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시사RPG대회 (2)
시사RPG대회 당일, 한 교감이 나에게 이상한 문자를 보내 왔다.
[자네 시간 좀 되나?]
평소라면 교무실에 있을 때 불렀을 한 교감이었다. 이렇게 따로 연락해 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귀찮은데.’
대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한 교감이 부르니 바쁘다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옆에서 같이 대회 용품을 챙기는 지석 선배와 박 선생이 빨리 다녀오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전화를 걸었다.
“교감 선생님, 네, 강명문입니다. 잠깐 시간 됩니다. 대회 준비 때문에 한참 바빠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지석 선배가 미쳤냐며 속삭였지만 무시했다.
[아, 그래. 그, 다름이 아니라 말이야.]
나는 핸드폰을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고는 박스에 대회 용품들을 쑤셔 넣었다.
[음…… 아닐세. 대회 준비는 잘 되어 가나?]
“……네, 아침부터 준비했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따 이사장님 오시면 잘 에스코트 해 드리게. 잘 부탁하네, 이번에도.]
한 교감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툭 끊었다.
“뭐야, 바빠 죽겠는데.”
“뭐라셔요?”
박 선생은 내 통화 내용이 궁금했는지, 의자를 살짝 당겨서 나에게 다가왔다.
“이따 이사장님 오시면 의전하라고만 하시고 끊으시네요.”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요?”
“뭐더라, 아,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시큰둥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보며, 지석 선배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야! 강 선생! 진짜 교감이 그렇게 말했어?”
“네, 네, 그랬다고요! 아침부터 왜 이래요, 정말.”
나는 선배의 팔을 걷으면서 투덜거렸다.
“교감이 너 찍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묻자 선배가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줬다.
“한 교감이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시다, 이거야.”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한 교감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미래에 있는 사건에서 나를 보호하는 준비과정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 학부모 참관도 잘 마무리했으니 대회까지도 신경이 쓰일 게 뻔했다.
“라인 탈 것도 아닌데 뭘 그럽니까. 아무튼, 이따 은장이랑 애들 3시까지 내려오게 할 거니까 나머지는 그때 준비하면 될 거 같아요.”
내가 손을 툭툭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사람도 기지개를 폈다.
“그럼 수업 끝나고 이따 보자고!”
“수고하셨어요. 이따 봬요, 선생님.”
지석 선배와 박 선생이 먼저 체육관을 나섰다. 한쪽으로 밀어 둔 대회용품들과 여분의 책걸상을 한번 쓱 본 다음 나도 교무실로 향했다.
* * *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한 교감은 나에게 이사장님 에스코트하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본인이 직접 가서 에스코트를 했다.
이사장은 6교시가 끝난 2시 30분이 넘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설마 이사장이 정말로 보러 오겠냐고 의심하던 교사들도 이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요. 대회는 어디서 하죠?”
“체육관에서 합니다. 지금 준비 중이니 시간 맞춰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 교감의 옆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내가 입을 열자 이사장이 빙긋 웃었다.
“강 선생님은 가서 준비 도와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사장의 말은, 대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여기서 뭘 하고 있냐는 뜻이었다. 이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교감이 득달같이 나를 향해 말했다.
“얼른 가서 준비하게!”
나는 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의전하랄 땐 언제고 참나.”
하지만 역시 의전보다는 차라리 대회 준비가 마음 편했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찾고서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쌤 오셨어요?”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었던 은장이가 의자에 종이를 붙이면서 말했다.
<이사장님>
<교장선생님>
따위의 직급을 가장 앞자리 의자에 붙여서 높으신 분들의 자리를 정해 두는 일이었다.
“세팅은 어느 정도 끝난 것 같네. 발표자들은?”
“30분 뒤면 올 거예요.”
은장이는 마이크를 잡으면서 테스트를 했고, 민주는 지석 선배와 함께 현수막을 걸고 있었다.
박 선생은 토론 때 사용할 용지들과 간단한 다과를 정리해서 책상에 올려 두었다.
“근데 이거 진짜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뭐가요?”
“아, 그냥 주제가요. 진짜 괜찮아요 이거?”
나는 시사RPG대회 안내문에 적혀 있는 주제를 한 번 더 읽어 봤다.
<일본 T사 리콜 사태로 바라보는 이 시대 소비자의 태도>
<사회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미덕>
이번 대회는 이 두 개의 주제를 두고 랜덤으로 결정이 되어 각 팀이 경쟁하는 구도였다. 기존의 찬반 토론이 아니라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토의였다.
평가자들은 각 팀 중 어떤 팀이 더 조리 있게 답변을 하는지, 그리고 재치있게 준비를 해 왔는지를 평가하게 된다.
‘게다가 선정 위인은 주어진 인물들 중 선택이었고.’
참가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위인은 사전에 공지했었다.
<세종대왕, 이순신, 오다 노부나가, 플라톤, 어니스트 헤밍웨이, 안중근……>
교과서만 들춰보면 나올 수 있을 법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들 가장 뒤에는,
<……강진>
학교 설립자인 강진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이건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석이에게 꼭 이 역할을 준비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괜찮겠지?’
다행히 정석이는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강진 역할을 받아들였다.
이사장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무대는 적당히 마련이 된 것이다.
그리고 동석이가 학부모 참관 때 발표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인문계열 대회에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 선생, 할 만해?”
“윤 선생님.”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온 윤 선생의 양손에는 음료와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먹으면서 해. 당 떨어질 때 되지 않았어?”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지석 선배와 박 선생도 윤 선생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윤 선생이 사 온 초코바를 입에 넣었다.
“응원해 주러 오셨어요?”
“응원도 있고, 궁금도 하고. 우리 초임교사 강명문 선생이 어떤 대회를 총괄했는지 말이야.”
놀리듯이 이야기하는 윤 선생은 무언가 즐거워 보였다.
“그럼 기왕 오신 김에 좀 도와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석 선배가 장난스럽게 윤 선생에게 물었고, 윤 선생이 거기에 화답하면서 간단한 정리를 도와주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30분 전, 학생들과 교사들이 들어왔다.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학부모들도 자리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강 교장, 한 교감, 이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판이 좀 커진 거 같은데…….”
지석 선배의 중얼거림에 나도 동의했다.
이렇게 크게 열 대회가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뜻 봐서도 구경하러 온 학생들만 40명이 넘었고, 교사들도 평가자를 제외하고 열 명 남짓이었다. 거기에 학부모들과 교장, 교강, 이사장까지.
“괜히 우리가 더 떨리네. 그치?”
“선배가 떨면 어떡합니까. 떨면 총괄인 제가 떨어야지.”
“강 선생님은 은근 뻔뻔해서 괜찮으신 거 같은데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시사RPG대회 자리를 빛내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말씀 드립니다. 저는 학생회장인 강문고등학교 2학년 오민주입니다.>
일부러 은장이는 3학년인 자신이 아니라 2학년인 후배가 사회를 진행하도록 배려했다. 이런 사소한 점들이 은장이가 스텝으로서 어느 정도 역량을 보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멋진 학생분들,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많이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오늘 이분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은데요!>
민주의 말이 끝나자 조명이 이사장, 교장, 교감이 앉은 자리 앞을 비추었다. 조명을 조작하는 건 은장이였다.
<강문고등학교 이사장님 자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주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오늘 대회는 시사RPG, 롤 플레잉 게임이라는 의미죠? 시사사건을 역사적 위인의 역할을 맡아 그분들의 시각에서 해석해 보는 대회입니다.>
민주는 미리 준비해 둔 대본과 함께 적절한 애드리브를 섞어 가면서 좌중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은장이와 정석이처럼 민주도 발표 능력이 꽤 뛰어난 것 같았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팀과 대결을 한 후 종합평가 점수를 토대로 수상팀이 결정됩니다!>
간단히 대회 설명을 마친 민주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럼 첫 번째 대결입니다! ‘인생은 한 방이야’ 팀과 ‘에이스 철학자’ 팀!>
순서가 된 학생들이 하나씩 준비된 책상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마이크를 손에 들고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인생은 한 방이야’ 팀은 안중근과 여포를, ‘에이스 철학자’ 팀은 플라톤과 노자를 선택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다소 진지했지만, 재치를 넣었던 안중근 역할의 학생이 고득점을 받았다. 철학자 팀은 위인들의 철학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해서 감점이 되었다.
‘분위기 괜찮네.’
구석에서 평가자 위치에 앉아 토의를 지켜보면서 청중들을 돌아봤다.
사실 토의 대회라 하면 그렇게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수 있었다. 그래서 ‘융합’을 강조했고, 시사, 토의, 역사를 섞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앞에 앉아서 학생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이사장은 몇몇 내용에서는 감탄사를 뱉기도 했다.
“오, 저렇게 해석을…….”
그런 이사장의 모습을 옆에 앉은 한 교감이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한 교감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고개만 까딱 움직이고 다시 학생들의 의견에 집중했다.
<저희 ‘NBA’ 팀이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니체의 역할인 제 의견으로는……>
몇 팀의 대결이 진행되었고, 지금은 NBA(니체+비트겐슈타인+아이들) 팀이 발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답변을 듣고 있는 상대팀은 정석이와 동석이의 태그 팀이었다.
<네! NBA 팀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 의견에 ‘강진전자’ 팀도 이야기해 주세요!>
민주의 신호에 정석이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강진전자에서 강진 역할을 맡은 3학년 3반 이정석입니다!>
마이크를 쓰고 있는데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는 정석이에게 귀를 막으며 신호를 보냈다. 녀석이 조금 민망한 듯 살짝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먼저, 일본 T사 리콜 사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흠!>
정석이는 잠깐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책상 아래에서 물건을 몇 개 꺼냈다.
갓과 인공 수염 장식이었다.
‘제대로 구했네.’
사실 저 갓은 내가 지시한 코스프레였다.
[이번 시사RPG대회는 재미있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어야 해. 그게 컨셉이야.]
그 설명과 함께 나는 정석이에게 옛 사람 코스프레로 전통 갓을 하나 구해 오라고 했다.
‘그거에 더해서 수염도 준비했구만.’
정석이는 내 의견을 듣고 조금이라도 더 보여 줄 수 있는 소품을 준비했다.
예상대로, 정석이의 뻔뻔한 라이브 코스프레는 효과적이었다.
교복 위에 갓을 쓰고 턱 위로 긴 인공 수염을 붙인 정석이가 뒷짐을 졌다. 그리고 마이크 앞으로 고개를 숙이는 정석이를 다들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놈사의 차량 돌려주기 사태로, 이 강진은 본 사건에 우리 백성들이 참으로 현명한 처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하오.>
예상치 못했던 저가형 코스프레와 사극형 회화에 청중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에 리콜이나 T사처럼 영어를 사용한 부분은 강진 어른이 살았던 시절을 고려해 적절히 우리말로 번역까지 했다.
정석이도 청중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이 멎기까지 잠간 즐기고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어~흠, 마땅히 불편한 말도 해야 했겠지만, 왜놈사의 대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소. 바른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바른말과 행동을 하려 한다면 마땅히 받아주는 것도 미덕 아니겠소이까.>
정석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석이를 바라봤다.
<옆에 앉은 테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연스럽게 동석이에게 바톤터치를 한 정석이는 가벼운 몸으로 착석했다.
그리고 동석이가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부여잡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부품 결함 문제였습니다. 한국 소비자들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비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더니 책상 앞에 있는 생수병으로 책상 위를 팍! 내리쳤다.
동석이가 맡은 역할은 미국의 전기공학자이자 에디슨의 라이벌이었던 니콜라 테슬라였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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