답안이 술술 풀려 갔다.

물론, 의대 논술을 준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명천은 처음으로 공부한 성과를 얻는 데 있어 점수나 등수, 등급이 아닌 순수한 성취감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경쟁이 아닌 공부, 공부가 아닌 풀이 과정에서 나오는 즐거움.

그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 명천은 강명문이 왜 자신을 자기소개서 특강에 불렀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와 명천이 너 대단한데?”

명천은 친구들에게 모의수리논술대회 2등 수상 사실을 알렸다.

채점을 끝내고 올라온 류지훈의 표정이 똥씹은 표정이기는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명천에게 지금 중요한 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궈낸 성취였다.

“나도 이 정도는 해.”

“이야, 진짜 의대 가는 거 아냐?”

정석의 말에 명천은 잠시 얼굴을 구겼다.

“… 논술로는 힘들기는 할 거야.”

“왜? 이거 잘한 거 아냐?”

명천에게 의아하다며 묻는 은장에게 동석이 대신 설명했다.

“아마 의대논술 정도로 준비하려면 진짜 논술에 올인해야 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동석의 설명에 명천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네가 말하지 마.”

“아… 응 미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동석을 보며 명천이 표정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동석의 말이 맞았다. 희대의 천재라고 각광받는 동석이 봤을 때 명천의 논술 답안은 베스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는 논리도 한두 개 섞여 있었다.

만약 의대논술을 준비한다면 그러한 논리적 오류도 잡아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런 현실을 명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석에게 반대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래도 실력은 있다는 거 아냐? 의대는 힘들어도 스카이 공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정석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스카이 공대는 최초합은 아니어도 추가합격은 노려볼 정도는 되었다.

물론 그렇게 자세한 분석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강문고 모의수리논술대회 2등이면 분명 좋은 실력은 맞았다.

“… 공대 안 갈 거야.”

“곧 죽어도 의대야? 재수해서라도?”

“맞아.”

“근데 명천아, 의사는 왜 하려고?”

갑작스런 동석의 질문에 명천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왜 의사를 하려고 했더라?

명천의 머릿속에서 그런 의문이 떠다녔다.

그런 의문을 한순간에 씻겨낸 건 다름 아닌 은장의 한 마디였다.

“야 너 여기 맞춤법 틀렸어.”

명천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은장에게 항의하듯 따졌다. 그러자 은장은 명천의 답지에 적혀 있는 문장 하나를 가리켰다.

“‘역활’ 아니고 ‘역할’이야.”

그러자 다른 친구들이 모두 피식 웃었다. 그 반응에 명천은 이제 귀까지 빨갛게 변했다.

“그…멘토링 시간 늘릴까?”

지나치게 배려심을 담은 은장의 말에 명천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리고 답지를 확 잡아채고는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교실 문 앞으로 달려가듯 걸어갔다.

“야, 야! 어디 가!”

“놔!”

명천은 정석의 만류를 뿌리치고 문을 쾅 열고 쾅 닫았다.

“어휴 김은장 눈치 없기는.”

태성이 혀를 차며 놀리자 은장은 내가 뭐, 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 * *

류지훈은 눈을 꿈뻑거리며 수리논술 특강 수강생들의 모의논술 답지를 응시했다.

‘망할, 이게 아닌데.’

그가 생각했던 건 이런 방향이 아니었다.

커뮤니티의 댓글 작성자의 말처럼 명천은 정말 적당한 실력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됐다. 최동석보다는 나은데 그렇다고 논술을 준비해서는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명천은 꽤나 괜찮은 답지를 들고 왔다.

기대 이상의 답지였다.

그것도 자신이 미리 학부모회장에게 전달한 모범답안과는 다른 풀이법이었다.

답안과 풀이법이 다르다는 사실은 한명심과 민지정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내의 다른 수학 교사들을 찾아 명천의 답이 어떤지를 물었고, 명천의 논리도 말이 된다는 의견을 듣게 되었다.

[명천이 의대논술 준비해도 되겠네! 준비하라 그래!]

한명심은 류지훈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러나 류지훈은 웃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명천의 이번 답지는 순전히 운이 좋은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천의 답안들은 지금까지 엉망진창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딱 기본 답만 외워서 풀이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지나치게 잘 풀어 왔다.

그것도 모범답안 풀이법이 아닌, 색다른 방식으로.

이걸 운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최동석은 왜 이래?’

게다가 동석의 논술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모의대회에서 동석이 제출한 답지는 어지간한 상위권 대학교 논술 합격권 정도는 되었다.

그러다 보니 민지정에게 동석의 논술 실력이 엉망이라고 말했던 류지훈은 망신을 당해야 했다.

[네가 그러고도 수학 교사야!!]

민지정의 샤우팅을 한 시간 내내 들은 류지훈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특강 첫날까지만 해도 합격은커녕 예비번호에도 들어오지 못할 수준인 둘이었다.

그리고 둘의 실력을 낮게 평가해서 민지정에게 보고 했던 류지훈은, 그만큼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실적 버리고 싶냐, 감 떨어졌냐, 허위 보고 한 거냐 등 각종 오해를 해댄 민지정은 얼굴에서 김이 나는 듯했다.

그 상황에서 류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ㅅㅂ 망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이번 일들의 요점을 적어서 게시글을 올렸다. 류지훈의 후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저들이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댓글을 남겼다.

-뭐야 통수친겨?

-애새X들이 벌써부터 밑장빼기냐.

-컨닝한거 아님?

댓글에는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어느 쪽이든 지금 류지훈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었다.

그렇기에 류지훈은 자신에게 아이디어를 내주었던 댓글러를 기다렸다.

-걔네 실적 제일 신경쓰는 사람이 누구임?

마침내 류지훈이 기다리던 댓글러가 나타났다. 류지훈은 이번에도 댓글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정도면 님 모르게 다른 과외 선생 구했거나.

-교감이랑 교무부장이란 인간, 그 둘이 님 엿먹이려는 거 아님?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추가 댓글이 달렸다.

-생각해보셈. 님 말대로 애들 실력이 ㅎㅌㅊ인데 갑자기 ㅅㅌㅊ를 친다? 이거는 님 골탕먹이려는 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됨.

그렇게 생각하자 그럴 수도 있겠다며 다른 유저들의 댓글이 달렸다.

-근데 고삐리가 겨우 그딴 걸 한다? 양아치들도 아닌 애들이? 이건 뒤에서 누가 조종한거임.

류지훈은 설마 한명심과 민지정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개의 부연 설명 댓글을 달았다. 그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그쪽 라인이어서 오히려 챙김을 받는 쪽이다 등의 글이었다.

그러자 류지훈의 머리통을 세게 때리는 댓글이 올라왔다.

-혹시 이거 전에 걔들한테 찍히거나 그런 적 없음?

댓글러의 댓글에 류지훈은 강명문의 일과 함께 한목대 특강 이후 학부모회장의 반응들을 떠올렸다.

설마 자기 모르게 학부모회장과 한명심, 민지정이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자신을 정당하게 라인에서 떼어내려는 속셈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댓글로 그런 일련의 이야기들을 작성했다.

-ㅅㅂ 맞네 정치싸움.

-윗윗윗댓 누구냐 진짜. 정확하게 짚네 개소름.

심지어 이제 다른 유저들도 이건 정치싸움에서 밀렸다, 팽당한 거다, 식의 댓글이 수십 개 달리기 시작했다.

류지훈은 의자 뒤로 몸을 뉘였다.

이렇게 나를 버린다고?

대체 왜?

어디부터 잘못됐지?

설마 강명문 때문에?

류지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을 댓글에 담아 물었다.

-진짜 그 선생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

그러자 댓글에는 그 반대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그건 부차적인 거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듯.

-그네들이 봤을 때 쓴이 실력이 부족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

-ㅇㅇ나도 윗댓, 윗윗댓 동의.

유저들의 반응을 보면서 류지훈은 복잡한 심정이 생겼다.

-님도 빨리 결단해야함.

그리고 댓글러의 이 댓글 하나가 류지훈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대체 어떤 결단을 하란 말일까.

지금이라도 명천이, 동석이 논술 강의 포기하겠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수리논술 특강 중단하겠다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민지정에게 달려가서 엎드려 싹싹 빌까?

그런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때, 모니터 안에 댓글러의 댓글이 올라왔다.

-솔플러로 학교에 남거나.

류지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추가 댓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수 초 뒤에 올라온 댓글을 보며 류지훈은 입을 벌리고 숨을 쉬지 못했다.

-라인 갈아타거나.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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