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雄飛-- >
여자로서의 꿈은 접었다.
오직 사업가로서 남자들과의 진검 승부가 남았을 뿐이다.
이 미연은 문득 눈을 떠서, 어둠 속에서 형광으로 빛나는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새벽 5시였다. 이제 알람을 해놓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눈이 떠지는 시간이었다. 이 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용변을 보고, 샤워를 하고 욕실을 나와, 방에 불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화장대에 앉아 간단하게 기본 메이크업만 했다. 수수했지만 본연의 미모로 자신이 보아도 아직은 어디가도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얼굴이 거울 저편에 있었다. 이제 겨울이 깊어져 이 미연은 두툼한 파커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와 굽 낮은 신발로 골라 신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이 미연은 비상구 불빛을 따라 29층에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찬바람이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거리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졸고 있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벤티레이터는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 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비상 소화전은 정상으로 작동을 하는지, 간혹 군데군데 놓인 분말소화기는 아직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지, 하다못해 고장 난 비상구의 등이나 복도 등은 없는지, 일일이 점검을 하며 그녀는 29층에서부터 1층까지 내려왔다. 그런 시간이 무려 한 시간이었다. 비로소 프런트 밖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그녀는 우산꽂이로 가 비상 우산은 비치되어 있는지, 비상용 지팡이는 잘 준비되어 있는지 일일이 확인을 했다.
비상 지팡이를 비치하는 호텔은 세계 어디를 가도 없었다. 자신이 호텔업을 천직으로 삼은 이상 이 미연은 세계의 수많은 호텔을 다녀, 그곳의 온갖 서비스를 체험하며,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도 그 많은 호텔 중 지팡이를 비치한 곳은 없었지만, 이 북경의 대정호텔은 있었다.
한 번은 이 미연이 도어맨들과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차번호를 외우고 그 주인을 기억하는 내기였다. 하루 종일 그들과 같이 호텔 앞에 내리는 손님들을 맞으며, 그들의 넘버와 그 주인의 이름을 외웠다.
그렇게 일주일을 생활하며 월요일부터는 단골로 오는 손님들의 차번호만 기지고도 그 사람의 직업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면 되는 것이 내기의 포인트였다. 예를 들어 내리는 손님이 사업가면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응대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 내기에 이 미연이 졌지만, 이 내기로 인해 호텔 도어맨들의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이 내기 이후 도어맨들은 드나드는 사람들의 차령번호와 함께 그 신분을 외우려 애쓰니, 단골손님들은 그들의 응대에 자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 과정에서 이 미연은 한 노신사가 지팡이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지팡이도 준비하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1층 프런트에 마련된 커피숍도 달라졌다. 이 미연이 북경의 호텔이란 호텔의 커피 맛을 전부 보고, 이 커피는 어느 호텔의 커피다 하고 맞출 정도가 되니, 이들 또한 최상의 맛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단연 이 호텔이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커피숍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텔 내에 있는 식당도 많은 변신을 했다. 이 미연이 간혹 한밤중에 잠이 깨어나면, 그길로 식당을 샅샅이 뒤졌다. 청결하지 못한 곳은 없는지, 가스 밸브는 제대로 잠갔는지, 냉장고에 든 음식의 유통기한은 지켜지고 있는지, 하다못해 행주의 청결 상태까지 꼼꼼히 따져, 일일이 메모를 해서 그 현장에 붙여놓고 다녔다.
이러니 이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맛 또한 이 미연이 끌고 다니며 이 호텔 이 음식을 맛봐라 하니, 요리사들도 요리를 더욱 개발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 미연의 바지런함과 치밀한 경영으로 인해, 외부 공식적인 평가는 오성 급 밖에 없었지만, 호텔 내부 인들의 평가 기준으로는 7성급 최고급 호텔로 평가되었다. 오늘도 파김치가 되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그녀에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네, 이 미연입니다."
"북경지사장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내일 오전 10시에 회장님께서 북경을 방문하신답니다."
"네?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 양반이 언제는 사전 예고하고 방문했습니까?"
"하긴, 그렀네요."
"철저히 준비해주세요."
"네."
그길로 전화를 끊고 나니 이 미연은 맥이 탁 풀려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간 잊고자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이 모든 것이 허사였던가? 그의 방문 소식에 온 몸의 기운이란 기운이 모두 다 빠져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감에 이 미연은 차라리 분노가 치밀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그길로 욕실로 달려가 덜덜 떨며 찬물을 온 몸에 뒤집어썼다. 눈을 떠서 탁상시계를 보는 순간, 이 미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뒤척이다가 다섯 시가 넘어 깜빡 잠이 들었다 싶은 순간, 눈을 떠보니 오전 8시 35분이라고 시침과 분침은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겁지겁 양치와 세면, 샤워를 하고 오늘은 특별히 평소 하지 않던 향수마저 겨드랑이와 옷소매 끝에 살짝 살짝 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옷맵시를 점검한 그녀는 모처럼만에 하이힐을 신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때부터 안절부절 시간을 보내다가 9시 10분이 되자, 그녀는 차를 끌고 북경
공항으로 달렸다. 공항에 도착한 이 미연은 서둘러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공항 청사 내부로 들어갔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오늘 따라 차가 밀려, 그녀는 벌써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들어오는 회장 일행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따라 기분 나쁘게도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부인도 하나 보였다.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황수정이라고, 옛날에 탤런트도 한 일이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여인이었다.
"여어, 이 사장! 잘 지냈나?"
"네, 회장님!"
얼결에 대답을 했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해야 할지 입에서만 맴돌고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언어들이었다.
"내 보고 받았어, 북경 지사장으로부터. 아주 잘 하고 있다고 하더구만. 세계 최고의 호텔로 키워놨다면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열혈 전사로 거듭 태어난 것을 축하하네!"
말과 함께 손을 내미는데 이건, 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업가로 대하니 기분이 묘한 이 미연이었다.
"내 잠자리는 준비 됐겠지?"
"네, 회장님!"
"나중에 또 보세. 내 바빠서 말이야."
스치듯 지나가는 회장을 이 미연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90년 1월 초.
내가 90년 새해 벽두부터 중국을 방문하게 된 것은, 그간 1년여 넘게 잘 진행돼오던 한중 수교가, 교착상태에 빠져 삐걱거리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북경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니, 그간 정치적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입었던 원자바오는 물론, 총리 이붕(李鵬:리펑)마저 승용차를 대기시켜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강 회장님!"
"어서 오시오. 강 회장!"
전자는 원자바오의 인사였고, 후자는 이붕의 나에 대한 인사였다. 원자바오가 전과 달리 나에게 이렇듯 깍듯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89년 그러니까 작년 6월에 중국에서는 중대 변고가 발생했었다. 북경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천안문 시위 사태가 그 변고였다. 이 시위로 말미암아 이에 동조했던 조자양 이하 권부가 물러나고, 이때부터 장쩌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곧 그가 상해 시장과 당 서기에서 일약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것이다.
그에 반해 원자바오는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해, 원래는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어야 옳았다. 이에 긴급 원자바오가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또 강택민에게 그의 선처를 호소했다. 이를 강택민이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바람에, 중앙 정계에서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작금이었다. 이런 이유로 원자바오는 이후 내가 깍듯이 대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들의 인사에 답례를 하고 곧 바로 승용차에 올라 중남해로 향했다. 중남해에 도착하니 이제 중국 권부의 1인자가 된 강택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오. 자, 어서 안으로 듭시다."
"네, 총서기님!"
나는 곧 강택민의 안내를 받으며 그의 집무실로안내되었다.
"거기 앉읍시다."
총서기가 되더니 좀 더 거만해진 강택민이었다.
말없이 내가 자리에 앉자 뒤로 비서 겸 통역 방령이 자리를 잡았다.
"수교 문제 때문에 방문을 하게 되었다고?"
"네."
"그건 한국 정부에서 나설 일이지. 그 문제를 왜 강 회장에게 떠맡긴단 말이오?"
"답답하니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풀리나? 자신들이 결단해야할 문제를........."
"제가 듣기로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대만과 단교를 하라고 요구하셨다면서요?"
"우리의 주장이 틀렸소? 이 원칙은 일본, 미국의 수교에도 적용된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준칙이오. 이것을 한국 정부에게만 예외를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6.25참전에 대한 사과 문제는 에둘러 라도 표현함이 양국이 하루라도 빨리 수교를 하는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급할 게 없으니 마음대로 해보라 하세요."
여전히 뻗대는 강택민이었다. 이에 내가 안색을 찌푸리고 있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 문제를 자꾸 거론해 괜히 우리의 의마저 상하게 하지 말고, 강 회장의 사업 얘기나 합시다."
"그러지요."
나는 마지못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토록 원하던 대정의 북경의 상호문제도 원만히 해결이 되었고, 또 우리가 남에게는 절대 내주지 않던 우리의 심장부 북경에 까지, 자동차 공장 허가를 내주었는데도, 대정의 공장 건축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뭐요?"
"흐흠........!"
강택민의 추궁에 나는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우리의 자동차 산업은 놀라운 변신과 발전을 거듭해, 이탈리아 내에서는 피아트를 제치고 부동의 판매고 1위를 자랑하게 되었고, 유럽 시장에도 푸조나 독일의 폭스바겐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게끔 성장하였다. 이는 미토 이후 발표된 준 중형차 줄리에타의 성공적 판매에 힘입은 바가 컸다. 나는 이 여세를 몰아 중국에 꾸준히 투자를 모색해온 결과, 방금 강택민이 말하듯 북경에 연고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시점에서 미국 진출을 더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미국으로도 자동차 산업을 진출시킬 야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그 공장용지까지 모색하게 되니, 장차의 미국 정계 움직임을 감안해, 빌 클린턴이 현 주지사로 있는 아칸소 주가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북경진출이 유보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과연 우리가 미국에 5만대, 중국에 5만대의 생산 공장을 설립하면, 십만 대를 다 팔 수 있을까 하는 검토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연이 되고 있는 것을 오늘 강택민이 날카롭게 추궁을 하니 답변이 궁한 나였다. 그렇다고 중국의 자체 시장이 큰 것도 아니었다. 아직 국민소득이 낮아 중국에 마이카 붐 시대가 오려면 한참 멀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순간 지금까지 미뤄오던 결정에 용단을 내렸다.
"하겠습니다. 대신 중국정부도 좀 양보를 해주세요."
"허허.........! 무슨 그렇게 갑작스러운 결정을.........! 좋소! 우리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소?"
"유감 표명은 아니더라도 과거의 불행했던 일을 딛고, 선린관계로 나아가자 정도면 어떨까요?"
이것이 장래 베트남과의 수교에도 원용되었다.
"허허, 참.........! 좋소! 강 회장이 어렵게 문제를 풀어가는 데, 나도 화답하는 차원에서 그 정도 선에서 문구를 조정하라 이르리다."
"감사합니다. 총서기 동지!"
"하하하.........! 강 회장으로부터 그 말을 들으니 지난 세월이 새롭구료."
여기서 내가
'제 예언이 적중 했지요?'
하고 내 자랑을 한다면 못난 사람이다.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으니, 나는 다만 빙그레 미소만 띠고 아무 말을 안 했다.
그러자 강택민이 스스로 그 이야기를 했다.
"정말 강 회장의 예언이 놀라우리만치 적중하는 데는 나도 간혹 깜짝 깜짝 놀랄 데가 있소. 앞으로 내 운명은 어떻게 되겠소?"
"등소평 동지께서 가지고 계신 군사위 주석 직까지 무난히 승계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비로소 명실공이 16억 인구의 1인자가 되는 것 아니오?"
"미리 축하드립니다. 주석 동지!"
"하하하.........! 듣기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소! 뭐 바라는 것이 없소?"
"없습니다. 양국이 하루 빨리 선린 우호관계를 맺고, 지금처럼 둘 간의 우정이 변치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하하.........! 역시 강 회장은 보면 볼수록 신뢰가 가고 매력적인 사람이오. 이런 사람을 내 어찌 제1인자가 된들 등질 수 있겠소. 아무튼 방문 기간 동안은 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할 테니, 원하는 만큼 쉬었다 가시오."
"감사합니다. 총서기 동지!"
"하하하.........! 좀 이르지만 우리 점심이나 함께 합시다."
"감사합니다."
나는 강택민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안내하는 대로 오찬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