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48화 (48/252)
  • 48화. 보고해

    자습 시간이 되면 이제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몇 번의 대회가 지나간 이후로 고3 교실에는 수능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건 은장이 반장으로 있는 3학년 3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떠들썩했던 친구들도 지난주 한목대학교 입시 특강 이후로는 다들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후…….”

    잠깐 숨을 고르며 주위 친구들을 둘러봤다.

    아침 조회가 조금 늦어져서 지금 3학년 3반은 자습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수능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각자에게 중요한 공부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가령 동석이는 대회 준비를 하는지 설계도면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석이는 담임선생님이 지시한 논술 문제를 푸는 것처럼 보였다.

    ‘답답해.’

    하지만 은장은 제대로 펜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과 한 달여 동안 담임인 강명문과 이야기를 나누고 활동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전까지는 학교를 다니며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근 한 달간 누려왔다.

    부모님도 대학교 진학으로 거짓말은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입시 준비에 힘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활동을 했다. 학생회 후배가 해야 할 대회 준비를 도와주기도 했고, 친구의 발표 실력을 점검해 주기도 했다.

    내신 공부를 하면서 방송부 동아리에서의 인터뷰 준비도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알아봤다.

    은장은 동석이와 정석이를 번갈아 보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친구들의 새로운 면을 떠올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해.’

    오늘 아침, 등교하는 은장의 앞으로 류지훈이 다가왔다. 류지훈은 은장을 으슥한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는 은밀하게 말했다.

    [담임선생님을 조사하는 데 협력해라.]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담임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하지만, 류지훈의 말은 더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강 선생 조사 안 하면 나나 너나 앞으로 위험해져. 그러니까 협력해.]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은장은 방송부에 가입하고 싶어서 당시 방송부 담당이었던 류지훈을 찾아갔었다.

    원체 끼가 많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담당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면 더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류지훈에게 스승의 날에 선물도 챙겨주고, 방송부에 들어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도 써서 줬었다.

    그 덕분인지 은장은 동아리 모집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류지훈이 한 가지 핑계를 만들어서 은장을 방송부에 가입시켰다.

    [앞으로 일이 더 많아질 테니 인력이 필요합니다.]

    교감을 설득한 건 이 말 하나로 충분했다. 류지훈은 지금도, 과거에도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의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진짜 어떻게 해 이걸.’

    류지훈은 그런 은장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자신의 방송부 활동에 대해 물고 늘어지면, 학교 활동의 공정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파장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대학입시 실패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만약 방송부 활동이 모두 취소가 되고, 부정 가입 의혹이 드러나게 된다면, 지금까지 준비해둔 입시 전략이 무산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부모님이 생각했던 재수를 해야 했다.

    친구들보다 1년을 더 늦게 성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1년이나 더 해야 했고, 재수를 해서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대학 레벨 맞춰서 입학해야 했다.

    불과 한 달여 기간이지만, 은장은 자신이 정말로 무대의 뒤에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서포터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즐겁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특히 시사RPG대회 준비 때는 동석이와 정석이의 발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았을 때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정석아.”

    그래서 은장은 혼자 고민하기를 그만두었다.

    “왜?”

    조용한 교실이었기에 정석이 소리를 죽여 답했다. 은장은 잠깐 교실 밖으로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문을 열고 복도에서 은장은 정석과 마주했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정석은 은장의 얼굴에 깃든 근심걱정을 파악하고서 물었다. 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한 듯 천천히 말했다.

    “저기, 너 담임쌤 뒷조사하라고 의뢰 들어오면 할 거야?”

    “미쳤어? 그런 걸 왜 해?”

    정석은 그렇게 말하다가 은장의 얼굴을 보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너 설마…….”

    “아냐, 아직 하겠다고 한 건 아니고, 그런데…… 이거 안 하면…….”

    은장은 정석에게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털어놨다.

    “너 그런 일이 있었어?”

    “응…….”

    정석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자신에게 학교 생활에 있었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면서 무언가 요구사항이 온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은장처럼 고민을 했다면 다행이었을 것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겁을 집어먹고 충실한 노예 노릇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넌 안 그랬네.”

    “뭘?”

    “아냐, 아무것도.”

    그래서 정석은 은장이 대단해 보였다.

    이전까지의 자신은 불리한 일이 있으면 전부 덮어 버리려고만 했으니까.

    자신이 가진 고민을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은장이 부럽기도 했다.

    “나라면 말이지.”

    그렇기에 정석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뒷조사했을 거야.”

    “야, 아까는 나한테 미쳤냐고 그러더니?”

    “그리고 그걸 담임쌤에게 알릴 거야.”

    은장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물었다.

    “그러니까 담임쌤한테 ‘저 쌤 뒷조사할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라고 밝히고 뒷조사하라는 거지.”

    “아예 그렇게 당당하게 가라고?”

    “응. 예전에 담임쌤이 알려 준 거 기억 안 나?”

    정석은 주먹을 쥐고 위로 올리면서 강명문 성대모사를 했다.

    “당당하게 이야기해라! 컨셉 잡고 코스프레를 해라! 전략적으로 접근해라!”

    “푸하하! 그게 뭐야!”

    “그러니까 컨셉질 하자는 거야. 담임 뒷조사 컨셉.”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던 은장은 손뼉을 쳤다.

    “아! 그 코스프레를…….”

    “협박범에게 하는 거지. 안 그래?”

    갑자기 은장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은장은 화들짝 놀랐다. 정석도 그 말을 한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뒤로 넘어질 뻔했다.

    180이 조금 넘는 키의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젊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꽤나 잘생긴 외모라는 평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얼굴이었다. 위로는 흰색 셔츠를 입고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검정색 출석부를 들고 있었다.

    “쌤!”

    “무슨 작당모의를 하나 했더니 감히 담임 뒷조사를 하려고?”

    “쌤 어디부터 들으셨어요?”

    “정석이가 내 뒷조사한다고 했던 부분부터 다 들었다. 작당모의하려면 좀 조용히 해야지 이게 뭐냐? 계단 위로 다 들리게.”

    강명문의 말에 은장이 황급히 계단 위아래를 살폈다.

    “내가 다 봤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내 뒷조사를 어떻게 하려고?”

    “그…… 게…….”

    “해.”

    “네?”

    “하라고. 뒷조사. 그리고 그 협박범에게 정기보고도 올려.”

    은장과 정석은 오히려 강명문이 그렇게 나오자 되려 놀랐다. 긴장보다는 걱정부터가 앞서기도 했다.

    “쌤 그러다 진짜 뭐라도 잡히면 어떡하려고요?”

    “뭐 어때. 대신에 정석이 너도 해라.”

    “저도요?”

    “그래. 은장이 혼자 뒷조사한다고 해 봐라. 은장이가 FBI야? 탐정이니? 하다가 어설프게 해서 분명 다 걸릴 거다. 그럴 바에는 그냥 담임 뒷조사해서 인터뷰 거리 만드는 활동 하는 것처럼 둘이 같이 해. 그게 협박범에게 속내 안 들키고 움직이기 좋지 않겠어?”

    강명문은 이미 그 전에 은장과 정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타이틀은 <강문고 선생님의 실체를 파헤치다!> 이런 거 어때?”

    그리고 둘이서 컨셉이니 코스프레니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는 기특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해 주었던 조언들을 깊이 새기고 위기가 닥쳤을 때 활용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나타나 더 좋은 방향을 알려 주기로 결심했다.

    “방송부 후배들에게 인터뷰 기사를 라디오 방송으로 흘려도 되고, 교지편집부랑 협업해서 교지에 실어도 되고. 너희들 편한 대로 해.”

    “아 교지편집부에 이야기해 볼까요 진짜.”

    정석은 교지편집부를 2학년까지 활동하고 3학년 때는 활동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탈퇴한 상황이었다.

    “후배들에게 물어볼게요. 학교쌤 인터뷰 상반기든 하반기든 교지에 싣자고.”

    정석의 생각에 동의한다며 강명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곧장 은장에게로 눈을 돌렸다.

    “은장아.”

    “……죄송해요, 쌤.”

    “죄송할 게 뭐 있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니에요, 제가 1학년 때 그러지만 않았어도…….”

    강명문은 은장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얼추 알고 있었다.

    그가 있었던 미래에 강문고 선생들 몇 명 중 교내 대회 수상이나 유명한 동아리 가입 등에 비리가 많은 선생들이 있었다.

    아마 은장이도 성적, 열정, 부모님 재력 등 조건이 괜찮았으니 내부 교사들 중 누군가와 그런 비리와 연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류지훈 아니면 임대원? 아니면 다른 누구일 수도 있어.’

    강명문은 과거 그런 비리에 앞장섰던 교사들의 명단을 떠올렸다. 하지만, 은장에게 그게 누군지 묻지는 않았다.

    오히려, 협박범에게 보고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 주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행정일 하다가 교감 선생님을 만났다.”

    “네?”

    “보고해. 협박범에게. 오늘 쌤 진짜 그랬으니까. 교감실 나와서 조회 왔는데 얼굴 엄청 밝아 보였다고도 하고.”

    실제로 강명문은 오늘 출근하자마자 교감실로 불려갔다. 교감은 강명문에게 한목대 특강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 자리에는 윤기준도 함께 있었다.

    “은장이가 어떤 약점을 잡혔는지는 몰라. 짐작은 가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그런데 그게 이렇게 신경을 쓰게 될 정도의 일이라면 협박범 말대로 해. 내 신체에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건…… 그렇죠.”

    “그럼 괜찮아. 뭣하면 진짜 그걸로 기사라도 내주고.”

    강명문은 밝게 웃으면서 은장과 정석의 등을 한 번씩 출석부로 두드렸다.

    “얼른 들어가자. 늦었지만 조회해야지.”

    “네!”

    * * *

    그날, 은장은 하교 직전에 류지훈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류지훈이 은장의 하교 동선에 맞춰서 나타났다.

    “어땠지?”

    은장은 류지훈을 보면서 잠깐 겁을 먹었지만, 이내 담임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교감선생님께 불려 갔나 봐요.”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저희 반만 조회 늦게 시작했어요. 아 그리고,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밝아 보였어요.”

    류지훈은 은장의 말에 심각한 얼굴을 했다. 음, 짧게 신음한 류지훈은 상황은 알겠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도 하교 직전에 보고해. 안 그러면 입시고 뭐고 없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류지훈은 은장에게 엄포를 놓고서는 사라졌다. 은장은 입시와 관련된 협박을 하는 류지훈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보고해. 협박범에게.

    담임의 말처럼 은장은 제대로 코스프레를 해 볼 생각이었다.

    뒷조사를 하는 학생 컨셉으로 정석이와 함께 담임을 당당하게 조사한다.

    그리고 조사한 내용은 기회를 봐서 정석이가 가입했었던 교지편집부 교지에 실을 수 있도록 힘써 본다.

    ‘전략적으로 코스프레, 전략적으로 코스프레.’

    은장은 그렇게 반복하여 다짐하면서 건물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동석과 정석을 발견했다. 손을 흔들면서 달려가자 둘이 은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남은 고교 3학년 시간도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은장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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