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74화 (274/322)

< --90년 대-- >

다음 날 아침.

나는 장모의 말도 있고 해, 생각난 길에 신입사원 연수가 진행되고 있는 강원도 상동에 가보기로 했다. 대한중석 상동광산이었던 이곳은 폐광이 되어 지금은 우리 그룹의 종합연수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 그룹은 해마다 상, 하반기로 나누어 신입사원을 공채하고 있는데, 지금은 상반기 공채 인원 8천 명이, 지금 세달 째 이곳에서 연수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이를 비서실장에게 지시하고 돌아서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채 선장 구매총괄 전무를 앞세워 두 명의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모를 여자들이 비서실에 나타난 것이다.

"아.........! 두 분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두 명의 여자를 보는 순간 벌써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두 여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옛날 우리가 강남 반포아파트를 지을 때 새시 영업을 하던 두 아가씨였다. 베란다 새시 샘플을 갖다놓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영업을 하던 아가씨들이었던 것이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배 선화 양과 주 미란 양이 그들이었다.

"오랜만 이예요. 사장님! 아니 회장님! 이젠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어서 채 전무님을 불러내 겨우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서 나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보안을 위해 정문에서 외부인을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세 분은 나를 따라 들어오고, 여기 차 좀 부탁해요."

"네, 회장님!"

나는 세 사람을 회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들 앉아요."

나는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그래, 두 사람은 시집은 갔어요?"

"호호호.......! 그럼요. 우리 나이가 몇 인데요. 벌써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고 그래요."

배 선화 양의 말에 주미란 양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배 양이 계속해서 말했다.

"정말 회사가 몰라보게 달라졌네요. 압구정동에 있을 때는 조립식으로 그나마 건물이 많지도 않았는데, 이곳은 정말 으리으리하네요. 그리고 어제 회장님이 기자회견 하시는 장면도 모두 텔레비전으로 보았어요."

"고맙습니다."

내 말에 아줌마가 된 지금도 여전히 남을 유혹하는 듯한 뇌쇄적인 눈빛으로 배 양이 계속해서 말했다.

"회장님은 지금이나 예나 겸손하신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나라 제일 그룹의 총수가 되셨으니, 우리를 모른다하고 냉대하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했는데 기우였고요. 지금도 한 마디 한 마디 하시는 게 매우 겸손하시고, 우리를 충분히 예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엄청 기분이 좋아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찌 주 양은 한마디도 없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 애가 다하니, 저는 항상 제 대변인을 데리고 다니는 느낌 이예요."

"하하하........!"

말이 없기는 채 전무 또한 마찬가지라 나는 그를 보고도 한 마디 했다.

"채 전무님은 모처럼 옛날 동지들에게 술 한 잔 사셔야겠어요. 내가 사면 좋으나 나는 오늘 상동 연수원에 가면 좀 늦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회식비는 경리부서로 청구하셔도 됩니다."

"회장님 저도 그 정도 판공비는 지급 받습니다."

"하하하.........! 그랬나요?"

이때 차가 들어왔으므로 나는 세 사람에게 차를 권했다.

"자, 한 잔씩 듭시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회장님!"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나부터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내가 물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직접, 그냥 놀러온 것은 아닐 테고?"

"우리 아줌마들도 재취업을 할 수 있나 하고요? 아이들도 다 컸고, 이제 본격적으로 학비도 많이 들어가니, 같이 벌어야할 것 같아서요."

한 마디 하면 몇 마디의 말로 돌아오는 그녀의 답변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 아직 이런 전례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나는 인터폰을 들어 이 의문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무 이사 좀 내 방으로 좀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회장님!"

나는 총무이사가 들어오는 시간 동안 기다리기 무료해져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남편들은 무엇을 하나요?"

내 말에 배 선화 아줌마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하나 물을 걸. 당시에는 일류회사원이라도 해서 결혼을 했는데, 지금은 이만 못하죠."

"저는 공무원 이예요. 그것도 말단. 그러니 그런 생각이 더 들지요."

주 미란 아줌마의 말이었다.

"슬하에 자녀는?"

"1남1녀 예요."

"저는 아들만 둘이라 재미가 없어요.

"배, 주 양인의 대답을 듣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총무 이사가 내방으로 들어왔다.

전 미국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오 영석 차장이 그 성실성을 인정받아, 자리를 옮겨 총무 이사까지 승진을 한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네. 거 잠시 앉아 보세요."

나는 그에게도 의자를 권하며 연이어 물었다.

"우리 회사원 중에 사무직으로 퇴직했다가 다시 복직한 여성이 있나요?"

"아직 그런 전례가 없습니다."

"흐흠.........!"

잠시 생각하던 내가 오 이사를 보고 말했다.

"앞으로는 이제 여성 인력풀도 적극 활용할 시대가 됐어요. 출산 휴직이라든가, 출산육아 후 다시 복직하는 문제 등, 제반 여성들에 대한 인사 시스템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나는 손으로 두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 이사님은 잘 모르겠지만, 앞에 앉아 계신 두 분은 우리 회사에서 초창기 영업을 하던 멤버들 이예요. 복직을 원하니 선처해 주시고, 음.......! 직위나 근무할 부서 등 여러 가지를 한 번 같이 이야기도 들어보고, 고민해 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두 분도 따라가세요. 나랑 더 이상 앉아 있어봐야,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테니까요."

"호호호.......! 고마워요. 회장님!"

"그래요. 어서 가보세요."

"네, 회장님!"

두 여인과 함께 내게 목례를 한 채 전무도 함께 따라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나는 비서실로 나가 김경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됐습니까?"

"네, 회장님! 포트 장에 헬기도 대기 중입니다."

"알았습니다."

대답과 함께 비서실장을 따라 나서던 내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멈칫 돌아서며 말했다.

"항공사 보험 가입 문제로 현대해상화재에서 사람이 찾아올 줄 몰라요. 그러니 그 사람이 찾아오면, 방 차장은 경리이사에게 안내해 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갑시다."

나는 같이 서서 기다리고 있는 김 비서실장을 독촉해 헬기 포트 장으로 향했다. 이때 또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는 김 실장에게 다른 지시를 내렸다.

"실장님은 총무이사에게 연락해 정용훈 이라는 신입사원의 신상명세서와 입사 당시의 평가서 등을 챙겨달라고 해서 가져 오세요. 아니 그럴게 아니라 그것 챙겨가지고 총무 이사도 동행하자고 하세요. 아가씨들은 복직 약속만 하고 다음에 통보한다고 돌려보내라 하고요."

나는 남자 수행비서 두 명의 안내를 받으며 헬기장으로 향하고, 김 실장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하며 모처로 걸어갔다.

두두두, 두두두.........!

헬기가 앉을 자리를 보며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강원도 상동 연수원 현장이었다.

거대 콘도를 방불케 하는 10층짜리 건물 세 개와 연수원으로 보이는 12층 건물, 여기에 강당으로 쓰이는 듯한 체육관 비슷한 모양의 건물 한 동, 그리고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의 녹색 잔디가 깔린 운동장, 그리고 비탈진 골짜기 곳곳에는 군대의 유격장을 방불케 하는 각종 시설물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곧 헬기는 자리를 잡고 고도를 낮추어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때 아닌 헬기의 출현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다른 놀이를 하던 신입사원들의 고개가 치 들려 위로 향했다. 그 중에서 중년인 하나가 잽싸게 연수원 건물로 달려가는 것이 보이고, 헬기는 가벼운 진동과 함께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헬기에서 내린 우리 일행이 막 연수원 건물로 향하는데, 연수원 건물 안에서 일단의 인물들이 줄달음쳐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이 사람 또한 내게 낯익은 인물이었다. 옛 주택공사의 우 면호 부장이라고 아주 충직한 인물이었지만, 주변머리가 없어서인지 좌고우면하지 않는 성품 탓인지, 부장을 끝으로 그곳에서 퇴사를 한 인물이었다. 하루는 그가 나를 찾아와 취업을 부탁하기에, 그때는 막 이 연수원을 지을 때인데, 이때부터 그를 연수원 이사로 발령 내, 종국에는 연수원 원장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된 인물이었다.

"잘 지내셨소?"

"이 얼마 만입니까? 회장님! 지을 때 몇 번 와보시고는 처음 인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바쁘다 보니 자주 찾지를 못했어도 잘 하고 있군요."

"제 천직인 걸요."

"하하하.........! 그렇게 알면 다행이고........ 이들은 언제 수료를 하지요?"

"일주일 정도 더 연수를 받아야 각 계열사로 배치가 될 겁니다."

"그렇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럽시다."

나는 연수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그를 따라 연수원 건물 안으로 향했다.

"옛날 광산의 모습은 하나도 찾을 수 없군요."

"해마다 신입사원들이 늘어나다보니 모두 부셔버리고 이제는 골짜기 비좁을 정도입니다."

"하긴 우리 그룹도 많이 성장하긴 했지요."

"성장 정도가 아니지요. 단 기간 내에 이렇게 큰 기업을 일군 사람은 한국은 물론 모르긴 몰라도 세계사에서도 드물 겁니다."

"동감합니다. 다 한국의 우수한 인력들과 이를 잘 조련해준 연수원장 덕분이기도 하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오늘 생애 최고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연신 고개를 조아리느라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우 연수원장의 눈에는 어느덧 뿌연 습막이 어리고 있었다.

이로부터 나는 연수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그러던 중 나는 전생에 있어서 내가 직장생활 하던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취업을 했지만, 한 삼년 쯤 지나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곳을 내 평생직장으로 삼을 수 있는가?'

'내 인생을 이 직장에서 묻어야 되는가?'

'과연 그래도 좋은가?'

'내 꿈은?'

결국 이대로 이런 직장에서 썩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사표를 내려고 할 무렵, 내가 다니던 광산도 광량이 다해 나와 함께 문을 닫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시절을 회고하니, 이들도 똑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난번 특허를 담당했던 서인석 고문을 떠나보내면서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이들이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어라 하고 일만 시킬 것이 아니라, 재충전의 기회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곧 '안식년제도'가 그것이었다.

거창하게 안식년이라고 할 것도 없이 5년 단위로 심신을 추스르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정 이 곳은 내가 평생 근무할 곳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기회에 일찌감치 정리를 하게 하는 것이 낫고, 장기 근무자에게는 기다리는 희망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간은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5년은 3개월, 10년은 6개월, 15년은 9개월, 20년을 장기 근무한 사람에게는 1년의 휴식 기간을 주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에는 평소 그가 받던 봉급을 전액 그대로 지급해주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수행원들을 돌아보며 이 안건을 제기했다.

"내 얼핏 생각 드는 게 있는데, 여러분들도 안식년 제도는 잘 알 겁니다. 이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탄없이 말해주세요."

'안식년=논다'는 등식이 성립되어서 인지 주저주저 아무도 발언을 안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오해부터 불식시키기 위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안식년이라고 해서 논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열심히 일 해온 당신 떠나라!'

입니다. 재충전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죠. 아무리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5년, 10년 지나면 사람인 이상 지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는 그 기간에 비례해서 휴식을 주자는 취지지요. 내 생각이 어떻습니까?"

"그래도 회사가 발전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면, 이 제도를 반대할 사람은 샐러리맨 치고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김 실장의 솔직한 발언에 다른 사람도 중구난방으로 한 마디씩 떠드는데, 모두 찬동발언 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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