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6화 (16/252)

16화. 사랑이 너무해 (1)

“미란아!”

정석이는 손을 흔들면서 미란이라는 여학생의 손을 잡았다. 둘은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마주 보았다.

……아 소름 돋아.

누구는 회귀하기 전까지도 십 년 넘게 연애 못 하다가 연애 세포 사망한 지 오래였건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지금 어디 신성한 학교에서 연애질을.

내 마음이 꼰대처럼 변해 가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선생님, 뭐 하세요?”

교문을 나서려던 박 선생이 뭔가 재밌는 게 있냐면서 다가왔다.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 주의를 줬다.

내 수신호에 박 선생도 옆 화단으로 몸을 숨겼다.

“얼른 가자. 쌤들한테 들키면 피곤해져.”

정석이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미란이에게 말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그 둘의 뒤를 첩보영화처럼 미행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담벼락과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이동하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톰 크루즈 부럽지 않게 움직이는 나를 보며, 박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미행은 보기 안 좋아요.”

교문을 이제 막 나서는 순간, 박 선생이 말했다. 열심히 움직였지만 이제 막 교문을 나온 뒤였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태연하게 웃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저도 마침 저 방향으로 갈 일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절대 어린 학생들이 연애질로 염장 긁는 걸 못 참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충분히 못 참으시는 것 같은데요?”

박 선생이 은근슬쩍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안 가세요?”

“네? 같이 가시게요?”

“그래야죠. 미란이는 저도 좀 보고 싶네요.”

“아는 학생인가요?”

그녀는 내 물음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박 선생이 아는 학생이면 나도 모를 일이 거의 없을 텐데 이상했다. 내 기억 속에서는 미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10반에 한 명 있었지만, 저 얼굴은 아니었다.

“설마 화장했다고 얼굴이 바뀌었나?”

“선생님 생각하시는 10반 애가 아니에요.”

“그럼 다른 학교 학생인가요?”

“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강문고 오고 며칠 안 있었던 학생이에요.”

“전학을 갔나요?”

박 선생이 살짝 눈을 감으며 맞다고 답했다.

우리가 부임하자마자 전학을 간 학생이면, 내가 모를 만도 했다.

“아무튼 저는 절대 미행하는 거 아닙니다. 저쪽에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생겼거든요.”

이 시점에서는 주변에 카페거리가 생긴다면서 이런저런 가게들이 생기는 시기였다. 실제로 그런 카페에는 데이트를 즐기기 위한 학생들로 가득했다.

“어머, 저도 그 디저트 가게 어디인지 알아요. 카페 다온 아니에요?”

“선생님도 아십니까?”

“그럼요. 요즘 넷에서 유명하죠.”

그렇게 말하던 박 선생이 먼저 앞장서더니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이 계획이 아닌데, 싶으면서 멀어지는 정석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자 이제 카페 골목으로 변화하고 있는 거리가 나타났다.

몇 개의 카페들이 귀여운 인테리어를 하고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석이는 여자친구인지 썸인지를 모를 여학생을 데리고 이제 막 오픈 이벤트를 시작하고 있는 마카롱 가게에 들어갔다.

잠깐, 정석이 표정이 굳어 있었는데?

좀 더 가까이서 둘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가게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가게가 너무 좁아서 우리가 들어가면 들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네요. 테이크아웃 하면서 잠깐 봐 볼까요?”

나는 마카롱 두 개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물어보지도 않고 주문하기 있어요?”

“말도 없이 따라오셨으면 그냥 드시죠.”

“제가 길 안내했는데요?”

“저도 이 가게 알고 있습니다.”

“언제 와 보셨어요?”

“얼마 안 됐어요.”

“데이트하러 오셨어요?”

“…….”

쏟아지는 질문 세례 중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데이트……로 와 본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회귀하기 전의 이야기였다. 물론 사귀던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소개팅 에프터 정도였는데, 그리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답변을 곧장 하기가 어려웠다.

“…… 혼자 와 봤죠. 당연히.”

“그쵸? 선생님도 아직은 솔로이실 것 같더라고요.”

이 여자가 진짜. 나는 손아귀에 힘을 꽈악 쥐면서 그녀를 흘겨봤다. 박 선생은 그저 깔깔 웃더니 점원이 내주는 음료와 마카롱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가 질문 세례 때문에 놓쳤던 결제에 적립 도장까지 찍었다.

“선생님이 쏘시게요?”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반띵이죠. 계좌 알려 드릴 테니까 거기로 넣어 주세요.”

공짜 음료라고 잠깐이나마 들떴던 내가 바보지.

박 선생으로부터 음료를 받아들고 정석이와 여학생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어째 정석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세상 이런 행복한 일이 있을까 하고 있던 정석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뭔가 있나 본데요.”

“그러게요. 아, 일어난다!”

우리는 재빨리 카페 건물 옆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머리만 빼꼼 내밀고는 정석이와 여학생이 나온 길을 확인했다.

상세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석이는 여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란이도 미안하다면서 울고 있었다.

“…… 서로 미안하다면서 우는데 이게 무슨 경우죠?”

“선생님, 연애 안 해 봤죠?”

“무슨 소립니까. 제가 뭘 안 해 봐요. 이래 봬도 제 뒤를 따라다니는 여자만…….”

“그럼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 차였겠네요. 맞죠?”

뭔가 화가 잔뜩 나고 있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시점의 나는 모쏠이어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회귀하기 전에는 연애 좀 했었다고. 한 손가락 정도로는.

……물론 박 선생 말처럼 백 일을 넘긴 건 딱 한 번뿐이었고.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아무튼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겁니까?”

“불가항력이 있는 것 같아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둘 다 화가 난 상태는 아니어서 누군가 바람을 피운 건 아닐 거예요. 부모님 때문에 헤어지는 건 드라마에나 있는 이야기니까 패스하고요.

그렇다고 이사를 가거나 해서 헤어짐에 아쉬워하지는 않겠죠.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요즘 세상에 원거리 연애는 흔하니까요. 해외로 나가면 모를까.”

“해외로 나갈 겁니다.”

무슨 소리냐며 나를 추궁하는 박 선생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요점만 이야기했다.

“정석이, 해외로 유학 간다고 했을 겁니다. 아마.”

“그런데 미란이가 왜 미안해해요?”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골목에서 몸을 빼냈다. 정석이와 미란이는 이미 장소를 옮겼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류 가방을 고쳐 들면서 박 선생에게 오늘 음료 감사했다고 인사했다. 계좌 보낼 거라는 박 선생의 뒷말을 못 들은 체하면서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정석이의 과거가 내가 기억하는 부분과 맞다면, 지금 그 녀석 혼란스러워서 제정신이 아닐 거다.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정석이는 범죄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다.

그럼 범죄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담임 선생은…….

당장 월요일에 정석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과거 기억들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 * *

“이정석.”

정석이가 결석했다.

“이정석? 안 왔어?”

정석이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은장이가 핸드폰을 들면서 화를 냈다.

“이정석 왜 안 받아!”

“정석이 무슨 일 있냐?”

학급의 모든 학생들이 침묵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여러 가지 기억들을 정리했다.

“정석이랑 연락되는 사람은 바로 나한테 알려 주고, 학교 오면 당장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해.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

출석부를 후다닥 챙기고 교실 밖으로 향하면서도 정석이가 오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혹시……?

다행히 오늘 1교시와 2교시는 비어 있었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교문 밖으로 향했다.

“어어, 강 선생님, 어디 가십니까?”

교문 단속을 하던 추 선생이 나를 붙잡았다.

“혹시 교문 근처에서 서성이던 학생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한 명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이었나요?”

“머리를 뒤로 묶은 여학생이었는데, 키는 아마 150 중반 정도? 꽤 마른 학생이었고, 표정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얼추 기억과 맞아떨어진다.

“그 학생 금광여고 학생이었나요?”

“아, 네. 거기 교복 입고 있었으니까 맞을 겁니다. 그런데 강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어디로 갔습니까?”

추 선생은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카페 거리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 자리에서 추 선생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곧장 어제의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예상대로 그 앞에 어제 봤던 여학생, 미란이가 서 있었다.

“거기 학생.”

“네, 네?”

“정석이 여자친구니?”

내 말에 미란이가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이러면 내가 범죄자 같잖아.

“아, 놀랐으면 미안. 나는 정석이 담임 선생님인 강명문이라고 해. 오늘 정석이가 학교에 안 나와서 교문으로 나와 봤는데 다른 학교 학생이 근처를 서성이다 갔다고 해서…….”

“정석이 학교 안 나왔어요?”

미란이도 처음 알았는지, 나에게 되물었다. 이정석, 이 자식 여자친구한테도 비밀로 했냐.

“그래. 혹시 연락 온 거 없었니?”

“아침에 잠깐, 머리 좀 식힌다는 이야기 말고는 없었어요. 그래서 걱정돼서 와 봤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미란이는 금광여고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며 합법적 지각을 하고는 정석이를 찾으러 나온 것이었다.

‘강제 유학.’

정석이가 학교를 빠진 이유는 어제 나와 박 선생이 함께 봤던 그 장면이 이유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정석이는 해외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고등학교를 마치기 직전에 넘어가는 이유는, 정석이가 연애하느라고 공부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석이 부모님이 학생이 자퇴할 거고 검정고시를 볼 것이며, 해외로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아시라고 통보한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공부도 중간 정도는 하던 학생이 왜 갑자기 유학을 떠나나 했었다.

“미란아,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유학 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하필 녀석이 택한 지역에 문제가 있었다. 유학 준비를 하기 위해 등록했던 학원과도 문제가 발생해서 정석이가 결국 불이익을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알면서 방치했다는 이유로…… 언론에 두들겨 맞았었지.’

사학 비리 폭로 사건 때 언론들이 나를 깔아뭉개기 위해 사용했던 기사 제목들이 생각이 나서 괜히 소름이 돋았다.

‘막아야 한다.’

그런 정석이의 과거를 이번에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정석이는 유학을 가는 사실에 있어서 미란이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이 부분을 중점으로 녀석을 설득한다면, 유학 가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떻게요?”

미란이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석이를 부를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미란이를 학교로 데리고 왔다. 추 선생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비 아저씨에게는 적당히 현장체험이라고 둘러댔다.

“오랜만에 오지?”

“……어떻게 알았어요?”

“넌 기억 못 하겠지만, 1학년 때 내가 잠깐 가르친 적 있었어. 국어 담당이었는데.”

어제 박 선생에게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기억을 재구성해 봤는데, 얼추 먹힌 모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쌤.”

“그래, 다시 보니 좋네. 이제 정석이를 학교로 불러들일 거야. 핸드폰 좀 빌려줄래?”

나는 미란이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고 이야기했다.

“잠깐 저기 자리 앉아서, 그렇지. 어디 보자, 노트가…….”

미란이의 핸드폰에서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짧은 문장을 한 개 적고 미란이에게 핸드폰을 화면 보이게 들고 있으라고 했다.

“오케이, 거기 그대로 있어. 그럼 찍는다.”

그렇게 미란이는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는 모습 그대로 내 핸드폰 카메라 앨범에 저장되었다. 나는 그 사진을 정석이 핸드폰으로 짧은 문자와 함께 전송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쌤, 미란이 옆에 있어요?]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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