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29화 (29/252)
  • 29화. 과보호?

    일요일, 나는 박 선생에게 불려가 영어토론 발표대회 준비를 도왔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생긋 웃는 박 선생의 얼굴에 뭐라고 불평이라도 하려다가 꾹 참았다.

    애초에 박 선생이 많이 도와주고 있기도 하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 근데 준비할 게 왜 이렇게 많습니까?”

    나는 회의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물었다.

    “이건 ‘찬성’ 측 패널 종이, 이건 ‘반대’ 측 패널 종이, 이건 ‘발언’ 패널, 이건 대회 때 줄 물이랑 사탕…….”

    “아니, 그러니까 이걸 왜 우리가 다 하고 있냐는 거죠. 은장이랑 다른 애들 안 와요?”

    그 말에 박 선생이 나를 흘겨보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월요일에요?”

    “네, 우리 학교에서 엄~청 잘나신 선생님께서 글쎄, 월요일에 학부모 참관 수업을 연다는 거 있죠?”

    “아…….”

    이 녀석들이 진짜.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하려고 그러고 있대요?”

    “당장 다음날에 영어토론대회인데 내일 애들 수행평가 발표 끝나고 시간, 체력 다 되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애들이 글쎄 그 선생님 도와줘야 하니까 못 오겠다고 하는 거예요.”

    박 선생은 이제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최대한 참으려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 준비하기에는 억울하고, 아니 일이 많으니까 제가 일부러! 우리 유~능하신 강.명.문. 선생님께 도움을 청한 거죠.”

    그렇게 말하며 박 선생은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기세에 눌려 뭐라 반박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고 다시 종이들을 돌아봤다.

    “하, 하하……. 그러게요, 애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하나 모르겠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패널별로 간식과 생수를 봉지에 넣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바로 세팅만 하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뒤에서 악마 같은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서 부지런히 움직인 건 절대 아니다.

    “오늘 이것만 하면 준비 다 끝나죠?”

    “네, 주제는 제가 미리 알려 줬으니까 답변 녹음만 잘하면 돼요.”

    주제인 ‘기술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과연 영어로 잘 발표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저도 가서 봐도 되나요?”

    “아니요. 애들 마이크는 잘 나오는지, 혹시나 기절하는 학생은 없는지, 녹음은 잘 되는지, 평가자들 책상 엎어져서 다치지는 않는지 등등! 그런 것들 챙기셔야죠?”

    날이 설 대로 선 박 선생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애들이 내 수업 준비한다고 대회 준비를 빠진 때부터 주말 근무가 확실시되었을 테니 박 선생의 짜증도 이해는 갔다.

    “하…… 그래도 끝이 보이네요. 참관수업 준비는 잘되고 있으세요?”

    박 선생이 접던 패널 종이를 박스에 넣으면서 물었다.

    “준비랄 게 있나요. 하던 대로 하려고 합니다.”

    “아주 자신감이 철철 넘치셔서 좋겠…….”

    “그만…… 제가 잘못했어요…….”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그녀에게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시즌 일들이 정리되면 고기라도 한번 사야 할 판이었다.

    내 모습에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박스를 구석으로 밀었다.

    “그런데 진짜 괜찮겠어요? 학부모회장이 누군지는 아시죠?”

    “명천이 어머니인 거야 당연히…….”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요.”

    박 선생은 박스를 밀던 손을 털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학부모회장 신주연. 나명천의 어머니. 극성 중의 극성인 학부모로 아버지는 서울한국대 의대 출신에 압구정 성형외과 병원장. 그래서 의대를 고집하지만, 명천이 실력이 상위권이기는 해도 지방 의대조차 가기 힘든 성적. 학부모는 이걸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교장과 교감을 구워삶았다, 이 말이군요.”

    나는 박 선생의 이야기를 잠깐 끊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교감이 저번에도 쩔쩔맸던 거고.”

    “맞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명천이 수행평가 점수를 높게 받으려고 하실 거예요.”

    “그건 괜찮습니다. 방법이 있어요.”

    아마 학부모회장은 이번 수행평가를 빌미로 명천이에게 불리한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한 번 더 불법적인 행동을 하려고 할 터였다.

    과거 명천이의 입시 결과가 어떠했고, 그에 따른 대가가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그런 방법으로 가면 안 되고.’

    한목대 특강까지 들을 후에 명천이는 정공법으로 의대 입시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만약 편법으로 준비하려 한다면 막아야 했다.

    ‘의대 합격생 DB는 꼭 필요해.’

    분반 인원이 애매하다 보니, 3학년 3반에는 이과생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들어 있었다. 탐구 수업, 수학 수업 때만 다른 반에 가서 수업을 듣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반에 있는 학생들은 다들 문과 위주였다.

    하지만 입시 결과에 있어서 인문, 자연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문계열 합격생 사례가 있다면, 자연계열 합격생 사례도 있어야 했다.

    게다가 그 합격생이 의대생이라면, 학교 내에서 내 입지는 더 굳건해질 게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나를 보면서 박 선생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 잠깐 명천이는 뭘 준비해 올지 궁금해서 생각 좀 해 봤습니다.”

    박 선생은 한숨을 푹 쉬면서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솔직히 이제는 걱정되기도 해요. 근 한 달 만에 여러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래도 선생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을 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무엇이 필요한지는 입시적인 관점에서는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는 없었던 동석이 대회라든가, 지금 같은 토론대회 준비라든가 하는 일은 별개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부모 참관은 평소 하던 대로 수업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럼 나머지도 마저 정리하고 들어갈까요?”

    나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종잇조각과 문구용품을 정리했다. 박 선생은 테이블을 물티슈로 닦으면서도 여전히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헤어지기까지 나는 계속 잔소리를 들었고, 그걸 반박했다.

    * * *

    “너 진짜 괜찮겠어?”

    잔소리는 참관수업 당일인 월요일 아침에도 이어졌다.

    지석 선배가 출근하는 나를 붙잡으면서 교문으로 향하지 않고 카페 옆 구석으로 끌고 갔다.

    “지금이라도 가서 잘못했다고 해! 학부모회장한테 잘못 찍히면 학교생활 못 한다고!”

    “그래 봤자 3학년이잖아요, 이제.”

    “명천이 동생이 중3이잖아! 내년에 우리 학교로 오면 어쩌려고 그래!”

    “진짜 괜찮다니까요.”

    명천이 동생은 과거에 우리 학교가 아니라 영광여고로 진학했었다. 내가 별로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선배, 저보다 찬오 좀 신경 써 주세요.”

    “찬오는 왜?”

    “정석이네 어머니가 찬오네 어머니랑 친하다고 하니까 혹시 몰라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학교로 여유롭게 걸어갔다. 지석 선배가 뒤에서 당황해하며 따라왔다.

    “쌤 오늘 발표 저부터 할게요!”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정석이가 다가왔다. 녀석은 눈을 빛내면서 준비해 온 자료가 담겨 있는 USB를 보여 줬다.

    “진짜 회심의 작품! 제가 쌤 체면 다 세워 드릴게요!”

    “부모님 설득은 했어?”

    내 말에 정석이가 USB를 들고 있던 손을 축 내렸다.

    “부모님 설득하려면 이번 내신 점수 잘 나오고, 7월 학평-전국연합학력평가-도 잘 봐야 하는 거 알지? 내 걱정 말고 네 일부터 챙겨.”

    시무룩해진 정석이 뒤로 은장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쌤, 쌤! 그럼 제가 먼저 할게요!”

    “발표는 번호 순서대로 한다고! 금요일에 공지했잖아!”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르자 은장이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너 주말에 대회 준비도 내팽개치고 수행 준비했다며?”

    “네!”

    “뭘 잘했다고 네 야! 스탭 일은 제대로 해야 생기부에 뭐라도 적어 줄 거 아니야. 메모지에 활동 내용들 정리는 했어?”

    은장이는 들고 있던 손을 내리더니 정석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요…….”

    나는 머리를 숙인 두 녀석에게 뭐라 한소리 할까 하다가 출석부로 등을 팡 때렸다.

    “얼른 들어가. 출석 부를 거니까.”

    그날 하루는 정말 피곤한 하루가 되었다. 출근길에도 그렇고, 쉬는 시간에도 그렇고 다들 나를 걱정했다. 심지어 점심시간에는 한 교감까지 나를 찾았다.

    “강 선생. 오늘…….”

    한 교감이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 진짜 저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초임교사한테 다 맡기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말이지.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

    학부모회장 앞에서 내가 한 말을 꺼내고 팔아먹은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에 코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감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나, 나만 믿으면, 괜찮을걸세! 허허.”

    5교시가 되면서 슬슬 학부모참관에 대한 불안감이 다가왔는지 학생들이 동요했다.

    “아, 우리 엄마 오면 어떡하지.”

    “발표 뭐로 할 거야?”

    “나 집에 책이 없어서 주말에 서점 갔다 왔잖아.”

    “난 만화책으로 하려다가 참았어.”

    “만화책으로 해도 되는데?”

    우리 반, 3반의 학생들이 수행평가를 주제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사이로 내가 스윽 다가갔다.

    “쌤 만화책도 괜찮아요?”

    “원피스, 드래곤볼 다 괜찮은데? 물론 그 안에서 의미는 제대로 찾아와야겠지?”

    내 말에 만화책으로 할걸, 하는 학생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오늘 수행평가 본다고 했지? 순서대로 발표한다.”

    출석부를 펼치고 교탁 위에 핸드폰 초시계를 켰다. 그리고 첫 번째 학생을 불렀다.

    “김은장, 앞으로.”

    은장이가 자기가 제일 나중에 해야 한다며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나는 미리 세팅해 둔 컴퓨터에 USB를 넣고 은장이의 PPT를 열었다.

    “제가 준비한 책은 카피라이터인 박웅천 님의 <인문학과 광고의 세계>입니다.”

    은장이는 자신의 희망 진로인 광고계에 딱 맞는 도서를 준비해 왔다. 준비해 온 PPT도 깔끔했다. 첫 장은 제목과 발표자 이름으로 표지를 만들었고, 두 번째 장에는 책 표지와 함께 저자 소개를 적어 두었다. 세 번째 장에는 인상 깊었던 구절과 함께 인문학을 활용한 광고 사례 포스터를 보여 주었다. 네 번째 장에는 책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적었다.

    ‘마지막 장은 감사합니다 한 문장으로 마무리. 딱 맞췄네.’

    은장이는 주어진 PPT 분량도 맞췄고, 발표 시간도 1분 40초로 적당하게 마무리했다.

    게다가 중간에 활용한 인문학을 토대로 광고를 만든 사례까지 덧붙였다.

    친구들의 질문도 어렵지 않은 질문들뿐이었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또 다른 사례는 없는지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은장이는 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냈다.

    ‘김은장: 1분 40초, PPT 5면, 발표 깔끔, 질문 답변 완료, 내용 일관성 오케이.’

    은장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명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문이 드르륵 열렸다.

    열린 문으로 학부모회장과 함께 다른 학부모 4명과 한 교감이 들어왔다. 한 교감이 문을 닫고 숨을 골랐다.

    “오늘 수업은 학부모 참관수업입니다. 임시로 열게 되어서 몇 분 오시지 못했지만, 우리 강문고와 여러분의 발전을 위해 귀한 시간 내주셨습니다. 다들 평소처럼 열심히 수업 들으면 됩니다.”

    학생들의 눈빛에 긴장감이 서렸다. 한 교감은 그 말을 끝으로 교실 끄트머리에 숨은 듯이 자리했다.

    “수업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한 교감의 동의를 얻고, 학부모회장을 쳐다봤다. 학부모회장은 살기가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데 살짝 보인 액정이 켜져 있는 것도 같았다.

    ‘영상을 찍으시겠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발표자를 호명했다.

    “나명천, 앞으로.”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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