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사랑이 너무해 (2)
미란이가 들고 있는 본인의 핸드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 여자친구는 내가 납치했다.>
그리고 문자에는 이렇게 적어뒀다.
<부모님에게 들키기 싫으면 후딱 전화해라.>
딱 두 문장이었지만, 정석이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정석이의 목소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효령대군묘요.]
효령대군묘는 강문고에서 버스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역사유적지였다. 아침에 오픈하자마자 어디 올라가서 자연을 만끽하고 있을 정석이를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인마, 해외로 떠나게 됐다고 무단결석을 해? 빨리 학교로 안 튀어와!!”
[……어떻게 아셨어요?]
“오면 이야기해 줄 테니까 빨리 와라. 나도, 미란이도 시간 별로 없다.”
내 말에 정석이는 대답이 없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르자 정석이가 말했다.
[……곧 갈게요.]
전화를 끊고 20분쯤 지나자, 정석이가 교무실로 들어왔다.
“딱 대.”
쭈뼛쭈뼛 서 있는 정석이의 이마를 확 넓힌 후 딱밤을 때렸다.
“아야!”
“몽둥이 안 들고 온 걸 다행으로 알아라. 미란이한테 빨리 사과 안 해?”
내가 가리키는 곳에는 거의 울기 직전인 미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정석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해.”
정석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란이를 안아 주었다.
“이제 슬슬 떨어지지?”
내 말에 둘은 민망한 듯 몸을 떨어뜨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미란아, 도와줘서 고맙다. 일단 학교로 가 봐, 너도.”
“그래도…….”
미란이는 여전히 불안하다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야. 정석이랑 먼저 이야기 나누고, 정석이 통해서 전달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라. 잘못해서 너까지 학교에 찍히면 큰일 나. 알겠지?”
지금 시점에서 만약 미란이가 금광여고에서 안 좋은 이미지라도 박히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왜냐면, 이제부터 공략해야 할 대상은 정석이와 정석이 부모이기 때문이다.
“네…… 이따 연락해야 해, 알았지?”
교무실 밖으로 나가는 미란이를 보면서 나는 정석이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정석이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튀니지로 가냐?”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정석이의 아버지는 제법 규모가 있는 중소철강업체의 대표였다. 게다가 어머니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다. 최상위층 수준의 부자는 아니었지만, 정석이도 은수저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미국까지 보내기에는 자금 사정보다도 자식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잘만 하면, 아버지 사업 지부를 중동지역으로 넓힐 수도 있을 거고.
어떻게 보면 황금빛 미래가 보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학 가면 안 된다.”
“왜요?”
“그런 게 있어. 가서 자리 잡고 직장도 구하려는 거 아냐?”
“거기서 아버지 사업 이어 갈 것 같기는 해요.”
과거의 기억과 딱 맞아떨어져서 상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너를 왜 해외로 보내려 하시는 것 같냐?”
“제가 공부를 안 해서…….”
“알긴 알아?”
“네. 그래도 이렇게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보내 버리려고 하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작년에만 해도…….”
정석이는 자신이 억울하다며 항변을 이어 갔다. 나는 정석이의 이야기를 잠깐 듣다가 책상을 두들겼다.
“알았어, 알았어. 지금 네 하소연 듣자고 그러는 건 아니야. 몇 가지만 묻자.”
정석이의 말을 끊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란이 좋아하냐?”
“네???”
“대답해.”
“……네.”
“유학 안 가고 미란이랑 한국에서 같이 대학 생활 하고 싶어?”
“네.”
“그럼 됐어.”
“네?”
멍청하게 되묻는 정석이에게 대답하지 않고 정석이의 6월 모의고사 성적표와 학교생활기록부를 인쇄했다.
복합기에서 나온 인쇄물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모평 때 잤냐?”
“저 열심히 풀었습니다, 쌤.”
모의고사 점수와 학생부를 번갈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약간 아슬아슬한데, 괜찮으려나?
“논술 공부해 본 적 있어?”
“그냥 기출문제만 풀어 본 수준이에요.”
“특강 열면 들을래?”
나는 모의고사 성적표와 학생부를 녀석에게 보여 주면서 흔들었다.
“미란이랑 한국에서 대학 생활 하고 싶다며.”
“네.”
“그럼 어설픈 대학교에 가 봐야 부모님이 인정이나 해 주겠어?”
“그런 부모님, 인정 안 받아도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녀석의 태도 변화에 어이가 없었다. 정석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래서는 안 됐다.
“부모님이랑 소통하기 힘든 거 알아.”
정석이는 대답이 없었다.
“너 공부시킨답시고 대치동으로 이사 온 것도 알아.”
이번에는 정석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하고 돌아오시면 피곤하셔서 너랑 이야기도 못 하시고, 그러다 보니 네가 밥도 차려 드리는 사실도 다 알아.”
이제 정석이는 주먹을 꽉 쥐기까지 했다.
정석이의 부모님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는 있었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바로 그 둘의 학벌이었다.
아버지는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교를 나왔고, 어머니는 방송대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IMF 이전에 자리를 잡은 직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결과 지금의 자리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식에게는 학벌을 쥐여주고 싶었다. 대치동으로 이사를 온 것도, 튀니지로 유학을 보내려던 것도, 자식이 학벌로 천대받는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나는 테이블에 종이들을 올려 두고 손을 얹었다.
“부모님은 널 좋은 학교 보내고 싶어서 여기로 이사를 온 거야. 이 동네 이사 오는 게 쉬운 줄 아냐?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버시는 거야. 근데 넌 미란이와 연애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했어. 그 결과 명문대에 진학할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했지. 그래서 부모님이 유학을 보내려고 하셨고.”
정석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가 미란이를 좋아하고, 같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겠냐?”
“……쌤. 그건 불가능해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봐.”
대답을 망설이던 정석이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해야 해요.”
알고 있다. 지금 정석이는 자신의 모의고사 성적표와 학생부를 보면서 한 번 더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성적으로는 명문대는커녕 인서울이나 경기권 주요 대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로 6월 모의고사 점수는 평균 3.2등급이었고, 심지어 수학은 5등급, 영어는 4등급이었다.
그래도 국어는 1등급이어서 위안이 되었다.
물론 명문대에서 국어 하나만 가지고서 입학시키는 경우는 없긴 하지만.
“미란이는 공부 좀 하냐?”
“미란이는 저보다는 잘해요.”
“어디가 목표인데?”
“연희대요.”
정석이의 말에 잠깐 놀랐다. 미란이는 생각보다 공부를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너보다 많이 잘하는데? 공부 배워 본 적은 없어?”
“쪽팔리게 어떻게 여친한테 배우겠다고 해요…….”
나는 들고 있던 모의고사 성적표를 돌돌 말아 정석이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아야!”
“지금 자존심 세울 때야? 가장 가까운 스승님이 있구만, 그걸 안 하려 그래? 내가 미란이였으면 쪽팔려서 남친 안 한다고 했겠다.”
“미란이가 쌤 같은 사람이면 저도 안 사귀어요.”
“이게 끝까지 말대꾸지?”
돌돌 말은 모의고사 성적표로 책상을 팡팡 쳤다. 그 기세에 정석이가 다시 긴장을 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 논술 준비해라.”
“논술은 해 본 적도 없는데요?”
“올해는 논술에 집중, 내년에는 논술과 재수 생각해. 올해 수능은 논술 최저만 맞춰.”
처음부터 재수까지 이야기하는 나를 보면서 정석이가 황당해했다.
“아니, 무슨 벌써 재수 생각을 해요?”
“너 유학 가면 바로 대학교 갈 수 있을 것 같냐? 진짜 튀니지로 가면 아랍어 공부도 해야 하는데? 아랍어 할 줄은 알아? 어설프게 유학 가서 1, 2년 날리느니 재수해서 국내 대학 들어가는 게 낫지, 안 그래?”
역시나 대답을 못 하는 정석이에게 미리 인쇄해 둔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정석이와 상담하려고 준비해 둔 입시 자료들이었다.
“여기에 2010-2009 전형 모의논술, 논술 기출문제들이 있어. 인문사회로만 해라. 경제 들어가는 학과로 준비하면 답 없어, 알지?”
어느새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는 정석이를 보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목표대학교는 성실성대다.”
“네? 제가 거기를 어떻게 가요?”
“너 논술 준비만 빡쎄게 하면 가능해. 지금까지 공부 제대로 안 했잖아. 그리고 최저는 지금도 맞출 수 있을 거야.”
정석이에게 이번 6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펼쳐 보여 주었다. 돌돌 말려 있어서 정석이가 양손으로 종이를 붙잡았다.
그 종이 위로, 펜을 들고 와서 정석이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국어 1등급, 수학 5등급, 영어 4등급, 탐구 두 개 3등급이잖아? 그런데 여기를 봐.”
내가 가리킨 성적은 한문이었다.
“한문 1등급.”
“비주류 교과목인데 이게 중요해요?”
“당연하지, 성실성대 논술에서 일반선발 같은 경우에는 수능 최저가 탐구 대신 제2외국어/한문으로 평가될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성실성대 모집 요강 자료를 모니터로 보여 주었다. 그 뒤에 곧장, 논술 수능 최저 기준 요건을 보여 주었다.
<일반선발 인문: 국어, 수학, 영어, 사탐/과탐(1과목) 중 3과목 합 6 이내. 사탐 1과목은 제2외국어/한문 1과목으로 대체 가능함.>
자연계열이나 의학계열 학생들은 몰라도, 인문계열 학생들에게 성실성대 논술은 수능 최저를 맞추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특히 탐구보다 제2외국어가 잘 나오는 학생이라면 더더욱 기회가 되었다.
바로 지금의 정석이처럼 말이다.
정석이가 국어와 한문에서는 1등급이 나오기 때문에, 남은 4등급을 영어와 수학 중에서 채우면 최저 요건은 충분히 맞출 수 있었다.
“최저 목표 과목은 국어, 한문, 수학이야.”
“영어가 아니고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야기했다.
“입시 논술은 논리적 사고능력을 평가해.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하지 않아. 문장력보다 중요한 건 글을 분석하는 능력이야. 그래서 국어 1등급인 정석이가 가능성은 있어. 대신 논리적 사고력은 수학 공부를 놓는 순간 감 떨어진다. 그러니까 수학을 우선적으로 노리고, 영어도 공부해. 수포자 하면 안 되고.”
정석이는 어느새 메모지를 꺼내서 열심히 적고 있었다. 양손 가득했던 기출문제 자료집은 책상 한쪽으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지금부터는 책을 많이 읽도록 해라. 다른 책보다 인문학책을 읽어. 거기에 나오는 이론들이 논술 지문으로 많이 나오니까.”
“네, 알겠습니다. 근데 경영계열은 안 되나요?”
“수리논술 있어서 안 돼. 일단 인문과학계열 입학을 목표로 하고, 나중에 복수전공이든 뭐든 노려. 그리고 우선선발을 노리는 것도 좋지만, 올해는 욕심부리지 말자. 일반선발로 준비하고, 내년에는 우선선발을 노리면 돼.”
“왜요?”
“우선선발은 수능 최저가 국수영사 중 3개 합쳐서 4 이내야. 백분위 합도 190이 넘어야 해. 그리고 논술 점수 비중도 70%나 되고. 붙으면 진짜 네가 천재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잘했거나.”
물론 여기서 가르치는 사람은 내가 될 거고.
나는 그 말은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정석이에게 수업 하나를 추천했다.
“조만간 논술 특강 오픈할 거니까 그거 신청해.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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