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방경영-- >
내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주지사 관사는 아무르 강변의 동안(東岸)에 있었다. 바다처럼 광활한 아무르 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고풍스러운 일단의 백색 건물 군들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뒤의 전나무와 삼나무 일부의 단풍나무 숲을 배경으로 고풍스러운 서양식 백색 건물이 장엄한 낙조의 황홀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광경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아무튼 내가 일단의 경호 차량에 에워싸여 퇴근을 하자 누런 잔디 위의 흰색 벤치에서 아무르 강변의 낙조를 감상하던 미정이 발딱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퇴근하셨어요? 여보!"
"혼자 외롭지 않아?"
"그나마 가정부 아주머니라도 데려오지 않았으면 더 적적할 뻔했어요."
"낙조를 감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네. 들어가지 마시고, 잠시 일몰을 감상하다가 들어가세요."
"그럴까?"
나는 경호원들이 보거나 말거나 스스럼없이 미정을 끌어안고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로 향했다. 차가웠는지 그곳에는 군용 모포가 깔려 있었다. 이를 보고 내가 물었다.
"이것은 어디서 났어?"
"내가 좀 차갑다고 했더니 경호원들이 어디서 갖다 주던 데요?"
"이것들이 보급품을 풍족하게 하니, 마구 낭비하는 것 아니야?"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자신이 새로 지급 받은 것이라 하던 데요."
하긴 경호원들도 일단은 군인의 신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싶었다.
"여보, 저것 좀 봐요. 얼마나 멋져요!"
나는 미정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았다.
정말 시시각각 변하는 오색구름의 향연 속에 붉은 낙조가 긴 꼬리를 그으며 조금은 탁해 보이는 강물 위로 긴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수시로 반짝이는 붉고 노란 빛의 산란 속에, 금방 고기가 펄떡 튀어오를 듯했고, 이를 지나가는 결코 크지 않은 화물선이 오늘따라 유난히 힘겨워 보였다.
"이곳에 오길 잘 했지?"
"심심한 것 빼고는 요."
"무슨 일거리를 찾아야지?"
"곧 내조할 일이 있겠지요."
"그럴 거야. 곧 안정화 되는 대로 많은 일거리가 생길 거야. 그동안이라도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읽고, 러시아어도 좀 배우도록 해."
"아니래도 러시아인 가정교사를 구해 러시아를 배우고 있어요."
"혹 남자는 아니지?"
"호호호.........! 남자예요."
"뭐?"
"호호호..........! 그게 아니라 여자인데, 혹시 당신이 지분거릴 까봐, 인물이 못 생긴 처녀를 구했어요."
"많이 약았군. 가만 그러고 보니 날 의심하는 것 아니야?"
"남자라고 묻는 당신은 요?"
"피장파장인가?"
"그럼요. 헤헹! 그런데 조금 춥다."
"옷을 좀 두텁게 입지 그랬어?"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려면 지금부터 저항력을 길러야지요."
"말 되네."
나는 단지 스웨터 차림의 미정을 감싸 안으며 물었다.
"덜 춥지?"
"많은 눈들이 보잖아요."
"저네들의 눈도 무디게 할 필요가 있어."
"면역이 생기게 요?"
"그럼, 그럼."
"저녁 다 됐을 텐데, 시장하지 않으세요?"
"조금 있다가,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 들어가자고."
"네~!"
나는 미정과 그렇게 조금 더 일몰을 감상하다가, 해가 완전히 서쪽으로 자취를 감추자, 우리는 곧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 들어오니 이미 저녁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미정이 곡 주방으로 다가가 한국에서 데리고 온 가정부 아주머니와 저녁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곧 청국장이 다시 덥혀지는지 구수한 냄새가 났다.
이에 내가 흘깃 창밖을 보니 경호원 하나가 코를 틀어쥐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내가 좋아 먹는 음식인데 남의 시선을 의식해 못 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곧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제 끝내 사양하는 가정부 아주머니 때문에 둘만의 단출한 식사가 되었다. 식사 때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것에 비하니 너무 쓸쓸한 식탁이었다. 그렇지만 미정이나 나나 내색을 않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두부까지 들어간 청국장을 번갈아 떴고, 김과 계란말이, 김치, 여기에 명란젓 정도의 식단이 빠르게 비워져 갔다. 그런 가운데 내가 말했다.
"너무 적적하다."
"동감 이예요. 아이들 교육 문제만 아니면 다 부르면 좋은데."
"글쎄 말이야. 아이들 교육 때문에 문제는 문젠데 말이야."
"차차 시간을 두고 좋은 방법을 찾아보자고요."
"그래, 그래."
곧 저녁을 마친 우리는 부부의 전용 침실로 들어갔다. TV를 트니, 러시아어라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먹겠다. 그래서 나는 바로 TV를 끄고 곁의 미정에게 말했다.
"내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
"네, 여보!"
"당신도 같이 가지?"
"아니 예요. 저는 저대로 할 일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미정은 먼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이에 나 또한 옷을 좀 더 두텁게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이때 통역이자 비서인 이오노바가 빠른 걸음으로 잔디밭을 걸어 자신의 숙소로 가는 것이 보였다. 경호원부터 항상 러시아인들에 둘러싸여 있다시피 하니, 그녀는 물론 혹시 몰라 올리비아 리와 방령마저도 이 관사에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독립된 별채에 각자의 방이 따로 있었다.
"이오노바!"
"네, 각하!"
나의 부름에 깜짝 놀라 뒤돌아 답하는 이오노바였다.
"식사는 했어?"
"아직 아니 예요."
"시집은 언제 가는데?"
"또 그 소리 세요? 우리 독신자 클럽에 자꾸 그런 소리 하시면 실례라고요."
"알다가도 모르겠네. 내 주변에는 왜 시집 안게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정말 모르세요?"
"음.........!"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각하도 어떤 면에서 보면 정말 눈치가 없으세요."
"그건 또 뭔 소리야?"
"몰라욧!"
괜히 쏘듯 말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이오노바였다.
"쟤가 왜 이래........."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빛바랜 단풍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30분 간 산책을 하고 들어오니 어째 방안의 조도가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든 조명이 꺼지고, 응접세트 위에 촛불 세 개만 밝혀져 있었다. 또 그 위에는 포도주 세 병과 약간의 안주마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정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불렀다.
"다정이 엄마!"
"네, 여보! 나 샤워해요. 다 됐어요. 곧 나갈 게요."
"알았어!"
나는 대답을 하고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미정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옷차림이 상당히 야했다. 속이 훤히 비치는 하늘하늘한 란제리에 팬티만 달랑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정을 했는지 끈 팬티였다. 그녀의 차림에 더욱 놀란 나는 혹시 내가 잊은 것이 있나 해서 물어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야?"
"호호호........! 꼭 무슨 날이라야만 이렇게 입나요? 무료한 일상에서 얼마나 신선해요."
"그렇기는 하다마는 오늘 따라 적극적으로 나오니 괜히 캥기는데?"
"호호호.........! 설마요? 세 여자를 동시에 상대하고도, 우리를 먼저 다운시키는 당신인데?"
"하하하.........! 그래서 오늘 죽어보자는 거야, 뭐야?"
"네!"
주저 없는 미정의 대답에 내가 죽는 소리를 했다.
"에고, 왠지 가슴이 철렁하는데.........."
"호호호........! 엄살 그만 떠시고, 포도주 한 잔 주세요."
"그럴까?"
나는 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그녀의 잔에다 한 잔을 따라주었다. 그녀 역시 배시시 웃으며 내 잔에 천천히 포도주 반잔을 채웠다.
"건배해요. 여보."
"열정적인 성생활을 위해서!"
"좋아요. 위하여!"
"위하여!"
나 또한 다시 한 번 후창하며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음미하듯 천천히 그러나 반잔을 다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어쩐 일인지 미정도 반잔을 다 비우고 포도주 병을 집어 들었다.
잔을 받으며 내가 물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상한데?"
내가 고개까지 흔들며 말했다.
"당신이 산책 나가 이오노바와 잠시 대화하는 장면을 보고 들었어요."
"그래서?"
"걔네들한데 당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는 솔직히 그네들의 무섭도록 발달한 육체의 볼륨감이 두려워요."
"별 소릴 다 하네. 나는 곁눈질도 안 하는데."
"그건 저 듣기 좋은 소리라는 걸 알고요. 당신에게 더 적극적인 여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알았어, 알았어. 한 잔 들자고."
"네~!"
대답과 동시에 이번에도 거뜬히 또 한 잔의 포도주를 비우는 미정이었다.
"한 잔 더 주세요."
"취하지 않겠어?"
"저도 평소에 사양을 해서 그렇지 제법 한다고요."
"알았어, 알았어."
나는 미정의 마음을 어는 정도는 알 것 같아,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포도주 잔을 거듭 비워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미정이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말했다.
"여보, 나 좀 취한다~용!"
"제법 한다며?"
"벌써 우리 다섯 병 비웠당~!"
이상한 소리를 하며 몸이 발그레한 혈색으로 나른해 보이는 미정이었다.
"우리 그만 잘까?"
"네, 여~봉! 나, 안아줘요."
"그래."
나는 미정을 번쩍 안고 침대로 향했다.
"여보!"
"왜?"
"오늘은 내가 당신을 애무해 줄게 용."
"뭐?"
"나 자극 받았거들랑 요."
"허, 참 내.........!"
"대신........?"
"그래."
"저도 쥑여줘요."
"참, 내.........! 알았다, 알았어!"
내가 미정을 침대에 던져놓자 그녀가 발딱 일어나더니 말했다.
"와서 누워보세요."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내심 생각하며 슬슬 모골이 송연(?)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