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4화 (14/252)

14화. 내가 총괄이라니

“아니, 교감 선생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강문고 선생님이 됐으면 이런 교풍에 익숙해져야지! 아까 보니까 서류 봉투던데 그걸 왜 거절했어?”

‘이거 받으면 나중에 망하니까 그렇지!’

속으로 욕을 계속 내뱉으면서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저 정말 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고소공포증도 있고, 벌레도 무서워해요. 그러니 이런 일에는 더 겁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강문고 교풍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음…….”

한 교감은 미간을 좁히면서 괜히 교감실을 빙빙 돌았다. 뒷짐을 쉬고 열중쉬어 자세로 있는 나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참 강단 있군. 알겠네.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지.”

한통속을 만들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한 교감이 입맛을 다셨다.

은장이의 부모님 정도면 학교에 기부금 명목으로 뒷돈을 수천은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너무 막혀서 살면 숨 막혀 죽어. 교사 봉급이라고 해 봐야 거기서 거기잖아.”

“네, 신경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해 보라며 등을 두드리는 한 교감에게 인사를 하고서야 교감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벗어나기 힘드네, 어휴.”

평교사로 촌지 500만 원어치를 거절하는 건 솔직히 쉽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벌여 놓은 카드값들과 원룸 보증금 대출이 눈에 밟혔다.

‘아무것도 몰랐으면 다 받았을 거야.’

카드값 없는 거지왕이지만 잘 참았다며, 스스로의 인내심에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핸드폰을 열었다. 다음에 만나야 할 사람은…….

* * *

“강 선생! 어디야!”

나는 퇴근하자마자 지석 선배, 박 선생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

저 멀리 투덜대는 지석 선배를 보면서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사람이 참 교양 없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요즘은 네가 부를 때마다 두렵다. 대회 말고 또 뭔가 있지?”

“일단 음료부터 드시고. 박 선생님 오면 그때 주문하죠.”

선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게 입구로 박 선생이 들어왔다. 내가 어디 있냐며 소리를 지르던 지석 선배와 달리, 박 선생은 몇 번 둘러보고는 나를 발견했다.

“여기 계셨네요?”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두 사람을 부른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곧 있을 기말시험과 대회 준비. 인문계열 전반의 대회를 준비해야 했기에 국어 담당인 나, 사회 담당인 지석 선배, 영어 담당인 박 선생이 모인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지.’

기말고사 성적을 비롯한 전체 성적 분석,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면 성적표 기반의 상담, 대회 수상 문제까지. 의논할 사안이 많은 만큼 학생들의 대입 준비에도 영향을 끼칠 일들도 많았다.

“시켰어요?”

“아니요, 아직. 갈비 3인분 드실래요?”

“그래, 갈비 먹자. 명문이가 고기를 또 기가 막히게 굽거든.”

지석 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가위와 집게를 나에게 밀었다. 그래. 내가 굽는다, 구워.

우리는 양념갈비 3인분과 소주를 한 병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집게로 갈비를 하나씩 올려 둔 뒤에 그대로 방치했다.

“아, 탔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탄 부위를 고기로 잘라내자 지석 선배가 불만을 내뱉었다.

“야, 고기를 그렇게 두면 어떡해?”

“네? 원래 이렇게 굽는데요?”

“아니, 이게 무슨…… 자주 뒤집어야 할 거 아냐!”

“무슨 소리예요. 삼겹살은 익을 때까지 놔두잖아요.”

“그건 삼겹살이고, 이건 양념갈비잖아! 자주 뒤집어야 양념이 안 타지! 집게 이리 내!”

결국 지석 선배는 나한테서 집게를 빼앗고는 직접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나를 보며 박 선생이 다 구운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선배님, 진짜 잘 구우시는데요?”

“그치? 강명문 저놈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군대에서 고기를 구울 때도…….”

그렇게 지석 선배의 군대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기를 집어 먹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지석 선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선배, 방송부 담당이죠?”

선배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거 때문에 오늘 모이자 그랬구만. 이번엔 또 뭔데?”

“3학년들은 방송부 활동 해요?”

“안 하지. 다 수능 공부 하라고 하고, 동아리 시간에도 자습하는데 뭐. 가끔 후배들이 뭐 물어보러 가는 것 정도만 할걸?”

“선배도 잘 몰라요?”

“3학년들이 뭘 하는지는 몰라. 그건 왜?”

“그럼 3학년 중 희망자에 한해서 활동할 수 있어요? 인터뷰 같은 거.”

내 말에 박 선생이 옅게 웃었다.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고요?”

“누가 들으면 흉계라도 꾸미는 줄 알겠습니다. 그런 거 아니고, 은장이 동아리 활동이 필요해서요.”

“인터뷰 활동시키려고?”

“네. 은장이가 방송, 광고 분야 쪽 직업에 관심이 많은 컨셉으로 준비할 거라서요.”

“섭외할 사람은 정했냐?”

“그건 아는 루트가 있어서 그쪽을 통해서 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은장이 부모님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선배와 박 선생도 나에게 더 깊이 캐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알았어. 대신 강사비 지급 요청서는 네가 써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면서 웃었다. 선배가 박 선생과 나를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은장이 이야기는 끝났지? 동석이나, 아니면 또 다른 애 나오는 건 아니지?”

“네, 끝입니다.”

“좋아. 그럼 이제 대회 이야기해 보자고. 기말고사 준비야 다들 들어갔을 거니까 별로 할 이야기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인문대회로 오픈할 수 있는 대회가 몇 개 없어요.”

박 선생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특히 3학년들은 진짜 없어요. 그나마 영어과에서 준비하고 있는 게 영어 토론대회인데…….”

“아, 토론은 우리가 하려고 했는데!”

지석 선배가 아쉽다는 듯 탄식했다. 하긴, 인문계열에서 준비하는 데 가장 만만한 대회가 토론이었다.

“국어과는 뭐 준비해?”

“1, 2학년은 독서대회고, 3학년은 아직 고민 중이에요. 애들 책 읽을 시간이 없으니까 독서대회는 안 할 것 같습니다.”

인문계열에서 준비하기 좋은 대회는 토론, 발표, 독서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인문계열 대회는 이 정도의 틀에서만 준비되어 왔었다.

이는 다른 인문계열 고등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디를 하면서 만났던 많은 인문계열 학생들의 생기부에는 특출나다고 할 만한 대회가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3학년이면 수능 공부를 하느라 바빠서 대회에 참가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 이런 시점에서 어려운 윤리독서토론이라든가, 독서왕 대회 같은 걸 열면…… 학생들 참여율이 저조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거 제대로 안 정하면 시험 끝나고 힘들다. 빨리 생각들 좀 해 봐.”

“그러는 선배네 사회과는 뭐 하는데요?”

“……시사 PPT 발표.”

“다 거기서 거기네요, 진짜.”

“그럼 UCC라도 할래?”

“3학년 애들한테 어떻게 시켜요, 그걸.”

책 읽을 시간도 없는 애들이 퍽이나 영상 찍고 편집까지 하겠다.

“뭔가 애들이 부담 없이 할 만한 거…….”

“공부 안 해도 참가할 수 있는 거…….”

선배와 박 선생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고민하는 척을 했다.

사실 이미 내가 주장할 대회가 하나 있었다.

이전에 컨설팅해 줄 때 딱 한 명, 인문계열 대회 중에서 특이한 대회 수상 경력이 있는 학생이 있었다. 그 대회 이름이 뭐였더라.

“시사 롤플레잉게임?”

내 중얼거림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뭐?”

“시사 롤플레잉게임이 뭐예요?”

나는 마치 처음 생각해 본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학생들에게 역사, 시사계의 유명인사들의 삶을 소개하는 자료를 주고, 학생들은 그 유명인사들처럼 하루를 살아 보는 겁니다. 주제로는 큰 거 하나를 주고, 이 주제를 이 사람이면 어떻게 바라봤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유롭게 수다도 떨면서, 토론할 수 있게 하는 거죠.”

“근데 이름이 왜 시사 롤플레잉이야?”

“그냥 영어 넣으면 있어 보이잖아요.”

그게 국어 선생이 할 소리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남은 술을 홀짝였다.

“왜요. 게임 같아서 참여율도 높을 것 같고, 저는 좋아 보이는데요?”

평소 숨덕하고 있는 박 선생다운 말이었다.

“너무 장난스럽다고 까이지 않을까?”

지석 선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겁니다. 3학년 애들도 숨 쉴 틈은 줘야지요.”

이 대회를 통해 나는 우리 반 학생들 중 깜냥 있는 애들에게 수상 경력을 쥐여주고 싶었다.

“그럼 이걸 인문 융합대회로 준비할까요?”

“선배는 어때요?”

선배는 조금 더 고민하더니 이내 알겠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 이걸로 확정합니다?”

“그래. 강 선생이 준비 잘하겠지, 뭐!”

“강 선생님만 믿을게요.”

“네, 제가 잘…… 네?”

이렇게 나는 둘의 동의를 얻어 3학년 대상의 인문 융합대회 총괄 책임자가 되었다.

* * *

“아니, 무슨 초임교사한테 대회 총괄 책임자가 뭐야, 책임자가!”

그날 이후 주말 이틀을 내리 투덜거리면서 보냈다.

어째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꼴이었다.

“아, 진짜 귀찮은데…….”

출근해서도 나는 계속 투덜거렸다.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다른 선생님들도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던졌다.

“강 선생 대회 총괄한다며? 엄청난데?”

“요즘 강 선생 장난 아니야~ 잘 나가는데?”

“선배님, 나중에 일손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올해 나보다 1년 후배인 홍유진 선생이 그렇게 말하며 지나갔다. 너, 내가 딱 기억했다.

오늘 상담 시간도 빠르게 지나갔다.

한채영, 양지은, 은정아.

채영이는 스튜어디스가 되겠다면서 공부는 열심히 하진 않는, 평범한 꿈 많은 고등학생이었다. 미래에는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적당히 사무직으로 취업했다는 소식까지만 들었었다. 대학교는 지방대만 가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항공관광학과는 전문대에도 많이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얘, 뭔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였더라, 그게.

양지은과 은정아는 실력에 비해 눈이 높았다. 그래서 논술 전형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논술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상담 전에 준비하라고 일러둔 논술 기출문제 답안지를 확인해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논술 특강반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는데, 동석이가 내려왔다.

“오늘은 상담 없는데?”

“아, 그게 아니라……. 쌤, 저도 대회 나가도 돼요?”

그러고 보니 아까 종례 시간에 내가 대회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직 교실에 포스터가 붙지는 않았지만, 내일 중에는 인쇄물이 전부 뿌려지겠지.

“이거 인문계열 대회야. 넌 과학…….”

여기까지 말이 나왔지만, 나는 태도를 바꿨다.

“……이지만 당연히 해야지. 유명한 과학자로 롤플레잉해 보면 재밌을걸? 신청서 나오면 바로 알려 줄게. 기다리고 있어.”

나의 태세 전환에 박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석이가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성공이었다.

입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 동석이에게는 그 동기가 지금 여러 분야에서 파생되고 있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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