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雄飛-- >
내가 집으로 퇴근하니 세 부인이 날카롭게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TV는 켜져 혼자 떠들고 있는데, 내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일제 나를 바로보고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그녀들이었다. 거기에 콧바람 소리까지 크게 내니 콧물이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흥.........!"
그때 TV에서 왜 그녀들이 그렇게 나오는지를 알려주듯 끝 부분을 방영해주고 있었다.
"강 회장님 개인 신상에 대한 질문입니다만, 부인이 셋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번에는 왜 혼자 출장을 가셨는지, 적적하지는 않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음.........! 제 입장에서는 적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면 답이 될까요?"
"왜 그렀습니까?"
"부인을 셋씩이나 두고 살아보세요. 그러면 알게 될 겁니다."
"하하하.........!"
기자들의 웃음소리가 자신들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 얼굴마저 상기되는 그녀들이었다. 거기에 이어 아나운서의 '구태를 벗지 못한 재벌총수의 기업관'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생산성을 올려야 된다는 내 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내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TV 꺼!"
"왜 언성은 높이고 그러세요. 장난도 못 쳐요."
미정의 항변에 내가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 당신들이 장난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걸. 그렇지만 지금 TV보라고. 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잖아. 장난에 같이 응할 기분이 나겠어. 그러고 왜 그 많은 방송 중에서 하필 우리 그룹과 적대적인 방송을 봐."
"그래야 당신에게 조언이라고 하죠. 주위에는 모두 칭찬일색 아첨꾼뿐인데. 그런데 당신이 틀린 말 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생산성만큼 임금인상을 요구하라는 것이. 그럼, 일 안하고 자꾸 월급만 올려주라는 거예요. 뭐 예요."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어쩌면 생각하는 것도 나랑 비슷해. 여기서 이들의 논조는 그게 아니잖아. 한국 기업의 한계를 고임금에서 찾지 말고 다른 데서 찾아야 된다는 것이지. 이를 테면 정치헌금 같은 것은, 근로자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짓이지."
"그렇게 안 하면 기업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나는데도 말이죠?"
"그러니까 후진적인 정치형태도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만큼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다고 보면 돼."
"갈수록 사업하기 힘들겠네요."
"갈수록 기업인들에게도 높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거야. 그러니 당신들도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알았어요."
이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명희가 한마디 했다.
"우리 그룹 같이 높은 보수를 주는 데가 어디 있다고 저런 보도를 하는 거예요. 최소 다른 기업보다 1.5배는 더 주는 것 같은데."
"내가 다른 기업들의 생각을 대변했으니 하는 말이지. 우리 그룹과는 상관없이."
"좀 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분야로 업종을 자꾸 옮겨갈 필요가 있겠네요."
조용히 있던 수정의 말에 내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쪽으로 가고 있잖아, 우주 항공 산업이 대표적인 산업이지."
"방법이 없을 까요? 모두가 잘 사는 방법이."
한숨을 쉬며 하는 미정의 말에 내가 답했다.
"점점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빠르게 옮겨가야 되는데, 문제는 그들의 오랫동안 축적된 기술을 하루아침에 따라잡는 다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우리 기업만이라도 빠르게 변신을 하고,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총력을 다 하는 수밖에."
"식사 하셨어요?"
"아니."
"얼른 씻고 오세요. 같이 식사하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회가 끝나고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을 불러들였다. 비서실장이 수많은 신문 중 몇몇 신문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경향신문, 한겨레, MBC에서 어제 회장님의 인터뷰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습니다."
"무슨 내용이지는 안 봐도 알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언론이라고 해서 적의를 가져서는 안 돼요. 몸에 좋은 약은 다 쓴 법이잖아요. 그들의 말 중에 우리가 반성할 것이 있으면 겸허히 받아들여 수용하도록 해요. 그래야만 우리 그룹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항공기를 생산할 대지는 조사가 되었나요?"
"경남 사천군의 땅을 유력한 용지로 보고 좀 더 자세한 사항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기획실장의 말에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항공사 사장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이 시발(李 始發) 씨라고, 외국의 유명 항공사에서 오랫동안 CEO로 있다가, 금번에 퇴직을 한 사람이 있어서, 정보실에서 좀 더 알아보고 있다는 총무 이사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철저한 검증을 해서 큰 하자가 없다면 경륜을 살리는 것도 좋겠지요."
이때 내부선이 짧게 울자, 비서실장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받아보겠습니다."
"그래요."
몇 마디 나눈 비서실장이 말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좀 뵈었으면 한다는데요."
"그래요? 시간 되면 바로 오시라고 하시죠. 지금 급한 볼 일은 없잖아요."
"네, 회장님!"
비서실장이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연이어 내부선이 울었다. 현대 정주영 회장, 대우의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항공기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30분 단위로 이들과 시간 약속을 하도록 했다.30분 후.
이건희 회장이 내 집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이번에도 큰 건을 하나 하셨더군요."
"이제 시작입니다."
나는 말을 하며 이 회장을 자리로 안내했다.
"부럽습니다.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긴 느낌 이예요."
이 회장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아직 우리도 초기 단계인데........"
"삼성항공이라고 우리도 시작은 했습니다만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해서 회장님의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을 수 없을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 했듯 우리 그룹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엔진이나 전자시스템 등 항공기의 주요부분만 개발하고 나머지는 국내기업과 중지를 모을 생각입니다."
"해서 드리는 말이오. 우리는 날개부분에서도 꼬리날개 부분, 출입문, 연료탱크에 강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만은 우리에게 맡겨줬으면 고맙겠습니다."
"일단은 내부에서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 가능한 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헌데 어제 발언 말이오."
"말씀 하시죠."
"경제계를 대변해서 말씀하셨지만, 회장님과 그룹에는 별로 좋은 인상을 못 주었을 것인데........"
"뒤에서는 아우성치면 공개석상에서는 아무도 똑 부러지게 말을 못하니 제가 총대를 멘 것뿐입니다."
"우리야 속이 후련하지만 득보다 실이 많지 않을까 해서 걱정이오."
"할 말은 하고 이로써 한국의 경제가 좀 더 발전적 방향으로 같으면 바람입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한 면만 보고 너무 외골수로 나가는 사람도 있으니 문제지요."
"십인십색이라 했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지만 그 중에는 귀 기울일 점도 있을 것이니, 거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저는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보기보다 흉금이 넓습니다. 젊은 사람이 말이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무튼 삼성도 꼭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바쁘실 텐데, 그럼, 이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 회장을 보내고 현대의 정 회장을 연속해서 만났다.
"하하하.........! 잘 지냈소? 강 회장!"
"오늘은 사돈이라 안 하시는 걸 보니, 공적인 이야기로군요."
"공과 사는 엄연히 가려야지."
내가 안내를 하니 않아도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정 회장이 말했다.
"부럽소, 부러워. 연일 큰 건만 터트리니........"
"이제 첫 단추를 끼운 것뿐인데, 너무들 앞서나가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섭니다."
"그게 다 한국의 제1그룹의 위상 아니겠소? 대정이 하면 뭔가 다를 것이다. 사실 또 규모도 범인의 예상을 뛰어넘고."
"그러니 부담도 큽니다."
"그러나저러나 좀 전에 보니 삼성의 이 회장도 다녀가는 것 같던데?"
"네. 항공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정 회장이 말했다.
"우리도 '현대우주항공'이라고 거창하게 간판을 건 기업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투자를 못했소. 해서 이번기회에 어떻게든 대정의 등 뒤에 올라타서라도 발전을 시키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소?"
"주요부품 몇 가지를 맡아 함께 발전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오."
"현대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아직 특별히 내세울 게 없소."
"알겠습니다. 일단 서로 협조하는 것으로 하고 정확한 것은 나중에 추후 논의하기로 하죠."
"그럽시다. 그럼. 어제 기자회견 말이오."
이때 다시 내부 전화의 신호음이 들려와 내가 전화를 받으러 가며 말했다.
"회장님, 잠시 만요."
"그럽시다."
내가 전화기를 집어 드니 비서 유진선 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 대통령의 전화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웬일로 직접........ 알았소. 이쪽으로 돌려주시오."
"네, 회장님!"
"전화 바꿨습니다."
"강 회장이오?"
"네, 각하!"
"어제 보도를 보았소. 전투기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바로 좀 들어오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전화를 끊고 나서 난처한 표정을 짓자, 정 회장이 말했다.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거요?"
나의 통화내용을 듣고 유추한 정 회장이 내게 물었다.
"바로 들어오라니 참..........!"
"우리 이야기도 대충 끝난 것 같으니 가보시오. 괜히 찍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 먼저 일어나리다."
"한 번 더 모시겠습니다."
"전화만 주오. 내 득달같이 달려올 테니."
"알겠습니다. 회장님!"
문까지 따라 나간 내가 정 회장에게 말했다.
"바로 출발해야 하니 멀리 못 나가겠습니다. 회장님!"
"우리 사이에 뭔 격식을 그렇게 따지오. 어서 볼 일 보시오."
"네, 그럼.........!"
비서실에서 목례를 하는 것으로 정 회장을 보낸 나는 곧 비서실장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기획실장도 불러 함께 청와대 들어가는 것으로 하고, 유 양은 대우 김 회장과 통화해서 사정 얘기를 하고, 다음에 뵙는 것으로 양해를 좀 구하시오."
대표로 비서실장이 답을 하고 나는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주워 입으려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이 청와대 현관에 도착하니 노재봉 비서실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시오. 강 회장!"
서울대학교 교수 출신이기도한 그가 점잖은 어투로 나를 환영했다.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바로 모시고 오라고 해서 내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었다오."
"가시지요. 실장님!"
"그럽시다."
우리는 곧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 되었다. 대통령은 정말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집무실 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이상훈 국방부 장관이 조용히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