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9화 (9/252)

9화. 은장의 결심

입시 코디 때 학생부관리를 위해 만났던 학생들 중 이런 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 유학을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유학을 하면서 일본 대학교 석박사를 나와 교수를 하는 것. 그리고 유학을 온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그게 그 학생이 꿈꾸던 미래였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고지식 중의 고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같이 지내시는 할아버지는 일본어를 공부하겠다고 하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쪽바리 새X들 언어나 배워서 어따 쓰려고!’

은장이도 비슷했다. 은장이는 벌써 본인이 미래의 마케터라고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특히 어머니는 이에 극구 반대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고지식한 분들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선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해 보자. 이게 지금까지의 은장이 네 학생부야.”

나는 NEIS를 열어서 은장이의 학생부 내용들을 보여 주었다. 담임선생님 전용으로 보여 줄 수 있었기에 3학년 1학기 내용도 일부 들어 있었다.

그러다 내신등급을 보여 줄 때 은장이가 짧게 탄식했다.

“3등급이 너무 많아요, 쌤.”

“맞아. 평균등급 내고 교과전형으로 넣으면 100% 광탈이야.”

“근데 제가 서울한국대를 어떻게 가요?”

은장이가 투덜거렸다. 하긴 모집요강을 자세히 살펴보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

실제로 전국의 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학교 선생님들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상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적만으로 추천 학교를 산출하려다 보니 성적 점수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형으로 잘못 지원하는 식이었다.

나는 은장이에게 <2011년 서울한국대 모집요강>과 학생부 내용을 보여 주며 말했다.

“서울한국대 지역균형선발전형은 1단계에서 교과성적을 100%로 산출해서 뽑아. 그래서 지금 3등급이 섞여 있는 은장이는 불리할 수밖에 없지.”

“그쵸. 애초에 수시는 생각도 안 했어요.”

“그래. 그리고 여기를 보면, 교과평가방법에 수강자수에 따른 조정점수가 있어. 네가 받은 3등급 과목들 중 탐구영역은 법과 정치, 경제. 그런데 수강자 수를 봐볼래?”

“법과 정치는 작년에 10명인가 들었고, 경제는 20명이 채 안 됐었죠.”

단순히 등급만을 생각하면 은장이가 실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장이가 3등급을 받은 교과목 중 상당수는 수강인원이 30명을 넘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비주류 교과목들이다. 인기가 많은 일본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들었다. 사회탐구과목도 사회문화 같은 일반 교과가 아니라 법과정치, 경제처럼 인기가 없거나 너무 어려워서 꺼리는 과목만 들었다.

“가산점 감안해서 계산하면 지금 은장이 평균 교과 성적은 1.4등급이야.”

“네!?”

수강자가 10명이었던 법과정치는 3등급이지만 1점 가산되어서 2등급과 같은 7점.

수강자가 20명인 경제는 3등급이지만 0.5점 가산되어서 2.5등급인 6.5점. 25명인 중국어도 마찬가지로 2.5등급.

국어, 영어 1등급, 수학 2등급, 1학년 사회, 과학 각각 1등급, 2등급. 예체능은 70점 아래가 없어서 감점영역 없음.

이렇게 수강자 수까지 고려해서 1, 2학년 전체 교과를 종합평가해 보았다. 그러자 서울한국대 기준으로 은장이의 교과성적 평균은 1.42등급 수준이었다. 나는 계산한 화면을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은장아, 너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공부해 왔지?”

“…….”

“인기가 없는 과목을 선택한 것도 결국 네가 원해서 골랐을 거야. 활동도 마찬가지야. 작년에는 방송반 하면서 독서토론반도 하고, 여러 교과목 학습부장까지. 내가 지금까지 본 학생부 내용들 중 가장 좋아.”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은장이의 학생부에는 여러 활동들이 적혀 있었다.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이 절반이 넘는 시점에서 이 정도 기재는 쉽지 않았다. 아마 학교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많은 게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은장이의 활동들은 대부분 일관성이 없이 여러 공부를 해 온 형태를 이루었다. 방송을 공부하기도 했고, 인문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수학에서는 데이터가 미디어에 중요한 이유를 주제로 발표했다. 영어 시간에는 방송 사용 용어들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독서활동목록도 다양했다. 판검사의 에세이, 한국문학, 영미문학, 독문학, 마케터 에세이 등.

그래서 나는 은장이의 글을 보면서도 하고자 하는 분야를 숨기고 있음을 파악했다. 과거 기록들을 토대로 방황하고 있는 모습까지 찾아냈다.

지금 나는 명백하게 입시 코디처럼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지금처럼 마음껏 해도 돼. 넌 광고분야 진출해서도 잘할 거야.”

“진짜요?”

“그래. 그러니까 이번 입시 제대로 해 보자.”

나는 다시 모집요강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지금은 1차만 합격할 수 있어. 서울한국대 1차는 교과성적만으로 3배수를 선발하니까 이 정도 점수면 아슬아슬하게 합격할 거야. 문제는 그다음이지. 2단계는 뭘 평가하는지 알고 있니?”

“면접 아니에요?”

“정확히는 서류평가와 면접을 같이 평가해. 1차만 붙으면 교과성적은 반영하지도 않아.”

은장이가 이에 놀라면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인터넷이 있기는 하지만, 이걸 주도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대였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도 어떤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시대였기 때문에, 지금의 정보가 은장이에게는 믿을 수 없는 정보였을 것이다.

“서류 중 추천서, 자기소개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추천서 써 주고, 자기소개서도 도와줄 거니까. 문제는 학생부야. 동아리, 대회, 진로활동 등 챙길 게 많아. 그건 차차 알려 줄 테니까 내가 해 오라는 거 다 해야 한다, 알겠지?”

“네.”

어느새 은장이는 눈을 또렷하게 빛내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서울한국대와 함께 준비할 학교는 고구려대. 연천대는 힘들어. 연천대는 교과와 논술을 중점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준비하기는 어려워. 논술 공부해 본 적 없지?”

“네, 없어요.”

“그럼 여기는 버려. 스카이 노린다면서 가능성 낮아지는 카드 하나 버리는 것보다는 가능한 학교를 더 찾는 게 나아. 외부 수상이나 외국어 시험 성적 받은 건 있니?”

“아뇨, 없어요.”

“그럼 특기자 전형들도 전부 제외야. 고구려대는 학생부우수자전형 자유전공학부 목표다.”

“미디어학부로 지원 안 하고요?”

“내용상으로 안 돼. 그리고 부모님께서 원서비 내주실까 과연?”

“엥, 쌤이 방금 하고 싶은 공부 맘껏 하라면서요.”

“전략적으로 접근해야지, 무턱대고 하겠다고 하면 허락하시겠냐?”

나는 은장이에게 오늘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알려 주었다.

슬쩍 시간을 보니 벌써 상담을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 있었다.

“이제 얼른 학원 가 봐라. 부모님께는 조만간 내가 연락드릴 거니까 오늘 잘 말씀드려 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은장이가 교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건 은장이가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는 거다. 그 이후는 내가 하면 된다.

* * *

학원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내내 은장은 고민했다. 담임과 상담을 하고 나서 무언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친구들에게도 뭘 하고 싶은지 제대로 밝힌 적이 없어서일까.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학원 수업 중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담임이 부모님에게 꼭 이야기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한 그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우리 딸?”

은장의 아버지가 딸을 챙기면서 현관으로 나왔다. 어머니는 식탁 앞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은장은 오래간만에 두 분이서 차라도 한 잔 하셨나 보다 생각하며 거실로 들어왔다.

“오늘 선생님이랑 상담했다며?”

“응. 학원가기 전에 잠깐.”

“무슨 이야기 나눴니? 아까 차에서도 이야기 안 해 주고.”

학원에 가는 길에 은장은 아버지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선생님과 이야기는 많이 나눴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봤다. 그때마다 은장은 엄마 있을 때 같이 이야기해준다며 대답을 뒤로 미뤘다.

“솔직히 말할게. 나 솔직히 수능 점수 안 좋아.”

“몇 점인데?”

“모의고사 평균 2등급이야.”

은장은 솔직하게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렸다. 인문계열은 인서울 중상위권 학교도 노리기 힘든 성적. 스카이를 생각하던 은장의 부모는 딸의 성적에 침묵했다.

“…….”

“…….”

몇 초나 지났을까. 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수시 준비하면 서울한국대랑 고구려대 합격할 수 있대.”

“……그게 가능해?”

“음…… 한 번 더 찾아뵈러 가야 한다 말씀 주시진 않았고?”

‘수능으로는 안 되는데 수시로는 합격할 수 있다는 건, 학교에서 힘을 써 주는 방법뿐이다.’

은장의 아버지와 생각이 일치했는지,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은장은 그냥 그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제스처로만 이해했다.

“서울한국대 점수로 바꾸면 지금 내 성적이 1등급 초중반 정도 되나 봐. 그래서 지역균형선발전형에 넣을 수 있다고…….”

“어우, 복잡한 얘기는 됐다. 그래서 엄마랑 아빠가 뭐 도와주면 되니?”

은장은 어머니의 말에 긴장한 기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담임쌤이 말했던 ‘현실적인 전략’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해야 한다.

거기까지만 하면, 나머지는 담임쌤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 은장은 딱 거기까지만 하면 되었다.

“수시전형에서는 면접도 봐야 하는데, 컨셉을 정하고서 학생부랑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나 봐.”

“그래서?”

“저…… 그래서…….”

은장은 마지막 한 마디를 망설였다. 정말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지금까지 숱하게 광고를 공부하겠다고 했다가 잔소리만 들어왔다. 그런 가혹한 세상으로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가 또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학과가 인문광역, 자유전공계열이야. 둘 다 진짜 전공은 2학년 되어서야 선택하는 학과야. 근데 진짜로 있잖아 나…….”

뒤에 하고 싶은 말은 실제로는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어’ 였다. 하지만 그 말을 꾹 참았다.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해.]

은장은 담임인 강명문의 말을 떠올리며 담임이 알려준 말을 그대로 했다.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대학교 가서 고민해 보고 싶은데, 서울한국대 가려면 ‘현실적인 전략’으로 수시를 준비해야 해서 컨셉이 필요해. 그리고 그 컨셉은 부모님과 관련된 직업으로 연결하는 게 준비하기 훨씬 편하대.”

담임이 강조했던 ‘현실적’, ‘전략’. 이 두 단어를 강조하면서 말하라고 했던 것처럼 은장은 두 단어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담임이 반드시 하라고 했던 말의 마지막 문장을 어렵게 내뱉었다.

“나 이번 입시 때만 ‘전략적으로’ 광고랑 인문학 공부하겠다고 컨셉 잡으면 안 될까?”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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