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61화 (61/252)
  • 61화. 전적으로 믿으십시오.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은장이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진짜요?”

    “응. 뭐하러 하기 싫은 일을 하려고 해? 안 하면 되지.”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자 은장이는 뭔가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는지 당황해했다.

    그런 은장이의 이마를 들고 있던 서류종이로 툭 건드렸다.

    “진정해. 무슨 일인데 그래?”

    “쌤, 저 진짜 안 해도 돼요?”

    “네가 나중에 그 직업을 하건 안 하건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지.”

    그러자 은장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거 안 하면 저 입시에서….”

    “아아, 그런 의미로?”

    은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전에 상담을 할 때는 은장이에게 명확한 진로가 설정이 되어야 학생부를 준비하기에 좋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때 은장이는 광고와 방송계열 스탭을 준비하기로 했었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 동아리 활동에서도 현직 스탭의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

    ‘아마 현실은 생각 이상으로 녹록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을 테지.’

    동아리에서 현직 종사자 인터뷰를 한 후 혹독한 방송계열 스탭의 현실을 알고 난 이후에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은장이가 원할 만한 답을 들려주었다.

    “컨셉 잡아서 일단 대학 입학부터 해. 스탭 하기 싫으면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고민하면 된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스탭을 꿈꾸는 것처럼 꾸며야지. 그리고 어차피 넌 융합 전공이니까 스탭만 하겠다, 는 것만으로는 안 돼.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도 보여 줘야지.”

    항상 상담 때 강조해 왔던 코스프레와 전략. 이 두 가지를 준비하지 않으면 입학사정관제에서의 합격은 보장할 수 없었다.

    특히 지금 3학년 1학기가 지나간 학생들에게는 더더욱 전략적 접근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별로 신경쓰지 마. 이번 입시까지만 스탭 관련으로 생각해. 몇 달 안 남았다 이제.”

    내가 설명을 해주었지만, 은장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 쌤, 근데요 그게….”

    “또 왜?”

    “그… 어제 부모님이랑 싸웠거든요….”

    은장이가 거기까지 말하자 나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요즘 부모님이랑 친해져서… 학교에서 이런 거 저런 거 하면 대화를 많이 해요. 그래서 어제도 인터뷰 끝나고 그 이야기를 했는데….”

    “광고 현장 스탭을 정말 생각했었냐며 화를 내신 거니?”

    내 말에 은장이는 무겁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종종 이런 일들이 있었다. 입시를 준비하다가 부모님과 문제가 있었지만, 나름 전략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해결한 케이스의 학생들이 이랬다.

    은장이는 부모님에게 광고 쪽이나 영상 쪽으로 해 보고 싶다, 가 아니라 이들을 포함해서 진로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자가 방송 스탭인 것도 이전에 학부모 상담을 통해 언급했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은장이는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 그쪽 일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어 보였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즉, 방송, 광고를 비롯해 여러 진로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던 것이 거짓말임을 스스로 밝혀 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뭐라고 하셨냐?”

    “죽어도 그런 거 못 하게 할 거니까 방송부 활동 이제 다 때려치우라고….”

    “그리고?”

    “입시도 그쪽으로 지원하면 쫓겨날 생각하라고 그러셔요.”

    그나마 이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은장이에게 안심하라며 타일렀다.

    “은장아, 부모님하고 관계가 좋아져도, 지금 이 준비과정이 컨셉이라는 걸 당분간은 들키면 안 돼.”

    지나친 솔직함은 대부분의 입시에서는 좋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부모님의 입맛에 맞춰야 하고, 부모님 역시 학생이 고집을 부리면 맞춰 줘야 하기도 한다.

    은장이의 경우는 전자였다.

    비록 그 과정이 힘들고, 거짓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지금 은장이와 같은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전략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입시 준비는커녕, 나중에 대학교 지원도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만 하게 될 거야.”

    부모님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지원하면 당연하게도 대학 입학 후에 문제가 발생한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학점 관리 문제나 취업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내일도 괜찮으니까 잠깐 상담 오시라고 말씀드려. 난 어차피 학교에 하루종일 있으니까.”

    논술특강 학생들을 봐줘야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장이 어머니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대략 예상이 되기도 했고.

    “아… 네 쌤, 감사합니다.”

    “어깨 펴고, 기운 차리고. 지금 중요한 건 스탭을 하고 말고가 아니야. 어떤 내용으로 학생부를 채워야 입시에서 유리한가에 대한 게 훨씬 중요하지.”

    나는 다시 한번 입시에서의 전략성을 강조했다. 은장이는 그제야 얼굴 표정을 풀었다.

    “네!”

    은장이의 얼굴이 풀리자 나는 즉시 어제 있었던 동아리 인터뷰 시간에 대해 물었다. 은장이는 스탭이 이야기해 준 현실적인 부분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은장이가 하는 말을 간단히 메모해두었다.

    얼추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은장이를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학생부의 특별활동상황 중 동아리 활동에 해당되는 ‘계발활동’ 내용의 샘플을 작성했다.

    * * *

    다음 날, 나는 어김없이 논술 특강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기출문제 풀이 시간을 주었다.

    “자자, 이제 이틀째다!”

    “이제 겨우 이틀이라니….”

    “은정아, 말이 많다!”

    돌돌 만 종이몽둥이로 정아의 책상을 팡팡 두드렸다. 종이와 공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정아가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놀랐잖아요!”

    “나에게는 겨우 이 정도로 힘들다고 하는 너희들의 정신력이 더 놀랍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첨삭 수업도 들어갈 거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글씨도 선생님들이 해석할 수 있게 써와라! 특히 이정석!”

    “네!”

    “넌 각별히 글씨체 유의하고! 알았나?”

    “알겠습니다!”

    이상하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녀석을 보며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없이 계속 쳐다보자 정석이가 쑥스럽게 웃었다.

    “어제 미란이랑 전화하면서 대학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입시 끝날 때까지는 연락 금지라고 했을 텐데?”

    “아….”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는 정석이를 향해 종이몽둥이를 한 번 휘둘렀다. 종이몽둥이는 녀석의 어깨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끄응….”

    나는 교탁으로 돌아와서는 준비해둔 책들을 다시 챙겼다.

    “그럼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쓰도록 한다. 시작!”

    내 신호에 맞춰 학생들이 준비해 준 기출문제를 펼쳤다. 이번 문제 풀이의 감독관은 지석 선배였다. 나는 선배가 감독하는 사이에 빨리 교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올 생각이었다.

    교실을 선배에게 맡겨두고 교무실로 내려갔다.

    자리에 앉아 오 분쯤 기다리자 교무실 입구에서 은장이가 어머니인 최예진과 함께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은장이 어머니는 다소 굳은 표정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은장이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불안해하면서 그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선생님, 은장이 이제 3학년이잖아요?”

    “네 그렇죠.”

    “선생님께서 방송부 같은 건 이제 그만하고 공부 좀 하라고 해 주세요.”

    은장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나는 눈짓으로 가만있으라고 신호를 주고는 은장이의 어머니를 부드럽게 바라봤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분명 방송부 덕을 보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얘가 동아리 활동 한다고 공부를 안 하고 있으니 원….”

    최예진의 말에 은장이를 살짝 째려봤다. 녀석은 비밀이라도 들킨 듯 내 시선을 피하면서 바닥을 내려 봤다.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만, 정말로 방송부 덕을 보고는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은장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샘플로 작성해둔 학생부 내용을 최예진에게 보여주었다.

    [현직 종사자와의 만남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실제 직업의 현실적인 면모를 배우는 시간을 가짐. 막내 스탭이 하는 일이 힘쓰는 일을 비롯해 이론과 체력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는 점을 깨달음. 이에 꾸준히 운동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설정함. 또한, 00방송 스탭의 이야기 중 실제 대본과 촬영장의 분위기가 다를 수 있고, 다양한 영상을 접해야 하기에 여러 분야를 두루 알아두는 것이 중요함을 배워 인문사회계열은 물론이고 방송이나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걸친 상식을 쌓기로 다짐하면서 그 시작으로 여러 뉴스와 다큐영상을 찾아보는 노력을 보여 줌.]

    최예진은 내용을 쭉 읽어 보더니 이 글이 무슨 의미인지를 궁금해했다.

    “입시가 수시와 정시, 두 개 전형이 있습니다.”

    “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 내용이 은장이가 수시 준비할 때 평가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최예진은 인쇄된 학생부 내용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번에 은장이가 방송부에서 현직 종사자 인터뷰를 했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그걸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 아닐까요.”

    최예진은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이었다.

    “집에서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애한테 이상한 꿈만 심어 주는 것 같아서요.”

    “이상한 꿈이요?”

    “네, 방송국에서 일한다거나 광고계에서 일한다거나 그런 거요.”

    그녀는 직업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쪽 업계의 고통스러운 일과들. 끝없는 야근과 아이디어 회의, 방송촬영 때의 무기한 대기 등,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 어려움을 어머님은 극복하셨지 않습니까?”

    “그야 저는 이쪽 일이 재미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애를 여기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네, 보내지 마셔요.”

    내 말에 은장이의 어머니, 최예진이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책꽂이에서 인쇄해둔 대학모집요강들을 몇 개 꺼냈다. 서울한국대를 비롯한 스카이 학교들의 모집요강이었다.

    “어머님, 입시는 단순히 수능만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번 입시에서 은장이가 준비할 사항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입학사정관제와 서울한국대 인문광역계열1학과, 비교과와 교과에 대한 부분까지.

    내 설명을 들은 최예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게 지금의 입시라고요?”

    “네, 맞습니다.”

    내가 보여 준 모집요강들과 서울한국대의 평가요소 인터뷰 등을 보여 주었기에 그녀는 내 말들에 반박할 의지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은장이는 방송부 스탭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광고 및 방송계열 스탭을 하고 싶다고 거짓으로 꾸며야 합니다.”

    “아… 그래서 방송 스탭을 섭외했군요.”

    물론 약간의 거짓말도 섞기는 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종사자 인터뷰를 하면 뭔들 재미없어 보이겠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지요.”

    최예진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은장이가 방송국이나 광고 현장 스탭으로 일하는 걸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저한테 이야기했을 때도 저는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말했었죠.”

    그렇지? 하며 은장이를 보자 은장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다만, 수시에서는 컨셉이 중요합니다. 그 컨셉에서 벗어나면 준비하기가 어렵죠.”

    그리고 은장이와 은장이의 어머니를 번갈아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니 어머님, 저를 전적으로 믿으십시오. 제가 은장이 서울한국대 보내겠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웃자 최예진도 나를 따라 웃었다. 은장이만이 어색한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직업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에 가서 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서울한국대 보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옆에 놓인 서류를 들고 내 앞에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내용들로 대학을 속여야 합니다.”

    나는 그 서류들 안에서 은장이의 학생부를 인쇄한 종이를 꺼내 최예진에게 내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옆에서 부모님께서 많이 응원해 주세요. 이번 은장이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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