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38화 (38/252)

38화. 코스프레

“사람이 달라진다.”

정석이는 이게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더니 알겠다면서 답했다.

“명문대 나오면 자신감이 생기고 이런 거요?”

“그것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져.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긴가민가하는 정석이의 반응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갔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토 달 사람이 줄어든다는 거야.”

내 말을 들은 정석이가 눈을 빛냈다.

“그럼 명문대에 합격하면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럼. 윤리적인 문제에 어긋나지 않는 다면야.”

“해외로도 안 가고, 가업도 안 이어 가도 되는 거죠?”

“당연하지. 다만, 공부를 잘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는 건 그 초석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초석조차 없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멀리 인천공항 방향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비행기 모양을 했다.

“미란이랑은 더 있지도 못하고 튀니지로 슈웅-”

“할게요!”

정석이가 한참 집중해서 비행기 소리를 흉내 내던 나에게 강하게 대답했다.

그런 정석이를 향해 싱긋 웃으면서 조건을 걸었다.

“단, 너희 부모님은 내가 설득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야. 네가 움직여야 해.”

“아,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정석이가 언젠가의 일을 생각하는지 무언가 떠올랐다며 손뼉을 쳤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대로 한번 코스프레 해 보자.”

지금 정석이는 있는 그대로, 해외 가기 싫어서 공부한다고 해 봤자 부모님에게 퇴짜를 맞을 게 뻔했다.

학벌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정석이 부모에게 그런 이야기는 먹히지도 않을 테니까.

“코스프레 컨셉은 이렇게.”

정석이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해외보다는 국내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유에 여자친구 이야기는 빼라고 덧붙였다.

“만약 부모님이 헤어지라고 하면 이미 헤어졌다고 해.”

“네!?”

정석이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면서 따지고 들었다.

“이 멍청아. 헤어진 척 하면 되잖아.”

“아…….”

“그리고 내가 데이트 금지령 내린 거 잊었어? 기왕 하는 거 입시 끝날 때까지만 데이트도,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마. 깔끔하게 5개월 뒤에 멋진 예비 대학생의 모습으로 만나자고 하라고. 알겠어?”

무언가 불만이 남은 듯 입술을 씰룩이던 정석이는 이내 알겠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가서 당당하게 말씀드려.”

“어떻게요?”

“재수해서라도 성실성대 가겠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석이에게 3학년 1학기 성적표를 보여 주었다.

“지난 학기까지의 성적이 2점 중반이었다면, 이번 3학년 1학기는 성적이 1점 후반을 기록했어. 여기 숫자 보이지?”

내가 보여 준 표에는 정석이의 3학년 1학기 점수가 1.95로 찍혀 있었다.

“2점대에서 1점대로 올라온 건 큰 성과야. 그리고 대회 상장도 보여드리고.”

대회 수상은 지난주에 있었던 시사RPG대회 금상을 말했다.

“지금 너한테 부족한 건 열정과 노력, 그리고 그걸 가족에게 보여 주는 전략이야.”

지난번 정석이 어머니와 상담을 하면서 확신했다.

그들은 정석이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정석이가 공부를 소홀히 하고, 학교의 여러 활동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이 컸다.

그것도 실체가 보이는 활동 말이다.

“이번에는 대회에서 금상도 받았고 성적도 올랐잖아. 변하고 있다고 어필해야지.”

그래서 정석이에게는 적절한 코스프레가 필요했다. 특히 눈으로 보이는 성과가 말이다.

학교 친구들의 평판이나 선생님들의 평가보다는 종이에 적힌 숫자, 수상내역 등이 부모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사는 모습만 보여 주면 1차적으로 정석이 부모님은 녀석을 지원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는 말썽만 부리거나 공부는 뒷전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국내 대학 진학. 이 부분만으로도 정석이 부모님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내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리고 유학을 안 가겠다고는 하지 마.”

“그럼요?”

“저번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해야지. 까먹었어?”

“아!”

녀석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가긴 가되 국내 대학 졸업하고 간다!”

“그렇지. 그거야 그거.”

지난주에 대회 준비로 정석이를 만났을 때 나는 강진에 대해 찾아보라고 하면서 유학 이야기를 잠깐 했었다.

그때 국내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고 왔다가 서른, 마흔까지도 백수였던 내 고등학교 동창들을 떠올렸다.

[한국에 와도 빽도 없고 학연도 없는데 이 나이에 취업이 되겠어?]

녀석들과 술을 한 잔씩 할 때마다 들었던 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적당히 창업하고 말아먹고, 창업하고 말아먹고를 반복했다. 어떤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나이 마흔이 넘어갔었다.

“국내에서 공부하면서 명문대 선후배들, 교수님들과 네트워크를 쌓겠다고 해. 그리고 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외에서 석박사 공부하겠다고 말하고.”

그렇기에 이 제안은 정석이 부모님에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갈 게 분명했다.

“진짜 해외로 나가게 되면요?”

“튀니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지 그때는. 그리고 네가 성실성대 붙은 다음에 다른 거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것 같냐?”

정석이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감이 조금 없는 얼굴로 답했다.

“졸업장 받고 가업 이으라고…….”

“아니, 네가 창업이라도 해 보겠다 그러면 응원해 주실 거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믿지 못한다.

입시코디를 하던 시절에도 이런 학부모들을 많이 만났었다.

학생 혼자 공부를 하기 힘들 거라 생각하고, 대회 준비도 부모의 손을 거쳐야 수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고 여긴다.

물론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기 힘들어하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약간의 동기만 만들어주면 스스로 일어설 줄도 알았다.

정석이는 딱 그런 학생이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만 말씀드려도 확 바뀌실걸? 그리고 4년, 5년 뒤에 네가 무언가 도전하고 싶을 때, 대입 성공했던 사례를 이야기하면 어떠실 것 같아?”

그 약간의 동기가 부족해서 학교 공부와 활동에서 겉돌던 녀석. 어떻게 하면 부모님에게 인정 받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몰랐던 녀석.

그런 정석이가 고등학생 학부모의 가장 큰 숙원인 대입에서 성공한다면, 근성과 노력, 결실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면 정석이의 부모님도 아들이 하는 일을 존중하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말을 조용히 들으며 생각에 잠긴 정석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오늘 들어가서든, 내일 아침이든 꼭 말씀드려. 이번에 입시준비 재수까지 생각하고 제대로 해 보겠다고.”

정석이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쌤 그럼 미란이랑은 안 헤어지는 거죠?”

“그래 인마. 그냥 헤어진 척만 해. 대신, 진짜로 데이트랑 연락은 금지하고. 알았어?”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속으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정석이는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다. 그 여자친구 이름이 미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을 사귀지는 않았을 거고.

“아무튼 잘해라. 그래야 너 논술 특강 눈치 안 보고 듣는다.”

“네 쌤! 말씀드리고 결과 보고하겠습니다!”

정석이는 군인처럼 경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군필도 아닌 녀석의 경례를 보니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기운을 차린 것도 같아서 내심 안도했다. 나는 정석이가 교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창밖으로 녀석을 지켜봤다.

* * *

정석은 그날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성적표를 내밀었다.

<전체 평균 1.95>

그 숫자를 확인한 정석의 어머니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정석을 살폈다.

“네가 웬일이냐? 성적도 다 오르고.”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석은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와 봉투를 꺼냈다.

<인문융합탐구대회 - 시사RPG대회 금상>

<부상: 문화상품권 20만 원>

“이게 다 뭐니?”

“엄마, 나 이번에 성적도 오르고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정석은 문화상품권 봉투를 열어 실제 상품권을 꺼냈다. 5만 원권 4장으로 형성된 문화상품권을 어머니에게 건네면서 정석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봐봐. 상품도 받았어.”

조심스럽게 거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버지도 식탁에 앉아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뭘 받아왔다고?”

정석은 상장과 성적표, 상품권을 식탁으로 들고 가서 아버지에게도 보여주었다.

평소 학교에서의 활발한 모습과는 상반되는 자세로 정석은 눈동자를 파들파들 떨면서 의자에 앉았다.

“우리 아들 성적 올랐네!”

“하하…… 응.”

“이건 뭐야? 대회에서 상도 받았어? 금상이네!”

정석의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껄껄 웃었다.

“잘했어! 이거 봐 여보. 정석이 하면 된다니까?”

“그러게. 이제 유학 가서 공부할 마음이 좀 생긴 거니?”

지금까지 아들이 무언가를 해내 온 모습을 보지 못했던 부모는 조금 기분이 들떠 있었다.

정석은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정석은 차마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신 있는 척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 래서, 저기…….”

정석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정석의 어머니가 먼저 선수를 쳤다.

“왜? 유학 가기 싫다고?”

“어? 어떻게 알았어?”

“또 여자친구 때문이냐?”

정석의 반응에 차갑게 대답한 건 그의 아버지였다. 녹차가 담긴 찻잔을 살짝 들고는 정석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그 말에 두 사람이 정석을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하고 싶은 일?”

“응.”

정석은 숨을 들이켰다. 방과 후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항들을 떠올렸다. 비록 시선은 식탁 위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담임과 정해둔 코스프레를 시작해야 했다.

“헤어…… 질 거야.”

“뭐?”

“여친이랑 헤어지고 공부할 거야. 유학은 지금은 싫어.”

거기까지 말하자 정석의 어머니가 물었다.

“대체 왜 유학을 가기 싫다는 거니?”

“아, 가기 싫다기보다는 지금은 싫다는 거야.”

“지금은?”

정석의 아버지는 그 전제조건에 관심을 가졌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명문대 진학하고, 거기서 사람들과 많이 사귀어 보고 싶어. 나도 여기저기 찾아봤고, 이야기도 들어봤어. 근데 우선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두는 게 좋다고 그러더라고.”

“그래. 그래서?”

정석은 다소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왜 그래?”

“더 이야기해 봐. 그래서?”

정석은 부모님이 왜 그러는지 잠깐 생각해 보다가 우선 할 말을 다 끝마치겠다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학교 다니면서 교환학생도 가 보고, 졸업하고 나서 석박사 해 볼까 싶어. 그때쯤에 유학을 가면 어떨까? 석박사를 해외에서 취득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고.”

그 질문에 정석의 어머니가 재차 물었다.

“생각해둔 전공은 있니?”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정석은 고민했다. 그러다 며칠 전 대회 준비하면서, 그리고 수업시간에도 들었던 한 내용이 떠올랐다.

“사회랑 경영.”

“둘 다?”

“요즘 공정무역이 대세라며? 그래서 나도 좀 찾아보고 했는데 관심이 생겼어. 아빠가 하는 일이랑도 연관 지을 수 있을 것 같고.”

그 말에 정석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돋았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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