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자만추를 아시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늦은, 그렇다고 바로 술을 마시기에는 애매한 시간.
나는 지석선배를 만나 안암동의 삼겹살 집으로 들어갔다.
“아 이제 자려는 후배를 왜 여기까지 불러내십니까. 신림에서 1시간 넘게 걸려요.”
“그냥 간만에 학교도 좀 돌아보고, 옛 추억도 되새겨 보고. 넌 그립지도 않디?”
“이 선배가 왜 이래. 뭐 잘못 드셨습니까?”
선배는 대답하지는 않고 씁쓸한 듯 웃으며 고기를 집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그걸 못 물어봤었네.”
“뭘요?”
지석 선배는 큰 결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심호흡을 하고는 내 빈 잔을 채워 줬다.
“그…… 너 좋아하는 게 뭐냐?”
“좋아하는 거요? 액션 영화, 장르문학, 요즘은 모바일 게임 뭐 이런 거?”
내 말이 끝나자 선배가 한심한 한량이라며 혀를 찼다.
“아 왜, 물어봐서 알려 줬구만.”
“됐어. 선생님은 왜 됐냐?”
“무슨 면접이라도 보십니까?”
나는 처음 고구려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입학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왜 교사가 되려고 했었는지, 그 이후 목표가 어떠했는지.
“처음 이유는 평생 밥줄이니까. 두 번째 이유는 학생들 가르치는 게 재밌어서.”
그렇게 말한 후 소주잔을 휙 들이마셨다.
“그리고 최근에는 하나 더 생겼습니다.”
“뭔데?”
“그건 비밀.”
나는 순식간에 선배의 잔을 소주로 채웠고, 내 잔에도 연달아 채웠다.
“하…… 알았어. 그럼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은 뭐야?”
“소개팅이라도 해요? 이런 걸 왜 자꾸 물어…….”
그 순간 퍼뜩 뇌리에 꽂힌 단어가 하나 생각났다.
“선배 혹시…….”
“혹시 뭐?”
픽 웃으면서 선배의 잔에 자연스럽게 건배를 했다.
“에이 진즉 말씀하시지!”
“그니까 뭘?”
“괜찮은 여성분 소개시켜 주려는 거 뻔히 보이는구만! 뭘 숨겨요 이런 걸.”
회귀하고 첫 소개팅 상대가 누굴지 궁금증을 안으면서 선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먼저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액션인데, 아이언엉클 좋아하고, 고전영화로는 시네마헤븐이고, 소설로 국내 작가 중에는…….”
“잠깐, 잠깐!”
선배는 내 말을 끊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소개팅 아니야 인마.”
“그럼 이런 건 왜 물어봅니까? 괜히 기대하게.”
나는 아쉽다며 고기를 한 번에 여러 점 집어먹었다.
“소개팅은 아니고 그……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해 주려고.”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선배가 벌써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이 선배 벌써 자만추를 아시네.”
“뭐야 그게?”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몰라요? 아 아직 안 나왔나.”
아직은 이런 줄임말이 덜 유행하는 시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래서 언젠데요? 혹시 학교 앞으로 오라고 한 거는 그래서인가?”
“그건 아니야. 조만간 날 잡으면 알려 줄게.”
지석 선배가 웃으면서 고기를 뒤집었다. 어째 선배의 웃음이 조금 씁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회귀하고 첫 데이트 상대에 대해 생각하기만 해도 정신 없었으니까.
‘설마 걔는 아니겠지?’
과거의 내가 지금 시점에서 만났던 여자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대학원생이었다. 교수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약속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터라 두 번 만난 걸로 서로 연락두절이 된 경우였다.
“선배 혹시 대학원생은 아니죠?”
“나도 몰라. 아니, 아닐걸?”
“선배도 잘 모르는 상대라…… 기대됩니다.”
진심으로 기대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 일정 중 가장 여유 있는 날이 언제인지를 머릿속에서 정리해 봤다. 아무래도 본격적인 원서 접수 준비가 들어가기 전인 돌아오는 주말 정도에는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 옷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고민했다. 선배와 잔을 부딪치면서 유일한 이번 주말 휴식 시간이 지나갔다.
* * *
류지훈은 월요일부터 심지석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바깥바람을 맞았다.
주말 사이에 심지석이 무언가 결정을 했을지 궁금해서 아침부터 찾아갔던 것이다.
“후배들 중에 괜찮은 애 없냐?”
하지만 심지석의 첫 마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뭐?”
“아니, 후배들 중에 괜찮은 여성분 없냐고.”
“갑자기 왜?”
“그, 자만추인가 뭔가를 해야 해서…….”
심지석은 류지훈에게 일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류지훈은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살짝 펴면서 커피잔을 비웠다.
“그럼 하는 거지?”
“됐다. 고민해 봤는데 내 성격이랑 너무 안 맞아.”
심지석은 주머니에서 지난 금요일에 류지훈으로부터 받은 봉투를 꺼냈다.
“그 뒤로 꺼내 보지도 않았다.”
“야, 지석아.”
“난 못하겠다. 정 쑤셔 봐야겠으면 나 말고 다른 사람 구해. 이제 간다.”
심지석은 빈 종이컵을 종이컵 수거함에 던져넣으면서 다시 뒤를 돌아봤다.
“아, 대학원생은 안 되고 직장인으로 알아봐 줘. 가능하면 이번 주 주말로!”
“야 이 미친…… 심지석? 심지석!”
류지훈은 후다닥 교무실 방향으로 사라지는 심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행여나 다른 교사들의 눈에 보일까 봐 손에 든 봉투를 서둘러 주머니로 넣었다.
“시발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류지훈은 이번 의뢰를 요청한 상대에게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고민했다. 그와 동시에 괜히 괜찮은 여자 후배는 없는지 연락처를 뒤적였다.
* * *
지석 선배가 만들어 줄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대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박 선생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아, 네, 그런 게 있습니다.”
나는 짐짓 아무 일 없는 듯 학생들의 성적표를 정리했다. 굳이 소개팅을 하거나 하는 일을 동료 교사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이제 곧 전쟁이겠네요.”
“네, 곧 시작되겠죠.”
박 선생은 다가올 입시 시즌이 두렵다는 듯 기지개를 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교감 선생님이 오늘도 전체 회의 때 입결 대박 외치신 거 보셨죠? 저도 박 선생님도 이번에 결과 못 내면 끌려들어갈 겁니다.”
“에이, 그래도 저에 비하면 강 선생님은 훨 낫죠. 요즘 신임받고 있잖아요?”
생각해보면 박 선생의 말처럼 최근 들어 나는 교감과 이사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박 선생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를 하고도 남을 상황들이었다.
그래서 박 선생에게 해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거만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무슨. 그냥 착하게 살다 보니 이런 기회들이 주어지는 겁니다.”
“진짜 착한 사람은 착하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 하지는 않으니까 강 선생님은 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박 선생은 서류를 들고 책상 위에 팡팡 두들기며 높이를 맞췄다.
“다 노리고 하는 거 아니에요?”
“뭘 노립니까 제가. 노릴 게 뭐가 있다고.”
“흐으으음…….”
박 선생은 의심스럽다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살짝 민망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괜히 키보드를 만지작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아닌가…… 아니에요. 사실 선생님 모습이 2년 차 신임교사 같지가 않아서요.”
“그건 나도 동의해.”
어느새 옆으로 왔는지 윤기준 선생이 내 앞에 와 있었다.
“그쵸? 강 선생님 이상하다니까요.”
“어디서 연수라도 받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거 없습니다.”
두 사람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면서 슬며시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는 성적표를 들고 고뇌에 빠진 녀석들이 한가득이었다. 게다가 주말에 나와 통화를 한 녀석들까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쌤…….”
“왜 이리 초상집 분위기야?”
나는 교탁 위에 자료를 올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 약 두 달간, 너희들의 인생을 결정할 첫 번째 과정과 마주하게 된다.”
내 말에 다들 옅은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씨익 웃으면서 들고 온 종이를 팔락거렸다.
“성적이 오른 녀석도 있고!”
은장이와 정석이가 눈빛을 교환하면서 기뻐했다. 은장이는 지필고사만으로는 작년보다 조금 상승한 정도였지만, 수행평가 점수가 모두 만점을 받아 1등급 중반 점수를 받게 되었다.
“성적이 그대로인 녀석도 있고!”
큰 변화가 없는 학생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안에는 동석이와 나명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동석이는 수학, 과학 과목이 만점 받아서 작년보다는 상승한 점수였다. 명천이는 정말 평균치 그대로 작년과 비슷했다.
“성적이 하락한 녀석도 있다!”
성적이 하락한 학생들은 이제 남은 건 수능뿐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들고 온 성적표를 교탁 위에 탁 내리치면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살폈다.
“수능에 집중하는 녀석들은 이번 학평, 9월 모평 목숨 걸어라. 알겠냐?”
““네!!!!””
정시파가 대다수인 강문고였기에 우리 반인 3반에도 수능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절반이 넘는 인원이 큰 소리로 대답하자 교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논술 준비하는 녀석들은 학원에만 의존하지 마. 최저용으로 수능 공부도 하고. 내신 떨어진 사람들은 논술 만점 받아야 해. 알지?”
내 경고에 논술파 학생들이 겁을 먹었는지 경직된 자세로 꼿꼿이 앉았다. 내신 30%, 논술 70%로 평가하는 학교들이 많았기에 내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학교에서 논술 특강 오픈한다. 학원 못 다니고 있는 녀석들은 신청해서 듣고. 추후 공지해 줄 테니까.”
나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살피면서 녀석들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6월 모의고사도 끝나고 3학년 1학기 내신 성적도 나온 시점. 이때 학생들은 많이들 준비했던 혹은 유리할 수 있는 입시 전형들을 포기하거나 살펴보지도 않게 된다.
그러다 수시 지원 직전에 몰려와서 하루 만에 준비가 되느니 어떻느니 하는 산신령도 불가능한 미션을 요구하곤 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해 주고 싶었다.
성적도 마무리되었으니 지금 이 녀석들이 갖추어야 하는 건 긴장감이었다.
“아직 입시는 시작도 안 했다. 확실하게 준비해서 최선을 다해 보도록!”
조회를 마치고 나는 정석이를 불렀다.
“수업 다 끝나면 교무실로 내려와.”
이제 곧 정석이와 정석이 어머니를 상담해야 했다. 퓨쳐컨설팅을 피해 가도록 유도하지 못하면, 미래에 내가 어떤 곤혹을 치를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정석이가 교무실을 찾아왔다.
“쌤 저 성적 올랐는데 괜찮겠죠?”
“요즘은 집에서 뭐하는데?”
“가끔 책 읽고, 논술 문제 풀고, 시험 끝났으니까 미란이랑 놀고 있…… 아야!”
나는 태평하게 대답하는 정석이의 머리통에 돌돌 말아둔 종이몽둥이로 한 대 먹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네 여친도 같이 놀자 그러디?”
“네?”
“미란이도 네가 놀자 그러면 쫄래쫄래 따라다녔냐고.”
“그건…….”
정석이는 대답을 망설였다. 얼굴을 보니 미란이는 공부하자고 하는데 녀석이 놀자고만 했을 것이었다.
“오늘부로 데이트 금지.”
“아, 쌤!”
“쌤! 해도 소용없어.”
나는 자리에서 정석이의 학생부와 3학년 1학기 종합 성적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이정석.”
“……넵.”
“대학 가고 싶냐?”
정석이는 내 물음에 자신감이 훅 빠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왜 자신이 없을까?”
“제대로 공부를 하기가 두려워요.”
그럴 수 있다.
“공부를 너무 잘하게 되면, 부모님이 널 더 해외로 보내려고 하실 것 같아서?”
“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지도 않은 가업 물려받으라고 강요하실 게 뻔하고요.”
나는 그런 정석이의 얼굴을 보고 학생부를 펼쳤다.
“그래서 받은 성적이 이거야?”
“아 쌤, 그건 진짜 철없을 때…….”
핑계를 대는 정석이에게 종이몽둥이가 한 번 더 날아갔다.
“씨잉 그만 때려요…….”
“누가 보면 풀스윙이라도 한 줄 알겠다. 정신 차려 인마.”
정석이가 걱정하고 있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일렀다.
“미래를 앞서가도 정도가 있지. 공부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널 해외로 보내시려고 안달을 낼 거라고? 네가 어떻게 알아?”
“저희 부모님이면 그러고도 남아요.”
“네가 뭐 3년, 5년 뒤 미래를 보고 왔어? 아니잖아.”
그리고 난 대충 정석이가 5년 뒤에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너 해외로 나가면 그 길로 망하는 거야. 그건 내가 보장해.”
“뭐 망하는 걸 보장까지 해줘요.”
“됐고, 공부 잘하면 뭐부터 달라지는지 알아?”
나는 머리를 정석이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사람이 달라진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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