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35화 (235/322)

< --雄飛-- >

동양강철의 박 사장을 배웅하고 비서실에 들어오니, 혜리 양이 송화기 부분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나에게 물었다.

"회장님, 문정용 이라는 사람인데 어떻게 할 까요?"

"문정용........?"

내가 그의 이름을 되 뇌이며 그의 기억을 떠올리려는데 혜리 양이 말했다.

"전 주일 특파원이었다는 데요?"

"아하! 그렇지?"

나는 나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큰 소리를 내며, 그에 대한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사업 초창기 내가 일본에 갔을 때 통역을 자처하며 새시와 유리 공장을 안내하는 등,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그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바꿔줘 봐요."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나는 혜리 양이 내미는 전화기를 받아 통화를 시작했다.

"네, 강 대정입니다."

"오래간만입니다. 강 회장님!"

"잘 지내셨고요?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그것 때문에 전화를 드리지 않았겠소. 한 번 뵐 수 있을까 하고요?"

"음.......! 잠시 만요."

나는 잠시 이후의 스케줄을 생각해보았다. 특별히 바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지금 오실 수 있으면 우리 회사로 오세요. 회사가 어디 있는지는 아시지요?"

"아, 아다마다요. 대그룹의 본사 사옥을 몰라서야 어디 기자라고나 할 수 있겠어요. 금방 가리다. 그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니 한 30분만 기다려 줘요."

"알겠습니다. 기다리죠."

나는 전화기를 아직도 내 옆에 단정히 서 있는 혜리 양에게 넘겨주며 생각했다. '오늘 오후의 일정은 옛 인연들을 만나는 날'인가 보다 하고.

내가 내 집무실로 돌아와 30분 정도 기다리니, 정말 혜리 양의 안내를 받은 문정용 특파원이 내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래간만의 해후에 느끼는 첫 감상은 이제 그도 어느덧 초로의 신사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시절보다는 많이 늙어 있다는 것이 내 솔직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에게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어, 나는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으며 이를 속으로 삭여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문 형님!"

"와~! 이거 그 지체에 형님 소리를 들으니 영광입니다."

나는 그를 가볍게 포옹했다가 떼어놓으며 자리를 권했다.

"혜리 양은 차 좀 내오고, 형님은 거기 앉으세요."

"그럴까?"

문 특파원이 내가 권한 맞은편 소파에 앉는데, 혜리 양이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차는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블랙에다 설탕 두 수픈 만 넣어줘요. 이제 나이가 먹으니 크림이 소화가 잘 안 되네요."

"알겠습니다."

단정히 고개를 숙여 보인 혜리 양이 물러났다. 나는 문 특파원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신다고요?"

"잘렸어."

"네?"

"주미 특파원을 끝으로 귀국해서 한 한 달 남짓 근무했나? 어느 날 회사가 출근해 보니 대기발령이 나 있더군. 이게 나가라는 소리 아니면 뭐겠는가? 아직 창창한데 말이야."

"형님 나이가 올해 몇 이시죠?"

"오십 둘이야. 우리나라 나이로 그렇고, 만으로 따지면 갓 오십을 넘었다고. 비정한 세월이지."

"흐흠.........!"

잠시 생각을 하던 내가 물었다.

"아직 더 일을 하고 싶으세요?"

"당연하지. 육십 칠십까지라도."

그의 말에 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왜 잘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한국일보에서도 최고참 측에 속하니, 많은 봉급 아끼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오랜 한 직장에서의 근무로, 혹시 형님이 나타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흐흠.........!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군. 그러고 보니 나도 반성할 점이 많군."

"현 직급이 뭐였습니까?"

"부장이었어. 이사로 진급 안 시켜준다고 많은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

'잠시 생각하던 내가 물었다.

"지금도 이사로 진급하고 싶으세요?"

"언감생심 새 직장 찾기도 바쁜 놈에게........ 그런 생각을 버린 지 오래일세. 이제 꺾어지는 나이기도 하고."

"한창 원숙할 나이이기도 하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새삼 힘도 나고 말이야."

이때 혜리 양이 주문한 차를 들고 들어왔으므로, 우리는 이를 받아 잠시 입을 축이고 다시 대화에 들어갔다.

"우리 회사 무역부문에 근무를 시키고 싶은데, 의향이 계십니까?"

"나야 다시 근무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영광이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이제 큰 놈이 대학에 다녀 한창 학비가 들어가."

"직급은 부장인데요."

"차장도 괜찮아. 나에게는 황감한 일이야."

"그럼, 말이죠."

내가 여기서 일단 말을 끊자 그의 눈이 기대로 반짝이며 내 입만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무역 실무를 익혀야 할 테니, 6개월간의 수습을 거쳐, 장기를 살려 해외지사로 나가야겠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이를 말이오. 내 극한의 오지라도 갈 수 있는 사람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제 그 문제는 그만 거론하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문정용 씨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 각도로 정중히 내게 허리를 굽혔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례는 비례라고........"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는 것이 확실시 되자, 분명하게 말투부터 고치는 그였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을 일어 영어에 두루 능하기 때문에 통역으로 쓸 생각도 잠시 잠깐 했었다. 그러나 내 옆에는 파릇파릇한 영계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칙칙한 중늙은이를 옆에 두고 싶은 생각이 없어, 금방 이를 머리에서 지운 나였다.

"음........ 정식출근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라도 바로 출근하도록 하세요. 좀 전에 내가 말했듯이 소속 회사는 대정무역이고, 직급은 부장입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또 다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 문정용 부장이었다. 이를 손을 저어 만류한 내가 말했다.

"옛날 기억나십니까? 내가 새시와 유리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친절히 안내해 주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얼마나 자상하게 안내를 해주는지 내가 데리고 간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죠. 그 바람에 그 아가씨는 일회성 통역으로 그치고 밥벌이를 못 했으니, 하하하.........!"

나의 호탕한 웃음에 계면쩍게 따라 웃는 그보다도, 내 머리에는 지금은 북경에 나가있는 이 미연 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드는 나였다.

"그 때 그것이 내게는 별일 아니었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하긴 그 인연이 아니었으면 회장님께 전화 걸 처지도 못 되었죠."

"저는 요. 저랑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실례된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급적 안 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뭡니까? 한마디로 의리가 있다는 것이죠. 참 요즘 세상에는 보기 드문 귀한 품성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정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건방지게 해봅니다. 그 사람들이 이런 회장님의 품성을 알기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회장님을 도왔을 것이고, 또 회장님은 그런 사람들을 기꺼이 포용하고,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 주었을 테니까요."

"너무 낯 뜨겁게 왜 이러십니까?"

"제 말이 어디 한 치의 어긋남이라도 있습니까?"

"사살이라 쳐도 제 면전에서 너무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됐나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말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인간인 이상, 나를 칭찬하는 말이 듣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고 잘못됐다는 보고나, 실패했다는 보고는 듣기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가급적 듣기 싫은 말이라도 경청하려 애썼고, 내 앞에서 아첨하는 사람들을 경계해 왔다. 그것 또한 내 성공에 분명 일조를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말로 기분이 좋아진 내가 말했다.

"기왕 오신 길에 오늘 술 한 잔 어떻습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회장님과 같이 술자리를 할 수 있는 것만도."

"오늘 술자리까지는 옛날의 문 특파원이시고, 저는 그냥 강대정입니다. 해서 회포를 한 번 풀어봅시다. 동의할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내일 부터는 깍듯이 회장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자, 차 더 식기 전에 드십시다."

"네, 회장님!"

이렇게 해서 우리는 퇴근 후, 이화정으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내 더 젊었던 날의 추억을 함께 마셨다.

집에 들어오니 술을 일찍 시작해서인지 채 10시가 안 되었다. 그런데 집안이 절간 같이 고요했다. 분명 장모님들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안 내려가셨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내가 인터폰을 누르면 대부분을 미정이 받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일층에서 주무시는 미정의 모친이 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분명 의혹이 일었지만 나는 묻지 않고 현관문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다정이 엄마가 골이 좀 아프다고 해서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네."

"네~!"

대답을 길게 끌며 나는 내심 생각을 했다.'

며칠 대 식구들에 부대껴서 그런가? 특히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심적 부담을 준 것인가?'내 추측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와 생각이 정 반대였다. 내가 집에 도착해 인터폰을 누르는 순간 떠오르는 소회가 있었다. '오늘 부모님이 분명 내려가셨으니, 집에 안 계시겠지.' 이 생각을 하자 나는 어딘지 쓸쓸하고 허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아무 내색을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옛날 노인네들처럼 이마에 흰 끈을 질끈 두른 미정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를 맞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골 아파?"

"네."

"약은 먹었어?"

"아니요."

"왜?"

"저 약 먹는 것 싫어하잖아요."

"그 점은 나랑 똑같군. 닮을 걸, 닮아야지."

내 말에 흐릿하게 웃은 미정이 말했다.

"나도 옛날 사람인가 봐요. 약 안 먹는 것 하며, 머리에 이 띠를 두른 것 하며. 아무리 잘 살아도 촌사람에, 옛날 사람들의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으니........"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잖아?"

"뭐예요. 그럼........"

"진정하라고. 절대 그럴 나이는 아니지. 그렇지 여보........?"

나는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길게 끌며 입을 그녀의 볼로 향했다.

"징그럽게 왜 그래요?"

"이제 징그러운 거야."

"당신 오늘따라 왜 그래요. 뭔 말을 못하겠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게, 당신에게는 분명 스트레스였지?"

힐긋 내 눈치를 보던 미정이 고개를 외로 꼬고 말했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내일 장인과 장모님들 결과 나오지?"

"네."

"상관 말고 무창포나 화진포에 가서 며칠 쉬었다 와."

"누가 그럼 그분들 뒷바라지를 해요?"

"안 해도 할 사람 많거든. 그런 의무감 비슷한 마음부터가 스트레스를 불러오는 거야."

"가도 내일 결과나 보고서요. 그리고 아버님이나 어머님한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항상 어렵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돼요. 그러다가 내려가시니 긴장이 풀려서 이 모양 이예요. 당신한테는 미안해요. 안 모시자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니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다 보통 사람들의 심리일 거야. 자책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며칠 푹 쉬었다 오라고."

"고마워요. 여보!"

"또........!"

"헤헤헤........! 당신 몇 마디 말에 골 아픈 게 다 달아났네요. 아까 해주시려던 뽀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피하기 없기?"

"네~!"

내 입술이 정식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이런 기묘한 입맞춤은 거의 드문 일인지라, 그녀도 긴장을 해서인지 입이 실룩실룩 했다. 이 모양을 보고 나는 대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이에 나를 밉지 않게 눈을 흘기던 그녀가 돌연 나를 끌어안고 기습 키스를 해왔다. 그리고 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는 과감하게 내 손을 이끌어, 그녀의 가슴 속에 손을 넣어주었다. 나는 웬 횡재냐 싶어 그녀의 가슴을 한동안 주물렀다. 그녀의 호흡이 곧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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