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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클래스-53화 (53/252)
  • 53화. 세팅

    강명문과의 전화를 끊은 윤기준은 차 트렁크에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 상자를 통으로 들어 최동석 앞에 내려두었다.

    텅!

    옆에 놓인 상자를 보면서 동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쌤 이게 뭐예요?”

    “여기 안에 있는 것들 두고서 마음껏 갖고 놀아. 너희 담임쌤이 부탁한 물건이다.”

    동석은 담임 선생님인 강명문이 보냈다고 하자 관심을 갖고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평소 동석이 흥미를 가지고 있던 과학키트 중 오토마타 키트와 과학상자가 들어 있었다.

    강명문이 이날을 위해 월급을 아껴서 구매해 둔 제품들이었다.

    “그거 만들고 싶은 거 만들면서 시간 때우래. 어차피 진짜 대회는 내일이기도 하니까, 나도 허락할게.”

    윤기준의 말에 동석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안에 든 과학 상자를 꺼냈다.

    흥미롭게 상자 표면을 둘러보던 동석은 이내 내용물을 꺼내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을까.’

    윤기준이 생각하기에 자신과 동석이 만든 건담인섹터Mk-3는 꽤 훌륭한 작품이었다. 기존에 있던 로봇대회의 디자인을 부수기도 했고, 동작도 간편하지만, 필요한 행동은 취할 수 있도록 설계해 두어서 오차도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윤기준은 대회 현장에서 벌벌 떨고만 있던 동석이 안타까웠다.

    결국 모든 과정들을 보여 주고 설명해야 하는 건 학생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 윤기준은 동석을 살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어떤 발판이 보였다.

    “벌써?”

    과학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동석은 어느새 발판을 만들고 그 위에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동석아 뭐 만드니?”

    “아, 회전그네요.”

    그러면서 동석은 자연스럽게 드라이버로 각종 판들을 돌려 끼워 넣었다. 긴장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동석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윤기준은 동석의 모습을 지켜보며 어쩌면 내일 있을 인터뷰와 발표는 괜찮을지 모른다고 희망적인 관측을 해 보았다.

    * * *

    “준비 다 됐어?”

    “여기는 끝!”

    “나도 다 했어.”

    “쌤은요?”

    은장, 정석, 태성, 정아가 뒤에서 넋이 나가 있는 박은환을 바라봤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강명문과 통화를 하고 지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하루 14시간 특강에 주말은 될지 안 될지도 모를 대회 수발… 어쩌다 이렇게….”

    박은환은 강명문 때문에 논술 캠프에 발목 잡힌 점과 주말 동석의 대회를 도와주는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크큭… 그런 선생은 내가 수정해 주겠어.”

    “…쌤?”

    “헙! 아, 그래 준비 다 했니?”

    어딘가의 애니메이션 대사와 비슷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박은환을 보며 은장이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쌤 이제 출발해도 돼요.”

    “그럼 가자. 끝나고 나면 너희도 담임쌤한테 뭔가 요구해.”

    학생은 총 네 명. 교사 한 명. 총 다섯 명의 인원이 동석과 윤기준이 있는 대회장에 모일 예정이었다.

    그중 학생들은 은장과 정석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태성, 정아는 동석의 국어 수행평가 발표 시간 이후로 동석과 꽤 친해졌었기에 이번 활동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런데 쌤 진짜 이거 못 써요?”

    태성은 꽤나 공들여 만든 응원 플랜카드를 들며 아쉬워했다. 디자인부터 응원글씨 캘리그래피까지 모두 본인이 했기 때문이었다.

    “안돼. 그거 보면 동석이 더 긴장할 거야.”

    “하지만 쌤이 적당히 긴장하는 건 필요하다고 했는데요.”

    “야 안태성. 동석이가 너처럼 철면피인 줄 알아? 걔는 적당히가 아니라 지금 폭발 직전일걸?”

    정아의 예상대로 지금 동석은 대회 참가자들로 가득한 인파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런 현장의 상황을 알지 못해 태성과 정아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박은환이 말했다.

    “얼른 가자. 은장이가 옆에 타. 정아가 맨 뒤, 남자 둘은 중간에 타.”

    “쌤 근데 운전 잘 하세요?”

    “그럼 당연하지! 출퇴근도 자차로 하는데?”

    박은환은 처음 교사에 부임하자마자 경차를 한 대 구입했다. 그래서 출퇴근할 때 자주 타고 다녔다.

    뒤에 의자를 싣던 정석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은 거 맞죠?”

    “그럼! 운전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기대해!”

    박은환의 말에 학생들은 준법정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안전벨트를 꽉 붙들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녀는 핸들을 잡고 시동을 걸었다. 파킹과 사이드브레이크를 모두 풀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발이 마침내 엑셀을 밟았다.

    * * *

    한 시간 삼십분 쯤 지난 시간. 경기도 일산의 한 행사장에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토요일이라 차가 막히기는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박은환의 운전실력 덕분도 있었다.

    학생들은 그 운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우웩….”

    문을 열고 나온 정석이 화단에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케헥 콜록콜록….”

    “사람 살려….”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차에서 내려 신음을 토해 냈다.

    “후아! 이제야 스트레스가 좀 풀리네. 어쨌든 늦지 않게 잘 도착했다 그치?”

    그에 비해 박은환은 정말 상쾌하다는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평소 운전 습관이 어떨는지.’

    ‘경차라고 막 끌고 다니는 거 아냐?’

    ‘핸들 고장난 거 아니었어!?’

    조금씩 정신을 차린 학생들이 소곤대는 소리를 듣지는 못한 박은환은 차에서 짐을 하나씩 내렸다.

    “자 들고 들어가자!”

    그녀의 지시에 맞춰 학생들이 짐을 챙겨 이동했다.

    “여기 어디쯤일 텐데.”

    박은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윤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행사장의 한편에서 윤기준이 손을 흔들었다.

    “쌤!”

    은장은 윤기준을 발견하고 친구들과 함께 움직였다. 박은환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다가 정석에게 말했다.

    “정석아, 태성아. 먼저 가서 동석이 도와줘.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갈게.”

    박은환은 무거운 짐을 옮기는 두 학생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행사장 밖으로 나갔다. 한여름의 햇볕이 뜨겁게 느껴지는 날씨에 박은환은 핸드폰으로 강명문을 검색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착했어요.”

    수신대기음이 사라지고 강명문이 전화를 받자마자 박은환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강명문에게 설명을 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들 기억하시죠?]

    “기억은 하지만… 이거로 되겠어요?”

    [박 선생님만 믿습니다. 저는 또 들어가 봐야 해서….]

    강명문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박은환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윤기준과 학생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명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는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대회 스텝에게는 강문고 3학년 3반 최동석의 로봇동아리 담당교사라 밝히고 현장에 입장했다.

    “동석아.”

    박은환은 그렇게 동석을 부르며 다가갔다.

    동석의 자리 뒤에는 어제 만든 것들인지 과학상자로 만든 회전그네와 오토마타 키트로 만든 백조, 자동차 등이 쌓여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제작 당사자는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동석의 옆에는 현장 촬영을 맡은 스텝이 참가자들을 하나하나 돌며 인터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로봇인지 설명 좀 해 주세요!”

    “몇 등 정도 할 거라 예상하나요?”

    “혼자 참가했어요?”

    녹음기를 들고 앞에 나온 인터뷰어는 동석에게 빨리 대답 좀 하라며 부추겼다.

    “아, 저, 그… 아뇨, 저기….”

    당연하게도 동석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예상대로네.”

    박은환은 출발 전에 강명문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정석과 태성을 불러 말했다.

    “세팅해. 정석이는 의자, 태성이는 책상.”

    정석과 태성이 차에서 들고 온 의자와 책상을 가지고 와서 동석의 앞에 놓았다.

    그 책걸상에는 동석도 잘 알고 있는 낙서가 적혀 있었다.

    “어?”

    인터뷰어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했다.

    “은장이랑 정아는 전시품 설치.”

    “옙!”

    박은환의 지시를 받은 은장과 정아는 동석의 뒤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과학상자 회전그네와 각종 오토마타들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동석의 ‘건담인섹터Mk-3’가 전시되어 있는 트랙 주변에 하나둘 세워두었다.

    “동석아.”

    “어, 그, 네? 네 쌤! 언제 오셨어요?”

    동석은 그때까지도 박은환이 온 줄은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이 찾아와 줘서 반갑기는 했지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들에 난감해하던 참이었다.

    그때 자신의 앞에 놓인 건 학교에서 사용하는 동석의 책걸상이었다. 세팅을 마친 정석이 책을 하나 건넸다.

    언젠가 강명문에게 보여 주면서 읽고 싶다고 했던 책이었다.

    <소리 인식과 센서 기반의 로봇 연구>

    정확히는 책이 아니라 논문을 인쇄해서 제본한 자료였다.

    정석은 그 책과 함께 동석의 가방에 있던 <로봇도감>을 꺼냈다.

    “잠깐 빌릴게.”

    그리고는 정석과 태성은 책상 가장자리에 두 책을 놓았다.

    “어? 학생들, 이건 어떤 책인가요?”

    “아 이 친구가 자주 읽는 책이에요. 심심해할 거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

    정석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로봇도감>이야 동석이 자주 읽었지만, <소리 인식과 센서 기반의 로봇 연구>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친구들의 모습에 동석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미 동석의 주변으로는 어제 만들었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앙으로는 건담인섹터Mk-3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은 학교 의자에 앉게 되었다.

    “좋아 세팅 끝. 해산!”

    이어진 박은환의 지시에 동석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밖으로 퍼졌다. 끝나고 보자, 힘내, 등의 응원도 남기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라진 친구들을 향해 인터뷰어가 멍하니 있다가 다시 동석에게 향했다.

    “방금 그 친구들은 학교 친구들인가요?”

    “네네, 맞아요. 잠깐만요.”

    그런 인터뷰어를 제지한 박은환은 윤기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윤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짝 뒤로 물러났다.

    “동석아, 이번에 만든 건 뭐야?”

    “네?”

    얼떨떨해 있는 동석에게 박은환은 손가락으로 건담인섹터Mk-3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재차 동석을 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윤기준 선생님하고 작업한다고 쌤한테 네가 만든 로봇 보여 줄 시간이 없었잖아. 오늘 그거 궁금해서 온 거야.”

    “대회 결과가 궁금해서가 아니고요?”

    “대회도 대회인데 네가 만든 로봇이 궁금해서 말이야.”

    그러더니 박은환은 자세를 고치더니 핸드폰에서 사진 하나를 열었다.

    사진 안에는 그녀가 알고 있는 건담 중 동석이 만든 건담인섹터Mk-3와 비슷하게 생긴 데빌건담이 있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던 그 건담을 오마쥬한다는데, 우리 동아리 부원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겠어?”

    박은환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동석에게 빨리 설명해달라며 재촉했다.

    “아, 맞다. 쌤 건덕이셨죠.”

    “에이, 건덕까지는 아니야.”

    “정말요? 건덕 맞는 것 같은데요.”

    슬슬 장난을 치는 동석을 보며 박은환은 빙긋 웃었다.

    “저도 찾아봤거든요, 데빌즈 건담.”

    “오 진짜? 어땠어?”

    “디자인 보시면 얼추 보이시죠? 참고 많이 했어요.”

    동석은 그리고는 로봇의 컨셉과 특징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박은환은 동석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생각했다.

    ‘진짜 먹히네.’

    그녀는 출발 직전에 강명문과 통화하며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별거 없습니다. 박 선생님은 건담 이야기나 많이 해 주세요.

    강명문은 별다른 내용 없이 이렇게만 말했었다. 그걸로 되겠냐는 그녀의 질문에 강명문은 당연히 된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동석이가 선생님 개인에게만 설명해 주는 것처럼 자리 잡아 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돼요.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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