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5화 (15/252)

15화. 은신

한명심 교감은 자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떠들고 있는 강명문을 보며 생각했다.

‘끌어들여야 하는데…….’

한명심은 강명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김은장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 둘을 학교로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교사는 지금까지 한명심 본인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구슬려도 잘 오지도 않던 사람들을 어떻게?’

지난 2년간, 한명심은 은장이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를 학교로 초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 왔었다. 그건 당시 은장이의 아버지가 서울지검 부장검사에서 막 은퇴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인사차 계속 연락을 했었지만, 쉽게 학교를 찾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을 시켜서 당시 담임이었던 교사들에게 촌지 일부를 찔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와서, 그것도 한두 푼도 아닌 몇백만 원대의 촌지를 들고 왔다.

게다가 초임교사인 강명문은 그걸 거절했다.

‘내 초대는 다 거절했었는데 말이지.’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분명한 건 강명문 덕분에 김은장의 아버지, 김영훈을 만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명심은 내선 번호로 교무부장인 민지정 선생을 불렀다.

“잠깐 오게.”

갑작스러운 교감의 부름에 민지정이 급히 교감실로 들어왔다.

“네, 부르셨습니까.”

“교무부장. 강명문, 어떻게 생각하나?”

교무부장 민지정은 잠시 한명석의 의도를 생각하고는 답했다.

“초임이라 의욕이 넘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이번 최동석이나 김은장도 그런 식이었겠죠.”

“그래서 자네 생각은?”

“같이 가서 나쁠 건 없어 보입니다. 다만…….”

“돈 욕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네. 강 선생은 재물보다는 명예나 권력으로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민지정의 이야기를 들은 한명석이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자신 역시도, 강명문은 물질이 아니라 그 이외의 것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꽤 많은 돈이었을 텐데.’

김영훈이 강명문에게 건네려고 한 서류봉투. 그 봉투에는 족히 백만 원 이상, 아니 어쩌면 오백만 원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금액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명예는 아닐 거고…….”

강남 강문고 특성상 명예를 생각하고 일하는 교사는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새로운 가설을 떠올렸다.

‘혹시?’

그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다면, 강명문은 반드시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었다. 여전히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명문을 교감실 너머로 보면서, 민지정에게 말했다.

“작업 잘 쳐 봐. 잘만 하면 말년이 편하겠어.”

“네, 알겠습니다.”

* * *

어쩐지 등 뒤에서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에어컨을 너무 강하게 틀었나. 몸을 으스스 떨면서 나는 동석이의 대회 참가 계획서를 정리해 주었다.

“이 내용 맞냐?”

“네. 쌤 근데, 여기는 진짜 모르겠어요.”

동석이가 짚은 곳은 ‘필요성 및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 이 로봇을 왜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하면 돼. 왜 만들었어?”

“곤충하고 건프라를 합친 거니까…….”

동석이는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녀석에게서 매력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내가 예시로 문장을 작성해서 보여 주려는 순간, 동석이가 손뼉을 쳤다.

“쌤! 생각났어요!”

“뭐가?”

“건담 인섹트 Mk2를 설계했던 이유요!”

벌써 이름까지 붙였냐.

“나중에 직접 움직이는 인공지능 로봇도 만들고 싶어요. 그래야 혼자서 몸을 움직이기 힘든 분들이 도움을 받죠!”

“이족보행이나 바퀴로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니?”

“이족보행은 문턱 같은 데만 걸려도 넘어질 거고, 바퀴는 문턱이 조금만 높아도 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곤충처럼 다리를 만들면, 높은 데는 힘들 수 있지만 장애물도 넘어갈 수 있고, 훨씬 안정적이에요. 그리고 건프라가 이번에는 크기가 작아서 힘들지만, 내부 구성칩들 크기가 조금만 더 작아지면 실제로 간단한 물건 정도는 옮겨 줄 수 있는 로봇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동석이의 순진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게 네가 만들고 싶은 로봇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잖아요.”

처음 나와 상담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밝아진 녀석의 목소리에 발표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처럼 말을 더듬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이런 내 태평한 생각이 박살 나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 * *

며칠 뒤의 주말. 나와 동석이, 은장이, 박 선생, 학생회장인 오민주까지 총 다섯 명이 모였다.

대회 준비를 위해 필요한 기획 회의를 하는 자리였다. 학생회의 다른 인원들도 참석해야 했는데, 제대로 준비를 도울 수 있는 인원은 이게 한계였다.

“……진짜 이 인원이 전부예요?”

“네.”

이래서 도와달라고 했구만.

해맑게 웃는 박 선생에게 눈을 흘기며 대회 진행 방식을 의논했다.

세팅 장소, 필요한 물품, 참가자들에게 전달되어야 할 사항, 제작할 포스터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깐 쉬죠.”

내 말에 지칠 대로 지친 세 학생들이 늘어지게 신음했다.

나도 계속해서 말을 했더니 목이 아파 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정리된 내용을 확인했다.

<영어토론발표대회>

일자: 2010년 7월 6일 화요일 오후 3~4시

주제: 기술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가?

대상: 전교생

목적: 사회 이슈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영어로 주고받으면서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하고 사회현상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각을 기른다.

시상:

대상 1 / 상장과 상품권

금상 1 / 상장과 상품권

은상 2 / 상장과 상품권

동상 4 / 상장과 상품권

장려상 10 / 상장

※ 실제 참가 인원에 따라 변동 가능

평가 방법

……

그래도 짧은 시간 동안 평가 방법부터 항목별 심사 기준, 평가 내용까지 정리했으니 쉴 틈 없이 달린 보람이 있었다.

“동석아, 너 로봇대회 나간다며?”

사탕을 입안에서 빙빙 돌리며 은장이가 물었다.

“응, 여름방학 하기 직전에 나가.”

“준비는 다 했어?”

“계획서도 준비했고, Mk2 세부 조정만 하면 돼.”

“근데 너 발표 잘해?”

은장이가 묻자, 동석이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었다.

“동석아, 한번 해 봐. 준비는 해야지.”

나도 궁금했다. 동석이가 로봇도 잘 만들고, 계획서를 함께 정리하며 보니 내용도 좋았다. 그러니 실제 발표만 잘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어느새 박 선생과 민주까지 옆에 와서 동석이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 저 그래도 잘할 걸……요? 저도, 아, 안 해서 그렇지 괜, 찮아요!”

불안하다.

동석이는 가방에서 계획서 일부를 꺼낸 뒤에 소리 내서 읽었다.

“제.가.준.비.한.로.봇.은.곤.충.과.건.담.을.합.쳐.서.만.든.육.족.보.행.분.리.수.거.로.봇.입.니.다.”

“……그만.”

내 말에 동석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푹 숙였다.

“써 둔 거 보고 읽는데도 그래?”

아무래도 동석이에게 발표 연습도 필요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은장아.”

“……설마 제가 도와줘요?”

“너 말고 누가 있냐 그럼.”

“민주도 발표 잘해요.”

“후배한테 알려 달라 그럴래?”

민주를 돌아보니, 자기가 해도 된다는 듯 가슴을 한껏 펴고 있었다.

그래도 3학년 체면이 있지, 어떻게 후배한테 배워.

“지금 정석이 교실에 있지?”

“네, 아마 도서관에 있을 거예요.”

“정석이는 어때?”

내 기억에 의하면 3학년 3반에서 발표를 잘하는 학생으론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옆에 있는 은장이고, 다른 한 명은 이정석이었다.

국어 시간에 우연히, 둘이 발표를 같이한 적 있었다. 그때 서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면서, 반 친구들이 다들 감탄했었다.

솔직히 둘 다 잘하지만, 은장이보다는 정석이가 동석이와 더 어울리기는 했다. 은장이가 카리스마로 리드한다면, 정석이는 부드럽게 리드하기 때문이다.

“정석이도 괜찮죠. 근데 쌤, 저한테 왜 두 번은 안 물어보세요?”

“그게 아니라, 지금도 저렇게 쩔쩔매는데 카리스마형인 네가 붙어 봐. 하루 종일 긴장만 할 거다.”

실제로 동석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원체 소심한데, 학교에서 거의 은따처럼 지냈으니 그 성격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대회 준비하고, 로봇 공부하고, 연천대를 목표로 하니까 좀 나아진 편이었다. 은장이는 나와 상담한 이후부터 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알았어요. 정석이한테 전화해 볼게요.”

그러고 보니 아직 정석이 상담은 진행하지 않았다. 내려오면 대회 준비도 얼추 끝났으니 후다닥 마무리하고, 정석이 상담이나 해 줘야지.

“자자, 빨리 마무리하고 들어들 갑시다. 주말인데 일찍들 가셔야죠.”

“어째 강 선생님, 동석이 때문에 빨리 끝내시는 거 같은데요? 저희 학생회장도 좀 신경 써 주세요.”

박 선생이 장난스레 말했고, 민주도 맞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민주도 입학사정관제를 준비한다고 하니까 내가 도움을 많이 줘야 할 거다.

“그래도 당장 급한 건 3학년이니까 민주가 조금만 참자. 얘네들 시즌 끝나면 박은환 선생님이랑 내가 같이 도와줄게.”

“진짜죠?”

“그래. 대신 그때까지 가고 싶은 학과, 진로 생각하고 진로보고서 작성해 놔. 아, 신문 구독하는 거 있어? 없으면 요즘 포털사이트에서 뉴스 많이 올라오니까 그걸로 봐도 돼. 전공, 진로 관련해서 재밌다 싶은 기사 있으면 따로 인쇄해서 스크랩도 해 놓고. 책도 미리 좀 읽어 놔. 여름방학 아니면 읽을 시간 없으니까. 어떤 책 읽으면 좋을지는 박 선생님이랑 상의해 보고. 동아리 활동도 여름방학 때 하나 정도는 하게 되니까 미리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어.

그리고 이런 비교과 준비한다고 교과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내신이 작년에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0.5등급이라도 상승하는 게 중요해. 대회 준비 오늘이면 너희가 당분간 도와줄 건 없으니까 바로 공부하러 가고. 알겠지?”

내 말에 대회 준비를 하던 네 사람이 모두 입을 멍청하게 벌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민주였다.

“네, 네 쌤! 준비할게요!”

“그럼 마무리할까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나를 보면서 박 선생이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오늘 만든 초안을 기반으로 삼아, 대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제 박 선생이 잡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은장아, 정석이 연락했어?”

“네, 통화 중이어서 방금 문자도 보내 뒀어요.”

바쁜가? 아직 동석이 대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돌아오는 월요일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 고생했다. 정석이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 알려 주고. 동석이는 집에서 거울 보면서 발표 연습 꾸준히 해라. 정석이만 오케이 하면 바로 연습 도와달라고 할 거니까 기다려 보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상반된 답변을 하는 두 학생을 보내고 나도 천천히 짐을 챙겼다.

주말이다 보니 테니스장에서 교사들끼리 친목 모임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류 선생도 껴 있었다. 윤 선생은 오늘은 빠진 모양이었다.

운동장에서는 학교를 하루 빌린 조기축구회 어른들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쏟아지는 입축구 함성을 들으면서 교문을 나서는 순간, 익숙한 얼굴의 학생이 교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정석?’

정석이가 초조하게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지나면서 정석이에게 말을 걸려고 했으나, 이내 나타난 인물을 보고 몸을 숨겼다.

나타난 사람은 초여름에 어울리는 깔끔한 원피스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자기야!”

정석이의 잇몸이 만개해지는 걸 보면서 어떤 일인지 짐작이 갔다.

……근데 나 왜 숨은 거야?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