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68화 (268/322)

< --90년 대-- >

아침을 먹은 우리는 곧 작은 유람선에 올라 사이판의 진주라 불리는 마나가하 섬(Managaha Island)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코발트 빛 군청의 바다가 새삼 이곳이 우리나라 바다가 아님을 실감케 해주고 있었다. 15분 정도 걸려 도착한 이 작은 섬에서 우리는 바닷물이 찰랑 거리는 백사장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준비해간 소시지를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고 어른들도 하나씩 가졌다.

그리고 곧 우리는 좀 더 깊은 바다로 걸어 들어가 치즈의 비닐을 뜯어냈다. 그러자 곧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이를 먹으러 달려들었다. 이때 감자기 효정의 뾰족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어른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효정은 자신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왜 그래?"

내가 급히 물었다.

"물고기가 물어요. 아빠!"

"하하하.........! 난 또 뭐라고. 그놈들이 물어야 얼마나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그러니, 사람 놀라게."

"아픈 것 보다는 놀랐잖아요."

"괜찮아. 어디 보자."

나는 효정이 가리고 있는 손을 잡아, 들어 올려 보았다. 별로 표시나지도 않을 정도의 붉은 반점들이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 괜찮아."

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흩어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수정만은 효정의 손을 만져주며 한동안 같이 있었다. 나는 함께 모였다 흩어지는 가족 중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물고기 밥 줘보셨어요?"

"아니다. 이제 해보려고."

"저랑 같이 해보실례요?"

"그러자."

나와 아버지는 비로소 비닐을 뜯어내고 소시지를 군청의 바다에 드리웠다.

역시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름도 모르는 붉고 푸른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흘끔 아버지를 돌아보았는데, 아버지 역시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보며 신기해하며 즐거워하셨다. 그런데 나는 일렁이는 물결 속에서 아버지는 유난히 툭툭 불거진 파란 정맥과 검게 탄 손을 보았다.

"아버지. 요새도 벼농사 지으시죠?"

"그럼, 안 지으면 어쩌려고, 그 아까운 농토 놀리니?"

"올해부터는 남에게 주는 게 좋겠어요."

"뭐?"

못 들어서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묻는 그 물음 속에는 당치않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하기로하고 그 말을 뱉었다.

"올해부터는 밭 2천 평만 소일삼아 부치시고, 나머지는 전부 팔던지 남 주세요."

이를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어머니께서 아버지보다 반 박자 빠르게 대답을 하셨다.

"안 된다. 우리 두 늙은이 시골에서 놀면, 뭐 하니. 너희들 먹는 식량이라도 우리가 대주고 싶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아내들을 불러 모았다.

"이리와 봐, 전부!"

"네!"

효정까지 끌고 오는 수정을 비롯해 세 아내들이 내 곁으로 모여드는데, 아이들도 궁금한지 함께 모여들었다.

"이달부터 부모님에게 드리는 용돈을 월 3백만 원씩으로 인상하도록 해."

"뭐? 그만은 돈을 다 뭐하게? 돈에 쳐죽겠다."

펄쩍 뛰시는 어머니셨다.

"대신 밭이 2천 평 외에는 농사짓지 말라고요. 어머니만 생각하실 게 아니라, 아버지 좀 보세요. 아버지 연세가 올해 딱 60인데, 누가 환갑도 안 된 사람이라고 하겠어요. 솔직히 65세는 보이잖아요. 이게 더 농사짓느라고 햇빛에 타고 고생을 하셔서 그래요. 그러고 아들이 우리나라 제일 갑부인데, 뭐가 답답해서 그 많은 농사를 짓느냐고요. 더 달라면 한 달에 천만 원씩도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 괜히 고집피우지 마시고 제 말대로 하세요."

"에효, 나는 모르겠다."

어머니가 포기하는 발언 비슷한 말을 하시는 데도 아버지는 묵묵부답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도 제 말대로 하세요."

"알았다. 아니래도 동네사람들이 말이 많다. 갑부인 아들 두고 뭤 때문에 그렇게 악착같이 농사짓느냐고."

"제 말이 그 말 이예요.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요. 수 백 년 더 사세요? 한 번 태어났다 가는 인생. 아들 잘 둔 것도 전생의 복이려니 편하게 마음먹고 즐기세요."

"고맙다. 네 말대로 하마."

아버지가 선선히 승낙하시는 바람에 내가 한시름 놓는데 끼어드는 딸이 있었다.

"아빠, 우리 용돈은?"

효정이었다.

"한 달에 얼마 받니?"

"5만 원."

"초등학생이 그 정도면 됐지. 얼마가 더 필요해?"

"최소한 한 달에 10만 원."

"뭐? 그 돈 다 뭐하게?"

"음........! 맛있는 것도 사먹고, 책도 사보고, 남으면 저금도 하고."

"저금은 남아서 하는 게, 아니야. 우선 저금할 액수부터 먼저 두 눈 질끈 감고 저금하고, 나머지를 아껴 써야 되는 거야. 남는 돈 갖고 저금한다고 하는 놈 치고, 평생 제대로 저금하는 놈 못 봤다."

"아빠 말대로 할 테니, 용돈 올려주실 거죠?"

"허, 그것 참!"

내가 난처해서 아내들을 바라보니,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니, 당신들도 용돈 5만원이 적는다는 거야, 뭐야?"

"적은 것은 아니지만, 부잣집 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액수라고는 말 못하죠."

되바라진 소리 잘 하는 수정이 아내들을 대신해 답변을 했다.

"참, 내.......! 당신들마저........! 좋다! 대신 무조건 절반은 저금한다는 조건 하에서 용돈을 인상해 주겠다. 아닌 사람은 종전대로 줄 거고. 알았어?"

"네, 아빠!"

모두 즐거워하는데,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내 6개월 단위로 확인해 볼 거야. 그만큼 통장에 저금이 안 된 사람은 옛날 용돈으로 되돌아갈 테니, 그런 줄 알아."

"네~!"

대답하는 것들이 어쩐지 시원찮다.

"저금하는 재미를 알아야 이다음 커서도 저축을 하는 거야. 낭비하는 사람 치고 이 아빠는 잘 사라는 사람 못 봤어. 이 세상에서 돈을 모으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부류는 그야말로 지독하게 절약해 저축을 하는 사람, 또 하나는 정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 그러니 서민이 돈을 모으는 방법은 정해져 있어. 근검절약 외에는 방법이 없어. 쓸 것 다 쓰고, 즐길 것 다 즐기고, 어느 세월에 돈 모아 부자가 되겠니?"

"용돈 두 번만 올려줬다가는 날 저물겠네요."

수정의 말에 내가 고함을 질렀다.

"모처럼 아비가 되어 설교하는데 뭔 말이 그래."

"알았어요."

입을 삐죽빼죽하면서도 더 이상의 큰소리가 날까봐 참는 듯한 수정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말했다.

"할 이야기 다 했으니 각자 가서 놀아."

그렇게 말하고 나는 더 이상 물고기와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섬 주변을 거닐었다. 나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27도 전후로 그렇게 덥지 않은 날씨에, 내려쬐는 태양을 온전히 받으며, 천천히 섬 둘레를 걷기 시작했다.

이런 나를 급히 뒤쫓아 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미정이었다.

"여보, 우리 친정부모에게도 같은 금액으로 지급하는 거죠?"

"지금까지 공평하게 지급했지, 언제는 내가 차별 했어?"

"너무 많은 금액이다 보니 혹시 몰라서요."

"참, 내........."

"고마워요. 여보!"

그런데 말끝이 이상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별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래?"

"너무 너무 고마워서 그렇지요. 당신 잘 만나 우리 부모가 호강한다는 생각을 하니, 당신에게도 너무 너무 고맙고, 또.........."

머뭇머뭇 더 이상 말을 못하는 미정이었다.

"또, 뭔데?"

"그런 당신을 만난 나도 자랑스럽고 대견해요."

"참, 내.........!"

어이없는 감탄사를 토해 낸 내가 그녀의 기분을 달아나게 하는 말을 했다.

"나 혼자 사업 구상 좀 해야겠으니, 당신은 아이들 하고 가서 놀아."

"쳇! 알았어요."

미정이 아이들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혼자 계속해서 섬 둘레를 걸었다.

"이 시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 화두를 잡고 나는 집중해서 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곧 우리 그룹의 실상과 우리나라 경제의 모습, 정치, 더 나아가 세계의 경제는 물론 국제정세가 파노라마 펼쳐지듯 펼쳐지며 명멸해 갔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곧 소련 연방이 완전히 해체되며 급진 개혁파인 옐친이 집권하여, 소련식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서방의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히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물가는 100배 이상 폭등하고, 90% 이상의 국민은 생활고에 허덕인다.

러시아는 국제적으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여기저기에 손을 내밀고, 거리에는 거지가 득실거리며, 젊은 여자들은 달러에 팔려 외국인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또한 일거리를 찾아 고급 두뇌들의 급격한 대 탈주가 이루어진다.'

'이 변화는 이제 소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냉전시대의 지속된 군비경쟁으로 인해 소련이 먼저 나가 떨어졌지만, 이는 미국 군수산업의 결정타로도 작용한다. 경쟁할 적성국이 없으니, 이는 자연스럽게 무기 감소를 초래하고, 이는 곧 미국 군수업체라는 거대 공룡들이 무너지며 짝짓기 철이 도래한다는 반증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주먹을 굳세게 움켜쥐고 모종의 결심을 확고하게 하였다. 나는 곧 씩씩한 걸음으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백사장으로 걸어갔다.

"재미있니?"

"네, 아빠!"

"아무리 재미있어도 이제 돌아가야 되는데 어쩌지?"

"한 시간만 더 놀다가요, 아빠!"

물고기에게 물렸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효정까지 더 놀기를 바라니, 바로 돌아가길 원하는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흔히 쓰는 말로 '끝나지 않은 연회 없다'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또 아빠가 보다 재미난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을 약속하마."

"정말이죠? 아빠!"

"아빠가 언제 약속 안 지키는 것 봤니?"

"알았어요. 아빠! 그만 가요."

아이들도 이제 돌아갈 마음을 굳히는데 아내들이 아직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그만 갑시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소? 다음에 또 더 재미있는 곳으로 놀러가기로 하고."

"알았어요."

미정부터 마음을 굳히고 대답하니 다른 아내들도 아이들을 챙겨 하나 둘 백사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는 가야겠는데, 어쩌죠?"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가자. 나는 벌써부터 집에 있는 김치와 된장찌개가 그립다."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두 분을 천천히 따라갔다.

그로부터 1시간 후.

호텔에서 이른 점심을 먹은 우리는 곧 푸른 바다에 한 점의 녹색 띠를 발치 아래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제법 커보이던 섬조차도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오직 작은 녹색점 하나로 보이는 사이판.

이 거대한 우주 속에 나라는 존재는 정말 미미한 존재지만, 내가 조국에 회귀한 이래 지금까지는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 쳐왔지만, 비로소 나의 사명을 자각한 나는, 오늘 조국의 미래를 위해 중대 결심을 하고, 푸른 산호초 군락지도 가지 못하고 섬을 등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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