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51화 (51/252)

51화. 신청해!

“이정석, 안태성, 은정아 너희는 필수로 신청해.”

“아니 쌤 이거 14시간….”

“응 하루 14시간이야. 왜?”

나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이거,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대치동 재종반(재수종합반) 다 이렇게 하잖아. 너희라고 못할 거 있어?”

이런 걸 묻는 이 녀석들이 다소 한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준비해야만 그나마 합격 문턱이라도 밟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논술 준비할 사람들은 반드시 신청해. 4박5일 캠프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야. 그리고 중간에 하루씩, 주말에도 쉬잖아? 이 정도면 널럴하다 널럴해!”

들고 있는 포스터를 팡팡 치면서 녀석들에게 소리를 쳤다. 몇몇이 귀를 막았고, 몇몇은 얼굴을 찡그리며 인상을 썼다.

“논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미 집 근처 학원은 인원이 다 차서 못 듣게 된 녀석들도 신청해라. 인원 제한은 없다. 문의 폭주하면 반을 늘리거나 일정을 추가하거나 할 거니까 혹~시나 자기 때문에 쌤 힘들어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싱긋 웃으면서 녀석들에게 이야기를 하자 정석이가 질렸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지은이와 정아도 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쌤 이거 5일 다 들어야 해요?”

“당연하지. 그래야 캠프 아니겠어?”

당당하게 허리를 팍 세우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나름 대치동에서 잘 날리던 논술 강사였다. 그러니까 믿고 따라와. 합격 보장한다.”

내 말에 그걸 어떻게 믿냐면서 학생들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봤다.

“이것들이 안 믿는 눈치네?”

“에이, 쌤이 무슨 강사를 해요.”

회귀하기 전에는 논술 특강도 했었지만, 일단 그런 건 말할 수 없으니 숨겨두고.

“진짜야. 임용되기 전에는 대치 이윤논술에도 있었어.”

그래서 실제 새끼강사로 있었던 논술학원 이름을 댔다. 그러자 학생들의 눈이 바뀌었다.

“이윤논술이요?”

“헐, 저 거기 인원 마감되었다고 방학 특강 신청 못 했는데.”

여기저기서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로부터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서 오래 일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에이스 강사로 소문나기 직전이었다. 임용 포기하고 나한테 남아달라고 원장님이 그랬을 정도니까.”

약간의 과장을 보탠 거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윤논술학원장은 나에게 좀 더 있어 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기는 했었다.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임용되기 직전까지도 와서 특강 좀 맡아주면 안 되겠냐고 요청할 정도였으니까.

“이제 이 특강 들을 생각들이 좀 드냐?”

이제 녀석들이 내 말에 집중했다.

“내가 제대로 된 족집게를 보여 주마.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제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합격 보장한다!”

거짓말은 아니다. 기출문제와 관련된 지문들만 주구장창 보여 주면서 하루 14시간씩 굴릴 거라 열심히만 하면 확연히 달라질 것이었다.

‘제대로 따라올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학생들이 너도나도 신청지를 달라고 내밀었다.

“쌤, 저도요!”

“저 이거 하면 선하대 갈 수 있어요?”

“연천대 논술이랑 고구려대 논술도 해요?”

여기저기서 수강문의가 쏟아지자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자, 자 여기서 복잡하게 이러지 말고, 은장이한테 신청서 줄 테니까 쉬는 시간에 작성해라. 은장이는 이거 내일 시험 끝나면 걷어서 나한테 주고.”

“네!”

은장이의 시원시원한 대답을 끝으로 출석부와 교과서를 손에 들었다.

“오늘 조회는 여기서 끝! 내일 학평부터 잘들 준비해라! 최저는 맞춰야지?”

논술도 논술이지만 수능 최저를 못 맞추면 말짱도루묵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수능 최저에 대한 긴장감도 늦춰서는 안 되었다.

물론, 내 말에 녀석들이 한 번 더 축 늘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도 열심히 해보자. 파이팅!”

““화이팅….””

맥빠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서둘러 교무실로 향했다.

“오셨어요?”

교무실에는 박 선생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조회 일찍 끝나셨네요?”

“워낙 강 선생님이 바쁘시니까 제가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박 선생이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다. 나는 빈 의자에 앉으면서 박 선생에게 말했다.

“동석이 말인데요.”

나는 동석이 대회 건 때문에 박 선생에게 별도로 부탁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학평 보기 전에 여유가 있을 것 같아 오늘 보기로 했었다.

그런데 중간에 한 교감이 내 스케줄을 일부 변동시켰다.

이유인즉슨, 다가올 입시 시즌에 학교에서 어떤 걸 하면 좋을지에 대해 지속적인 회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회의에 내가 왜 들어가야 하냐고.’

이런 회의는 초임교사가 들어갈 영역은 아니었다. 실제로 강문고에서는 경력이 많은 교사들이 회의에 들어갔었으니까.

투덜거리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한 교감은 현재 강문고의 최고 실세였다. 한 교감의 눈에 들어온 지금은 최대한 이 관계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회의 자리를 만들다 보니 방과 후에도 일정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오늘 아침 일찍이라도 박 선생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박 선생이 부탁한 학생도 있었고.

“당일에 제가 할 게 있나요?”

“네, 그래도 동아리 선생님이시니까요.”

내 말에 박 선생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래봤자 저는 프라모델 동아리처럼 운영했어서 딱히….”

“그거면 됩니다. 동석이 대회날 다른 친구들도 가기는 갈 거예요. 근데 걔네는 조금 떨어져 있을 겁니다.”

“저는요?”

박 선생이 묻자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답했다.

“선생님은 동석이 옆으로 가 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박 선생이 더욱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그거면 되나요?”

“네, 그렇게만 해 주시면 돼요. 자세한 건 그날 도착하시고 전화 한번 주시고요. 그리고 준기는 어떻게 된 거죠?”

내 질문에 박 선생이 맞다며 손뼉을 쳤다.

“준기가 지금 보면….”

“작가 하고 싶어 하죠?”

“네? 네 맞아요. 이전에 상담해 보셨어요?”

3학년 1반 조준기. 수업 시간이면 항상 고개를 파묻고 손으로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동석이가 로봇도감을 미친 듯이 읽었던 것처럼, 준기도 그렇게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석이와 준기가 다른 점이 있었다.

동석이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있다.

그에 반해 준기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 점이 향후 박 선생의 발목을 잡는 사건으로도 자리 잡게 되었고 말이다.

“선배나 윤 선생한테도 좀 들은 게 있기도 하고, 대충 수업 때 보니까 글 쓰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입시코디를 하던 시절, 학생과 학부모의 희망 진로가 맞지 않는 경우는 허다했다.

그런 경우에도 최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맞춰나가는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계열만큼은 비슷했다. 예를 들면 경영학과를 희망하는 학부모와 광고홍보학과를 희망하는 학생이 대립하는 식이었다.

둘 모두 마케터라는 진로에는 동의하지만, 지원하는 학과가 상이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둘 다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준비가 중요하다는 정보를 알 리가 없는 지금의 강문고 학생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준기는 이보다 더 어려운 케이스였다.

“그런데 부모님은 다른 쪽으로 생각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역시 강 선생님. 대충 보면 각이 딱 서나 보네요.”

박 선생은 기분이 좋다면서 준기의 자료를 인쇄했다. 준기의 학생부를 살펴본 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학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학생 같은데요?”

그도 그럴 게, 내신 점수는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다양했고, 활동도 특이할 만한 점이 없었다. 대회 수상내역도 보면 글짓기상에서는 우수상, 최우수상을 받은 정도였다.

“맞아요. 그런데 이거 보세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인쇄된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그 종이에는 준기의 6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찍혀 있었다.

“탐구 빼고 올 1등급?”

준기의 모의고사 성적은 내신성적 대비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국어는 백분위 99를 찍었고, 수학과 영어도 백분위99는 아니지만 1등급이었다. 그런데 황당한 건, 수학과 영어의 내신 성적은 각각 4등급, 3등급이라는 점이었다.

“참나, 탐구도 모의고사는 2등급씩 찍는 애가 내신은 5등급이니 원.”

모의고사 점수가 워낙 좋은데 내신은 좋지 않다.

이런 경우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그중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준기가 좋아하는 공부만 하나 보군요?”

“자료만 봐도 보이세요?”

“대충은요.”

박 선생은 신기하다면서 준기의 성적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팔짱을 꼈다.

“왜요?”

“아니 신기해서요. 진짜 귀신이라도 들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무튼, 준기 부모님은 만나보셨어요?”

내 질문에 박 선생이 한글 파일을 하나 띄웠다.

“상담이야 당연히 했죠. 이거 보세요.”

그 내용들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어이가 없다며 짧게 웃었다.

상담을 꽤 길게 했는지 한글 파일로 세 페이지 정도 되는 상담내역이 적혀 있었다.

긴 내용들에서 핵심을 말하자면

<공부를 잘 하는데 애가 학교 시험을 안 보려고 한다.>

<그래도 모의고사가 잘 나오니까 수능으로 스카이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스카이 인문계열을 가기는 위험해 보이니 이공대로 교차지원을 하겠다.>

<애 아빠랑 나는 토목공학과도 괜찮으니 애를 스카이로 보내고 싶다.>

이렇게였다.

“힘드셨겠네요.”

입시코디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유형이 바로 이 케이스였다.

학생, 학부모가 희망하는 전공이 같은 계열 안에서 다른 거라면 괜찮았다.

문제는 계열이 다를 경우였다.

지금 준기의 경우가 그랬다. 학생은 인문계열을 희망하지만, 학부모는 공학계열을 희망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학생은 학과 위주로 지원하고 싶은 것이었고, 학부모는 학교 위주로 합격시키고 싶은 것이었다.

“젠장, 그놈의 학벌.”

박 선생이 작금의 현실에 불만을 품으면서 살짝 육두문자를 섞어서 뱉어냈다.

“어머 죄송해요.”

“저한테 죄송할 거 있나요. 다른 선생님들도 못 들으셨을 겁니다.”

나는 민망해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준기의 학생부와 상담내역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봤다.

“준기 부모님은 준기가 작가 하고 싶어 하는 건 알고 있나요?”

“알고 있죠. 근데 이 동네 부모가 자식이 작가 하겠다는 걸 내버려두겠어요? 강문고잖아요 여기.”

강남의 명문 중 하나인 강문고면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 선생은 그런 의도를 담고서 말했다.

“그래도 준기는 인문계열로 보내는 게 맞겠습니다.”

“선생님 생각도 그렇죠? 그런데 학부모 설득할 근거가 없어서요. 에휴….”

한숨을 쉬는 박 선생에게 나는 준기의 학생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아뇨, 학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아닙니다.”

박 선생이 무슨 뜻인지 물으려는데 수업 시작 종이 쳤다. 교과서와 출석부를 들고 올라가는 선생님들로 교무실이 다소 시끌벅적해졌다.

그 소음 사이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을 설득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부모님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야지요.”

그러자 박 선생은 다음 수업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네? 그게 무슨….”

“준기는.”

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른 교사들이 자리를 비웠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부모님 때문에 인생 꼬인 학생입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