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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클래스-32화 (32/252)
  • 32화. 시사RPG대회 (1)

    영어 토론대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기말고사 이후여도 영어로 토론을 해야 해서 신청자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기우였다.

    총 서른 명이 신청해서, 우선적으로 본선에 진출할 사람들만 가려두었다. 박 선생이 시험 기간에도 계속 바빴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예선을 통과한 인원들은 총 8명이었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지나갔네요.”

    행사 준비, 진행, 평가, 뒷정리까지 맡게 된 나는 바닥에 떨어진 토론 용지를 주우면서 말했다.

    “원래 준비 기간은 길고 행사는 짧잖아요. 다 그런 거죠, 뭐.”

    내 옆에서 책상을 원위치로 돌리고 있던 은장이가 대답했다.

    “안 힘들어?”

    “네, 괜찮아요. 아 쌤, 그 종이는 여기 박스에 모아 주세요. 제가 옮길게요.”

    이번 대회를 준비할 때 그나마 몸이 편할 수 있었던 건 은장이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이 컸다. 은장이는 대회 스텝으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 했다.

    오늘 아침부터 미리 필요한 물건 중 빠진 게 없는지 체크했고, 부족한 건 근처 문구점에서 보충해 왔다.

    특히, 작은 현수막에 사용할 테이프가 없어서 중간에 사 온 것과 토론자들을 위해 음료를 준비하자고 제안한 게 돋보였다.

    “쌤! 정리 끝났어요! 이제 교무실로 옮기면 되죠?”

    은장이가 박 선생에게 물으면서 박스를 힘차게 들었다. 그러자 아직 토론 용지를 검토 중이던 박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은장아. 그거 내려둬. 이따 민주가 와서 치울 거야.”

    “그러고 보니 민주는 어디 갔어요?”

    유일하게 대회 준비를 도운 학생회장 오민주의 모습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보이지 않았다.

    박 선생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저기 오네요.”

    “다녀왔습니다!”

    대회를 치른 교실 앞에서 민주가 소리를 지르며 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거요! 박 쌤께서 쏘는 음료예요!”

    민주는 나와 은장이에게 스무디를 한 잔씩 건네면서 마카롱도 하나씩 쥐여주었다.

    “감사 표시인가요?”

    “대회 준비도, 진행도 다들 수고하셨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거예요. 은장이랑 민주도 고생했어.”

    박 선생이 생긋 웃으면서 두 학생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은장이와 민주는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 음료에 꽂혀 있는 빨대를 쪽 빨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이 음료 혹시 거기 아니에요?”

    “네, 그 카페예요.”

    은장이가 우리 말에 반응하면서 눈을 빛냈다.

    “쌤도 여기 가 보셨어요?”

    “아, 응. 저번에 지나가다가 들렀어.”

    정석이와 미란이의 밀회를 훔쳐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여기 맛있죠. 특히 마카롱이…….”

    “저는 그래도 아메리카노가 제일 좋아요! 이 카페는 원두를 공정무역으로 한다던데…….”

    둘의 수다를 듣던 중 민주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공정무역 원두 쓰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모르셨구나. 민주는 나중에 벤처기업 만드는 게 꿈이래요. 그래서 관심이 좀 있나 봐요.”

    박 선생의 부연설명에 민주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에요. 아직 고민 중이기는 한데 그냥 관심은 있는 정도예요.”

    “괜찮은데? 벤처기업이든 카페든 어쨌든 경영학 목표로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어느새 녹아 버린 스무디를 음료수처럼 빨아 마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에 말했던 사항들 준비할 때 공정무역 거래 기업도 좀 찾아봐. 사회적기업이랑 협동조합도 찾아보면 도움이 될 거야. 기회 되면 여기 카페 사장님 만나서 인터뷰라도 해 보고.”

    박 선생은 또 시작됐다며 고개를 저었고, 은장이는 믿음이 충만한 눈빛을 보였다. 민주는 이번에도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는 이내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네!”

    아무래도, 시즌이 끝나면 민주와도 상담을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인문융합 탐구대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 기말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됐다!!!!!!”

    성적표를 받은 은장이가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울린 고음에 얼굴을 찡그리며 은장이에게 주의를 줬다.

    “들어가서 앉아!”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하나둘 각양각색의 얼굴을 했다.

    어떤 학생들은 환호했고, 어떤 학생들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또 어떤 학생은 손톱을 깨물면서 불안한 듯 볼펜을 돌렸다.

    “조용조용!”

    평소처럼 교탁을 가볍게 탁탁 내려치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나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수시를 포기한 녀석들도 이번 시험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멘탈이 흔들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명천이는 유독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당황해하고 있었다.

    명천이의 얼굴을 기억함과 동시에 주변의 다른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긴장 풀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말고!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 7월 학평, 수시 접수, 9월 모평 등 할 게 많아!”

    내 말에 모두가 긴장한 기색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입시 때려치운 놈 아니면 지금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는 다 알고 있을 거다. 다음 주에 한목대에서 입시특강도 열 거니까 관심 있는 녀석들은 듣고. 생기부에 기재해 줄 거야.”

    생기부에 기재해 준다는 말에 입학사정관제를 준비하려는 학생들이 잠깐 관심을 보였다가 사그라들었다. 아마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한목대 입시특강은 학부모회장과 한 교감을 겨냥한 것도 있지만, 사실 입시를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게시판에 이거 붙여 두고, 신청할 사람은 신청해.”

    한목대 입시특강 안내문을 은장이에게 건네주고 다시 교탁 앞에서 진지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내일 대회 참가하는 사람, 정석이랑 동석이. 인문융합 탐구대회는 내일 오후 4시부터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연습할 수 있으니까 잘 준비해서 와라!”

    대회 준비 당부를 하면서 종례를 마무리했다. 학생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교무실로 내려갔다.

    “강심장 강 선생 여기 있네!”

    지석 선배가 대회 준비를 하는 내 뒤로 다가오더니 얼굴을 들이댔다.

    “선배도 좀 도와주세요.”

    “우리 총괄 담당께서 도와달라면 도와줘야지. 신청은 많이 했어?”

    “열 팀 신청했습니다.”

    선배가 다행이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으면 평가하기 힘들었을 텐데 잘됐네.”

    “그러게요. 상은 금상, 은상, 동상 다 해서 5개니까 적당한 것 같습니다.”

    이번 인문융합 탐구대회는 금상 1명, 은상 1명, 동상 3명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총 열 팀 중 다섯 팀에게 주는 거면, 무려 참가자의 절반에게 상을 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준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니야?”

    “오히려 이 기회 놓치면 바보가 되는 거겠죠. 괜찮을 겁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면서 토너먼트 표를 그렸다.

    <이정석, 최동석>

    우리 반인 3반에서는 이 둘이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대표라기보다는 학생들이 전적으로 이 둘을 밀어줬다고 하는 게 맞았다.

    특히 동석이가 학부모 참관수업 시간의 발표를 한 이후로는 반 학생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도 잘하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심사위원용으로 준비해 둔 다과를 입에 가져갔다.

    * * *

    교장실 안쪽에 난 창으로 강명문을 지켜보던 학부모회장은 조용히 강철면 교장과 한명심 교감을 돌아봤다.

    둘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긴장한 채 학부모회장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제 명천이와 이야기를 좀 나눠 봤습니다.”

    학부모회장이 소파에 앉으면서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저 강명문이라는 선생이 특정 학생들을 편애한다고 하던데요.”

    한명심 교감은 그 말을 듣자 누구인지 바로 알 것 같았다. 김은장, 최동석. 최근에는 이정석까지 강명문과 붙어다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촌지 하나 받지 않는 강명문 선생이 정말 편애하기 위해서 그 학생들과 다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정 학생들 편애라기보다는, 조금 사연이 딱한 학생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신경이 더 쓰일 수는 있겠지요.”

    “지금 교감 선생님도 그 선생 편을 드시는 건가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 애는 딱하지 않고요?”

    강철면 교장이 한명심 교감에게 눈치를 줬다.

    “지금 수험생들은 모두가 딱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렇게 편협하게 해서야 되겠어요?”

    “그건…… 그렇습니다.”

    “조사해 보세요. 저 강명문이라는 선생, 분명 뒷돈을 받았든 자리를 약속받았든, 뭔가 있을 겁니다.”

    학부모회장은 확신했다. 일개 평교사, 그것도 초임교사가 특정 학생들을 편애한다는 건 누군가의 사주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얼마나 받았지? 천? 2천? 아니면 억?’

    자신이 아들을 과외시킬 때 최고 스타강사랍시고 월 1억을 바치며 과외를 시킨 적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때를 생각해 보면서 적당히 계산해 본 것이었다.

    “아들한테 들어 보니 원래 그 최동석인가 하는 학생은 말 한마디 하는 거도 힘들어하는 학생이었다더군요.”

    강철면이 옆에서 한명심에게 맞냐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한명심도 사실 최동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아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네, 네, 아마 그랬습니다. 별로 열심히 학교를 다니거나, 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학부모 참관 이후로 학부모회장은 한명심에게 한 가지 문의를 해 왔다.

    [저 강명문이라는 선생에게 과외를 받고 싶은데요.]

    학부모회장은 얼마를 써서라도 아들을 의대에 진학시키려고 갖은 수를 쓰려는 학부모였다. 없는 강의를 소규모 형태로라도 만들어서 스타강사 수업을 암암리에 오픈하거나, 아들의 공부 환경까지 다 간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선생을 붙여도 아들의 성적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번 학부모 참관 때 지켜본 아들의 모습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그 말씀이 맞다면 강명문이라는 선생의 수완이 뛰어난 모양이네요.”

    “좀 특이하기는 합니다.”

    한명심의 말에 학부모회장이 호기심을 보였다.

    “어떤 점에서요?”

    “유독 올해 들어서 입시 쪽에 의욕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뭐, 그 덕분에 저희 학교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어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요.”

    한명심은 지금까지 강명문이 해 온 일들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학부모회장은 팔짱을 끼고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공부뿐 아니라 입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을 아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반면, 앞에 앉은 두 선생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무서워서 침만 꼴딱 삼켰다.

    “두 분 선생님.”

    “네, 네 명천이 어머님.”

    “제가 두 분께 어려운 부탁드리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하면서 학부모회장이 핸드폰을 꺼냈다.

    “제가 두 분께 섭섭하게라도 해 드렸나요?”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럼, 강명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우리 아들 입시 상담을 해 줄 수도 있겠네요?”

    “그야 학생들 상담은 다 해 주지요.”

    강철면의 말에 학부모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장 선생님. 누가 그걸 몰라요? 감 떨어졌어요?”

    “네? 아닙니다, 그건…… 죄송합니다.”

    한명심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명천이 어머님, 강명문 선생은 아마 어려울 겁니다.”

    “왜죠?”

    “그 친구, 촌지를 지금까지 하나도 안 받았고, 초임이라 그런가 열정이 너무 높습니다.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그 말에 학부모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봐요, 교감 선생님.”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에 손을 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손을 내리고 앞에 앉은 둘을 노려봤다.

    “어설프게 돈 가지고 할 거 같아요? 제대로 된 조건을 제시할 거니까 그 선생 데리고 와요.”

    학부모회장의 말에 강철면과 한명심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학부모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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