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304화 (304/322)

< --발해연방공화국 출범과 대정그룹-- >

그로부터 약 두 달이 흐른 10월 19일 나는 돌연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우리 그룹이 기아자동차의 최종 인수 확정자로 결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우리 그룹은 한국의 IMF 사태를 예견한 나의 지시로 96년부터 초긴축 경영을 해왔다. 신규 대출을 억제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자산도 상당히 팔아치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내 소유 지분 55% 중 12%를 빌 게이츠(6%)는 물론 주식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시점이 98년 초로 이 매각 소식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바 있었다.

당시 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벌어들인 돈이 외국기업에서 평가하길 1억 달러가 모자라는 399억 달러였다. 이 당시 나는 이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주식과 벌어들인 돈만으로도 세계 제1의 갑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세계적인 갑부가 뭐가 답답해서 주식을 다 내다파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세상을 한 동안 떠들썩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 나는 제지공장을 매각하는 것

은 물론 역삼동의 전자공장을 청주공장으로 이전하고, 이곳도 우리 그룹 빌딩과 식당 및 약간의 공간만 남기고 전량 매각했다. 이것이 96년 연말이었다. 아무튼 기존 내 재산과 여러 매각 대금 등 총 800억 달러의 실탄을 마련한 나는 이를 전량 국내외 은행에 분산 예치해두고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우리가 그룹차원에서 발해공화국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고 국내투자가 일체 중지되는 바람에, 한국 경제가 상당한 타격을 입은 데다, 나를 따라 재벌들도 발해공화국의 투자에만 열을 올리니 국내 경기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아시아 각국의 외환위기는 그나마 건실하다던 한국으로 불똥이 옮겨 붙어, 연말에는 비극적인 IMF구제 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김대중 당선자가 내게 찾아와 읍소하길 나라를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아주 조건 없이 100억 달러를 한국정부에 융자해주었다. 이로 인해 훗날 한국정부는 IMF로부터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은 받았지만, 원 역사에서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부터 각각 70억 달러와 37억 달러를 지원받았던 것은,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우리 그룹에 많은 한국 기업의 인수를 바랐지만, 나는 IMF의 신호탄이었던 한보철강과 진로 그룹만 인수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IMF의 시발이 기아차의 부도 유예처리였다면, 이것이 금번에 우리가 1차 매각 협상대상자로 올라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사실 전부터 우리와 기아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리가 이 회사의 19%를 가지고 있었던 바, 사업이 어려워지자 김선홍 회장이 나를 찾아와 지원을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아예 기아의 지분 인수를 바랐다.

내 뜻이 원체 강경하자 김 회장도 내 뜻을 허락하고 지분을 매각하려하니, 노동자들이 이에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나는 이에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대신에 일체의 지원도 하지 않아 결국은 나라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김 대통령을 예방하고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며칠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지난번의 아픈 기억이 있던 나로서는 노동자들이 우리 그룹에서 인수를 원하지 않으면 인수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우리 그룹이 인수해도 좋은지 여부를 가라는 찬반투표부터 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뜻을 이해한 김 대통령이 이에 동의했고 나는 이를 김상문 전 회장에게 부탁하여 실시하도록 협조요청을 했다. 이 당시 김선홍 회장과 은행 간에는 상등록일 : 14.04.05 00:05조회 : 4286/4296당한 갈등이 있어서 김 회장은 자리를 물러난 시점이었다.

아무튼 나의 요구에 실시된 찬반 투표에서 87%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우리의 인수를 희망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이제 다급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가해서 내심 괘씸한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감에 의해서 기업을 운영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곧 인수에 동의하고 채권단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최종 기아의 채무 중 7조1700억 원을 탕감하고, 우리가 8400억 원의 주식증거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동년 12월 1일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우리는 기아자동차의 18개 계열사에 대한 지분 70%를 소유하게 되었다. 후일담이지만 정확히 1년 후 기아는 1400억 원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LPG차량의 열풍을 타고 카니발, 카렌스, 카스타 등 이른바 '쓰리 카' 등은 미처 생산을 해대지 못해, 출고가 3개월씩 밀린 상태였다.

이에는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도 한몫 거들었다. 7~10인승 LPG승합차량의 판매시한을 슬쩍 1년을 연장해준 덕도 보았다. 이것이 무상으로 100억 달러를 정부에 공여한 나의 헌신에 비하며 아무 것도 아닌 혜택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한국의 기업은 얼마 사지 않았지만 휴지조각이 된 러시아 기업들을 상당수 사들였다. 주로 항공과 우주 외에 여타 군수산업과 가스프롬의 지분을 대거 매입하여 최종, 가스프롬은 전의 지분을 포함하여 71%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 외에도 철도차량 등 철도분야 회사의 주식을 대거 매입하였다.

이렇게 소진된 돈이 300억 달러정도였다. 아직도 충분한 실탄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99년 대우의 부도사태가 그것이었다. 8월 26일 대우가 최종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되면서 김 대통령은 나를 불러 이를 종용하다시피 해 매입을 요구했다.

이에 나는 단안을 내려 대우의 부채 9조8500억 원을 전량 떠맡는 조건으로 인수를 해버렸다. 이것이 당시의 환율 1,200원을 적용하면 약 80억 달러정도였다. 어찌 됐든 내가 선뜻 인수를 하지 않았으면 시일을 질질 끌다가 이것이 최종 30조원 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로 국민 부담을 안기는(공적자금 투입) 것을 내가 방지해 주었으니, 이래저래 우리 그룹과 나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무튼 이로 인해 대우가 소유하고 있던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중공업, 증권 외에 대우빌딩 등 헤아리기도 어려운 대우의 수많은 해외 계열사들까지 우리 그룹에 편입되는 바람에, 명실 공히 대정은 한국 재계의 40%를 점하는 거대 공룡 그룹이 되었다.

여기에 2000년에는 이탈리아의 피아트 자동차 그룹을 인수해버렸다. 1990년대 경기불황의 여파로 이탈리아 내수시장 점유율이 떨어졌으며 2000년 초, 지금까지 누적적자 22억 달러로 피아트는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다. 이에 우리 그룹이 그 부채 22억 달러를 떠안는 조건으로 피아트를 인수해 이탈리아 자동차 업계를 평정해 버렸다. 또 이 해에 미국의 세계적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여 북미 시장의 진출을 더욱 강화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2002년 다시 한 번 북핵 위기가 터졌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NPT 탈퇴 선언을 하면서 일어나면서 터진, 1차 북핵 위기는1994년 제네바 합의로 종료되었지만, 이 당시 전쟁 발발 일보직전 까지 갔지만, 우리 국민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아 모르고 있는 사실이 많았다. 1994년 3월 19일 북쪽수석대표인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에 이어 더욱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남과 북쪽 진영은, 5월 18일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드디어 비수를 빼듦으로써 그 극점을 향해 치달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에게 항공모함 2척과 군함 33척을 동해로 보내, 작전계획 5027하에 북한의 핵시설을 공습하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미국의 항공모함과 군함들이 서서히 한국 해역에 집결하자, 남북은 그야말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이북의 김일성 부자는 가족들을 모두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김영삼은 애가 달아 장장 2시간 동안 클린턴에 전쟁은 안 된다고 매달렸다. 그 덕분에 간신히 전쟁을 면한 일이 있었다. 이어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우리의 대북 투자와 발해공화국에서의 50만에 이르는 노동자의 고용으로, 원 역사와 달리 아사는 면한 북한 정권이 또 한 번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 북한은 2002년 10월에 방북한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함으로써 2차 북핵 위기가 발발한 것이 그것이었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프로그램의 추진은〈1994 북·미 제네바기본합의〉,「핵확산 금지조약 (NPT)」,「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안전조치 협정(Safeguards Agreement)」및〈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1)〉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은 2002년 10월 16일에 국무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추진을 발표하면서,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즉각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고, 한국 정부도 10월 17일 북한 측에 대해 핵과 관련된 모든 의무의 준수를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10월 25일에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발표, 미국의 '선 핵개발 계획 포기' 요구를 거부하고 북·미간 불가침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2002년 11월 14일에 소집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는 북한의 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로서 12월분 이후 중유공급을 중단할 것을 결정하고 추후 공급은 북한의 대응과 연계시키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KEDO의 중유공급 중단 조치를 이유로, 제네바합의에 의해 유지되어 오던 영변 핵시설의 봉인 및 감시 장비 철거를 IAEA에 요구하는 외무성 담화를 2002년 12월 12일에 발표하였으며, 12월 21일부터는 북한 스스로 핵동결 해제 조치를 개시, 5개 동결 대상 중 5MW 원자로, 방사화학실험실, 핵연료 봉 제조공장, 사용 후 연료봉 보관 수조 등 4개 시설에 대한 봉인을 제거하고, 감시카메라의 작동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건설 중지된 상태에 있었던 50MW/200MW 원자로에는 봉인 및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동결시설에 대한 IAEA의 감시체제가 붕괴되었다. 2002년 12월 27일에 북한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IAEA 사찰관 추방과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 시설) 가동 준비 결정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12월 29일에 미국의 일방적 제네바 합의로 파기로 NPT준수가 불가능해졌다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고 결국 2003년 1월 10일에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2차 북한 핵 위기에 대해서도 김대중 정부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두 번의 남북장관급회담과 특사 파견 등 남북대화 채널을 통해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이고도 건설적인 해결을 직접 설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김대중 정부는〈대북정책조정그룹(TCOG) 회의〉와 APEC에서〈한·미·일 3국 정상회담〉및 IAEA와의 공조에 기초한 외교적 해결에도 주력하였다. 그러나 내 입장은 달랐다.

그간 발해공화국의 독립과 국력의 신장을 꾀해, 기회만 노리고 있던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즉각 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하고 해당 각료들을 하바롭스크 남쪽에 준공된 신도시 내의 신청사 내, 소회의실로 불러들인 나는 한동안 참석한 면면들을 둘러보았다.

빅토르 이바노비치 노보질로 국방부 장관, 조지 슐츠 외무부 장관, 블라디미르 푸틴 정보부장, 태평양함대 사령관 이고르 흐멜 노보일로프 대장, 육전 사령관 야코 블레프 대장, 전략로켓 군 및 공군 사령관 이스마일 안드로포프 대장 등이 나의 눈길을 받아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다만 함께 배석한 김 비서실장만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이런 그들은 아랑곳없이 내가 불쑥 말했다.

"나는 이 기회에 북한을 아국으로 흡수통합 하려 하오."

내 말에 흠칫하며 더욱 표정이 굳어지는 참석한 면면들이었다.

^^늘 좋은 날들 되세요!

^^============================ 작품 후기 감사합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