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21화 (21/252)

21화. 강진 어르신

“자,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한 교감이 나에게 뭔가 잔소리를 하려는 찰나, 이사장이 손을 들었다.

“강진 어르신을 어떻게 한다고요?”

“저희가 준비하는 대회는 유명한 위인분들 역할을 각자 맡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답변하는지 겨루는 대회입니다. 예를 들면, 정약용의 역할을 맡은 학생은 미래 기술 발전 문제에 대해 실학을 중점으로 발표해야 하는 식입니다.”

내 말에 이사장이 꽤 재미있을 것 같다며 눈길을 보냈다. 강 교장과 한 교감이 이사장의 눈치를 보더니 크흠, 헛기침을 했다.

“강 선생,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하지 그랬나. 그랬으면 내가 이사장님에게 바로 보고를 올렸을 텐데.”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내가 꾸벅 몸을 숙이자, 이사장이 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격려를 해 주었다.

“아뇨, 바로 저한테 이야기하기를 잘했어요. 젊은 선생님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우리 학교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거예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성공할 계획은 있는 거죠?”

이사장은 수행비서의 재촉을 한 번 더 뿌리치고는 팔짱을 꼈다.

“알다시피 강진 어르신은 우리 집안에서나 유명한 분이지, 일반 학생들은 잘 모를 거예요.”

“그게…… 저한테 강진 어르신을 포함하자고 의견을 준 사람이 사실 저희 반 학생입니다.”

지난 주말, 영어 토론대회 준비로 모였던 인원들끼리 잠깐 인문융합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때 우리 이야기를 듣던 은장이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여기 학교 설립자 할아버지도 포함시키면 재밌겠는데요?]

은장이의 말에 다들 뒤로 넘어가라 웃었고, 동석이는 그게 누구냐면서 물었다. 민주는 할아버지 성대모사를 하면서 장난을 쳤다. 한참을 웃다가 다시 영어 토론대회 준비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없던 일로 넘어갔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게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 학생이 있었어요?”

“네. 그래서 한번 포함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선생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진행하는 거라면 이사장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학생이 요청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강진 어르신을 선택하는 학생이 한 명은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선수로는 강진에 대해 알고 있는 은장이가 나가면 완벽했다.

“그래요. 재미있겠네요.”

그리고 예상대로, 이사장은 학생의 요청이 있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서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대회가 언제죠?”

“현재 예정으로는 7월 9일입니다. 기말고사 끝나고 며칠 후입니다.”

“그때 되면 알려 줘요. 나도 한번 보고 싶네.”

이사장이 대회에 참관하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강 교장과 한 교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장님, 스케줄도 바쁘실 텐데 일정을 한번 보시고…….”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애교심이 넘치는데, 어떻게 이사장이 가만히 있겠어요? 내가 상품권도 기부할 테니까 잘 준비해 오라고 해 주세요.”

아예 작정하고 말하는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뒤에서 수행비서가 다가오더니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7월 9일 금요일 대회 참관, 메모해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다른 일정 있나요?”

“이날은 오전 일정 이후 점심에 S기업 사장님과 미팅이 있습니다.”

“잘됐네요. 대회 시간은 오후겠죠? 방과 후일 테니까요.”

“네, 오후 4시 예정입니다.”

그 말에 이사장이 빙긋 웃으면서 다시 가방을 들었다.

“그날 점심 먹고 바로 올게요. 저녁 일정은 전부 비워 둘 테니까 대회 시간도 너무 부담 갖지 말고요.”

이사장은 수행비서에게 가방을 건넸다. 수행비서가 그 가방을 건네받았고, 이사장은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강명문 선생님?”

“네, 이사장님.”

“잘 준비해 봐요. 이런 대회 여는 거 처음일 테니까.”

이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준비해둔 차량에 탑승했다. 수행비서가 문을 닫고 운전을 하기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지.

역시 이사장에게 접근한 건 너무 성급했나.

온갖 생각이 뒤섞일 때, 한 교감의 말이 나를 깨웠다.

“강 선생, 강 선생! 자네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아, 어, 네, 교감 선생님.”

한 교감의 옆에서 강 교장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왔다.

“누, 누님, 아니 이사장님이 학교 행사에 참여하신다고?”

“자네! 지금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아는 거야?”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인가? 싶어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준비 좀 빡세게 해야겠습니다.”

“빡센 정도가 아니야! 이거 진짜 제대로 준비해야 해! 지금까지 십 년간 학교 행사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분이라고! 그런 분이 자네가 준비하는 대회 하나 보겠다고 스케줄 다 뺀 거잖아!”

이사장이 학교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사실 대단할 건 없었다. 그런데도 교장과 교감이 이렇게 난리법석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이사장에게 무언가 잡혀 있어서겠지.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두 분께서’ 도와주신다면 학교 위상도 높이면서, 더없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격하게 흥분하다가 이제는 속을 삭이던 두 사람은 내 말에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내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암, 그래야지! 우리 강 선생이 잘해 보게!”

한 교감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밝게 웃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결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는 교장과 교감을 보면서, 아무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민지정 있나?”

한명심은 교감실로 돌아와 방금 강명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큰 성과’라고 했다. 이 성과는 자신이 교감에서 교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네.”

“들었나? 아까 이야기들.”

민지정도 어쨌든 부장이었기 때문에 감사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때문에, 방금 강명문이 밖에서 이사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히는 듣지 못했다.

“그 녀석, 이사장을 휘어잡으려 하더군.”

“이사장님을요?”

한명심은 황당하다면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놓인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안에 든 사탕을 입에 쏙 넣었다.

“무슨 역사 속 위인으로 시사 토론을 하는데, 그 위인으로 강진을 넣겠다고 하네.”

민지정은 강진이 누구인지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사장과 관련된 인물이 생각났다.

“설마 강진이라는 사람이 강문고의…….”

그녀의 말에 한명심은 입에서 사탕을 굴리면서 쩝쩝거렸다.

“그래. 여기 설립자야.”

그 말에 민지정이 숨을 삼켰다.

강진이라면 강문고의 설립자이면서 강은숙 이사장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강 선생이 지금, 그분을 대회 주제로 삼겠다고 한 겁니까?”

“그리고 이사장님이 그 대회를 참관하시겠다고도 했지.”

민지정은 강진을 주제 위인 중 하나로 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놀랐다. 이사장은 학교에 큰 관심이 없었고, 가끔 무언가 사안이 있을 때만 학교를 찾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초임교사가 준비하는 대회에 참관하겠다고 한다.

“강 선생이 이사장님하고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한명심은 그녀의 질문이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됐어. 어쨌든 이번 일로 강 선생은 이사장을 휘어잡을 계획이야. 그리고 거기에 내 지분도 들어가게 될 거고.”

이제 입안의 사탕이 다 녹아내렸는지 한명심은 공허하게 입맛만 다셨다.

“교감 선생님의 지분이요?”

“아직도 모르겠나? 강 선생은 이번 대회로 나와 이사장님, 거기에 강철면 교장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 제대로 라인 타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 말을 하는 한명심의 입가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실룩거렸다.

민지정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헉 그럼, 최근 3주간의 일이 전부…….”

“그 녀석은 나 하나만 잡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거야. 기분은 조금 상하긴 하지만, 내가 강 교장이랑 이사장보다 파워가 부족한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여기서 무서운 건 말이지…….”

한명심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민지정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민지정이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녀석이 자신만만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번 일을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겠죠.”

“……앞으로 더 두고 봐야지.”

한명심은 마지막에 민지정에게 말하지 못한 자신의 해석을 삼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민지정은 그런 교감을 보면서 조금 의아해했지만, 의심하지는 않았다.

‘녀석이 노리는 게 정말 그거라면…….’

자리에 돌아와 앉은 한명심은 강명문이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렸다.

[‘두 분께서’ 도와주신다면…….]

그때 강명문은 분명 ‘두 분께서’를 강조했다. 이번 대회를 돕는다면 강 교장과 자신에게 무언가 이득이 된다는 뜻이었다.

만약 강명문이 말하는 게 그 뜻이 맞다면…….

‘강명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오랜 교사 생활의 판단으로 한명심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 초임교사 역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줄 부하직원이 될 것이라고.

* * *

‘아 씨 꼬였네.’

이사장과 만나고 온 나는 곧장 은장이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은장이에게 강진 역을 맡아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분명 먼저 강진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설령 잘 모르더라도, 은장이 정도 되는 발표 실력이면 임기응변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 계획이 무너진 건 박 선생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박 선생은 교무실 안에서 나와 이사장, 교장, 교감과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교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이것저것 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애들이 강진이라는 사람은 잘 모를 텐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나는 그 물음에 호기롭게,

“은장이가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은장이 시켜야죠.”

라고 답했고.

“은장이는 스텝이라서 대회 참가 못 하는데요?”

그녀의 쐐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애초에 스텝 시키려고 했던 거기도 하고…….”

은장이는 지금 수상보다 중요한 게 스텝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 토론대회 이외에도 시사RPG대회 역시 은장이에게 스텝을 요청했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원래 내 계획은 이사장이 대회에 참관하는 것까지 생각해서 은장이를 선수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장이가 참가하지 못 한다면?

‘대안이 없는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누구를 내보내야 하나 고민했다.

만약 이 대회에서 강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사장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 자기 조상을 놀잇감처럼 삼았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까.

나는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핸드폰을 열었다. 채영이, 태성이, 정아……. 아무리 봐도 이번 대회에 적합한 녀석이 없었다.

‘어?’

그러다 문득, 나는 핸드폰을 만지던 손가락을 멈췄다.

대회 스텝도 아니고, 발표력도 괜찮아서 임기응변도 좋고, 동석이의 발표 스승으로 시키려 했던 녀석.

‘이정석이랑…… 동석이?’

시사RPG대회의 참가 인원과 방식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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