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한 포석-- >
이튿날 나는 군사위 부주석 양상곤을 만나고 밤에는 조어대에서 만찬을 대접받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특별히 양상곤에게 사의를 표했다. 우리가 대련에 100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조선소를 100년간 임차해 조선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제1도크가 완성이 되었어도, 일감이 없어 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산의 영도조선소도 매각이 되지 않아 그냥 일을 하고 있고, 광양만에도 그 시점에는 1도크가 완공되어 LPG운반선(VLGC)을 건조하고 있어서, 대련조선소까지 일감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러자 양상곤의 결단으로 중국 해군은 우리에게 물자보급용 군수 지원함 2척을, 한화 총300억 원에 발주해 일감 부족을 해소해 준바가 있었다. 물론 우리가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조선업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외국 조선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을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제의 만찬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했던 것이다. 아무튼 지금 대련조선소는 2도크까지 완공이 되었고, 3도크를 건설하면서 컨테이너
선도 건조하고 있었다. 즉 유럽선사로부터 4700TEU(1teu는 길이 6m)급 중형 컨테이너선 4척을, 2억5천만 달러에 수주해 대련조선소에 짓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의 광양조선소에서는 아시아지역 선주 두 곳으로부터 각각 4척 씩 총 8척의 8만4000㎥급 초대형 LPG운반선(VLGC: Very Large Gas Carrier)을, 약 6억 4000만 달러수주해 건조 중에 있었다.
이것이 납기를 맞추어 제대로 인도된다면 각각 2척씩의 추가 옵션 물량도 수주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호조건의 수주였다. 이 8척의 선박은 90년 하반기까지 모두 인도될 예정으로 지금 한창 건조 중에 있었다. 지 모두 인도될 예정으로 지금 한창 건조 중에 있었다. 이날 나는 대련조선소를 한 바퀴 돌아보고, 천진에 준공된 연 100만 대 생산능력의 컬러TV브라운관 공장도 시찰을 하였다. 저녁 늦게 북경으로 돌아온 나는 내 호텔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소련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서는데, 지금까지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이미연 호텔 사장이 나타났다. 나를 만나길 꺼려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았더니, 정말 아팠는지 창백한 얼굴에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이 모습을 대하는 나로서는 매우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지만, 많은 수행원이 둘러싸인 나로서는 할 말이 제한되어 있었다.
"몸 관리 잘 하시오."
"네, 회장님!"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회장님!"
고개를 끄덕여 답하는 나로서는 헤어지면서도 함부로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부장급을 바로 호텔 사장으로 발령 냈다고 둘 간의 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설왕설래 말이 많은 판에, 더한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아 나는 바로 승용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내가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자 가스프롬 의장이자 산업부 장관이 된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 직접 영접을 나왔다. 또한 한인수 대정무역 모스크바 지사장도 몇몇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서구인답게 굵은 선의 생김인 체르노미르딘 산업부 장관을 맞아, 가벼운 포옹과 함께 굳은 악수를 교환했다.
"먼 길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한국은 봄이 왔겠지만 모스크바는 아직 한겨울이니 추위에 좀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오."
내가 다시 방문한다고 하자, 한국에 대해 제법 공부를 했는지 한국의 날씨 이야기까지 제법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이렇게 답변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에너지 분야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분야의 협력을 기대하겠습니다."
"바라는 바입니다. 추우니 어서 승용차에 오르실까요?"
"잠시 만요. 예까지 마중 나와 준 우리 직원들도 격려 좀 해주고요."
"하하하........! 내 잠시 그들을 잊었습니다."
호탕하게 웃은 체르노미르딘 산업부 장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나는 곧 한인수 지사장을 비롯한 상사원들의 손을 잡으며 그들을 격려해 마지않았다.
"먼 이국땅에서 수고들 많소."
"아닙니다. 회장님!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오."
나는 차례, 차례 상사원들의 손을 잡아주고는 곧바로 체르노미르딘이 제공한 승용차에 올랐다. 변덕스러운 북방의 날씨답게 오늘의 날씨도 별로 좋지 않았다. 간혹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 굵은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 영웅기념관 앞에 있는 소련 정부 종합청사로 향했다. 우리의 승용차가 청사 정문 앞에 멎자 사전에 조율된 일정에 따라 보리스 엘친 정치국 후보위원이 현관 앞에 서 있다가 바삐 걸어왔다. 엘친은 아직 소련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장차를 위해 내가 접견을 요청해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훗날 체르노미르딘이 엘친 대통령 하에서 총리를 지낼 정도로 둘 사이의 친분이 남달랐으므로 그를 만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무튼 내가 승용차에 내리자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온 엘친이 벌써 내 앞에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강 대정입니다."
"보리스 엘친이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특별히 강 회장님이 청해 뵐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소식을 들었는지 몰라도 제가 만나는 인물 중에 거물급 아닌 사람이 없고, 아니면 크게 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면 내가 크게 된다는 말 아니오? 내가 지금은 별 볼일 없거들랑요."
"하하하.......! 그렇게 해석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은근히 기분 좋아지는데, 그건 그렇고 날씨가 차니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곧 청사 안으로 들어가 보리스 엘친의 방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나는 엘친과 소련과 우리 그룹 간의 협력을 약속하고, 일정에 따라 나는 곧바로 크레물린 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따뜻이 맞아주었다. 그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검박한 편에 속했다. 개혁개방주의자 답게 실용적인 듯했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초면의 인사를 나누었다.
"대정 그룹의 강 대정입니다."
"허허........! 내 소개도 해야 하오? 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요. 자, 거 앉읍시다. 서로 시간을 절약하는 게 좋지 않겠소?"
"맞습니다. 저도 허례는 싫어하는 편입니다."
"제대로 된 사업가라면 그래야지요.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그래,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요?"
"네, 서기장 각하!"
이렇게 예우를 표한 내가 고르바초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 빙빙 돌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대정그룹은 소련과 현 에너지 분야에 국한된 사업을 장차는 전분야로 확대시키고 싶습니다. 특히 극동의 삼림, 어업, 농업 개발은 물론 무궁무진한 여타 자원도 개발해 그 이익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자면 서로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양국 간의 분위기가 필수입니다."
이때 아름다운 아가씨가 차를 내왔으므로 나의 이야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물론 나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이오노바 김 과장에 의해 통역되고 있는 것이다. 소련 측에서도 고려인 남자 통역에 의해 통역이 되고 있었다.
나는 내 온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진한 갈색의 차는 무엇인지 몰라도, 약간 떫은맛이더니 잠시 후에는 진한 감칠맛이 우러났다. 이에 나는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해서 저는 양국 간의 수교를 전격적으로 제안하는 바입니다."
"허허........!"
나의 말에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고르바초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한국이 주최하는 88올림픽 참가마저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강 회장의 말씀은 너무 앞선 감이 있습니다. 우선 이렇게 합시다. 내 강 회장의 열의를 봐서, 88올림픽은 참가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참가한다는 것은 동구권도 참가를 약속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아무튼 이렇게 하고 수교 문제는 양국 간의 우호가 좀 더 진전된 뒤에 논의하는 것으로 합시다."
"약간은 실망이지만 진일보된 각하의 용단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수교 전에라도 우리 그룹은 제가 언급한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적극 검토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각하의 많은 도움을 바래겠습니다."
"사실 에너지를 비롯한 여타 자원 값이 바닥이니 우리 경제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럴 때 한국의 제1그룹 아니 세계적인 기업이 우리에게 투자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투자를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내 강 회장이 오신다고 해서 오찬을 준비하라 했는데, 이제 때도 됐고 하니 자리를 좀 옮기실까요."
"감사합니다. 각하!"
우리는 곧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제의에 따라 오찬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이 자리에는 내 수행원들은 물론 체르노미르딘 산업부 장관은 또 아직 후보위원에 지나지 않는 엘친마저 참석하여, 고르바초프 당 서기장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체르노미르딘 가스프롬 의장과 우리의 협력 사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모스크바에서 1박한 우리는 곧 스위스로 날아갔다. 스위스에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파리로 가기 위한 경유지로 스위스를 택한 것뿐이었다.
내가 프랑스를 방문하는 목적은 그간 물밑에서 조율되던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우리 일행이 프랑스 드골 공항에 내리니, 피에르 빌제 알스톰(Alstom)사(社) 회장과비에를 베레고부아 재무장관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환영합니다. 강 회장님!"
"반갑습니다."
나는 두 사람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그들이 제공하는 승용차 편에 올라, 프랑스 정부종합청사로 향했다.
우리의 차가 현관에 도착하니 미셀 로카르 총리가 마중을 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양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겸양하며 총카르 총리가 이끄는 대로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형식적인 오찬을 갖고 곧바로 재무부 장관실로 자리를 옮겼다. 비에를 베레고부아 재무장관은 88년에 재무장관에 취임한 이래 인플레 억제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아무튼 나와 피에르 빌제 알스톰사(社) 회장은 그가 보는 앞에서, 대정중공업이 알스톰사(社) 지분 25%를 인수하는 계약서에 정식으로 서명을 했다. 총 자본금 8억9천만 달러 중 25%인 2억2천2백5십만 달러를 우리가 알스톰사에 납입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 우리가 알스톰사 지분을 인수할 의향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프랑스 생나제르 아커야즈 조선소 지분 75%를 소유하고 있었던바, 프랑스 정부는 이곳에서 자국 군함도 건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그룹이 이를 인수하자, 프랑스 정부는 돌연 우리의 방산산업 참여에 난색을 표시하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실무진을 통해 프랑스 정부 측에 우리의 프랑스 방산 산업 참여를 정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프랑스 정부 측에서 들고 나온 것이 알스톰사 지분 25%를 인수해 달라는 것이다.
이 당시 알스톰사는 프랑스의 정체된 철도차량 사업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이것을 프랑스 사회당 정부는 손도 안대고 코를 풀려하는 것이다. 이에 나는 프랑스 측 아커야즈 조선소를 폐쇄할까 까지 검토하다가, 알스톰사의 고속전철 즉 TGV를 생각하고는 적극 인수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때부터 나는 이범석 실장을 프랑스에 파견해 적극 협상에 임하는 한편, 나는 노태우 대통령 출마 예정자와 만나 경부선을 고속전철화 하는 방안을, 선거공약에 넣도록 분위기를 띄웠다. 결국 이 협상이 원만히 타결되어 우리는 알스톰사의 지분 25%를 획득하는 조건으로 아커야즈의 프랑스 방산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참여를 약속받았고, 장래에는 알스톰사와 대정중공업이 한국고속철도 사업에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알스톰사는 이 고속철과 같은 차량사업 분야만이 아니라 각종 발전소 건설에 탁월한 기술력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국민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업을 외국인 나에게 긴급 수혈 받는 그들의 심정은 매우 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