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10시 50분.
시간을 맞추어온 듯한 느낌을 강하게 풍기며 그라나다 한 대가 별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 또한 올 시간이 임박하자 세 부인을 데리고 미리 주차장에 나와 있었다. 내 여동생과 아버지 어머니는 다른 곳에 계셨다. 세 부인은 그라나다가 등장하자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 보다는 그라나다 차 자체를 보고 고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다는 현대가 독일의 포드의 부품을 들여다 조립한 차로 국산화율은 23%에 불과한데, 이나마도 마음대로 조립생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오일쇼크 이후 기름을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2,000cc 급 이상의 대형차는 아예 생산을 불허했다. 소형차는 마진이 없어 각 사가 대형차 생산을 자꾸 청원하자, 정부에서는 수출 5대를 하면 한 대의 대형차를 생산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었다. 그래서 들여온 것이 현대는 이 그라나다였다.
아무튼 당시 소형차 수출이라는 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아 밑지고 팔고 있는 처지였다. 이의 보전을 위해서 대형차에 마진을 많이 붙이고자, 현대에서 1,350만 원에 판매를 허락해달라고 하자, 정부는 1,154만 원에 판매하도록 했는데, 이 가격 중 700만 원이 각종 세금이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도 항상 생산이 미처 수요를 따르지 못해 대기자가 넘쳐나던 차종이었다. 그런 이 차도 올 7월24일 현대가 그랜저를 생산해 냄으로써 그 수명을 다 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런 차마저도 나는 아직 없었다. 비서실이고 어디서고 간에 대형차로 교체하라고 졸랐지만, 나는 이를 무시하고 아직도 포니 투를 타고 다녔다.
회장이 이러니 우리 그룹은 전부 포니2 일색이다. 7월 달에 그랜저가 출시되면 그 때나 한 대 살 생각이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에서 다섯 사람이 내렸다. 한 사람은 내가 사진에서 몇 번 본 일이 있는 정 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고, 또 한 사람은 사진에서 본 정몽윤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여자가 하나 남자가 둘로 각각의 비서관에 운전기사로 보였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
"네. 강 회장님이시죠? 애 아부지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먼 길에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몽윤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갑시다."
"네, 회장님!"
"돌계단이 좀 가파르니 어머니 모시고 천천히 오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이 정도는 나 혼자도 충분하답니다."
"보기에도 정정해 보이십니다."
"그럼 가실 까요? 참 정신도....... 제 부인들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비로소 서로 인사를 하는데 변 여사의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8남 1녀 중, 위로 4남 1녀까지는 변 여사의 자식이지만, 정몽준 씨부터 내리 4형제는 전부 배가 다를 정도로 남의 자식이니, 나를 좋게 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서로 수인사가 끝나자 내가 한 발 앞서 돌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정몽윤도 어머니를 부축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다하니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이를 받아들이는 변 여사였다.
'몽윤을 효자로 보이기 위함인가?'
나는 내심 생각했다.
기사까지 셋이 뒤를 따르고 세 부인이 가장 늦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계단을 다 오르자, 어머니 아버지가 서계셨다가 변 여사를 맞았다. 어머니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어서 오세요. 마중이 늦었습니다."
내가 고의로 시킨 일이었다.
"별 말씀을........"
"먼 길에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버지도 점잖게 한마디 하셨다.
"오는 동안 경치가 좋아서 아주 즐거웠습니다."
화답하는 변 여사였다.
"오! 마치 사진에서만 본 외국의 성채 같군요. 아주 멋지게 잘 지어놓으셨네요."
변 여사의 칭찬을 어머니가 받았다.
"아들 덕분에 저희들도 호강을 한답니다."
"아드님이 효자인가 봐요."
"아주 잘 합니다."
"제가 우리 바깥양반에게 듣기로도 사람 됨됨이가 되었다고, 평소에도 칭찬이 자자하시더라고요."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살짝 목례까지 하며 받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까요?"
나의 안내에 천천히 내실을 향해 움직이는 변 여사 일행이었다.
어머니 뒤를 따르던 몽윤이 말했다.
"봄이면 정말 장관이겠습니다. 아! 멀리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군요."
"짓느라고 고생 좀 했습니다. 자주 들려 감독을 했거든요."
"아주 잘 지어놓으셨네요. 부럽습니다."
"하하하........! 현대 가도 멋진 별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멋지지는 않습니다. 투박합니다."
"그래요?"
말을 하다 보니 어느덧 현관이었다. 내가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거실 끝에 서 있던 경순이 정중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인사를 드렸다.
"어서 오세요."
변 여사의 발이 우뚝 멎었다. 직감적으로
'이 아가씨로구나!'
하는 느끼는 모양이었다. 몽윤도 지긋이 경순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경순이었다.
"이런 실례가......."
비로소 인지를 했는지 한 마디 한 변 여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내가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넓은 거실에 다과상이 차려진 소파로 안내를 했다.
좌석은 일부러 소파 2개씩 놓아 각각 한 집에서 두 사람만 앉도록 했다.
나머지는 별도의 방에 다과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사전 각본에 따라 미정이 수행원들을 별도의 방으로 몰고(?) 갔다.
이때 아이들은 나의 엄명에 의해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나의 안내로 창을 등지고 경순과 어머니가 나란히 앉고, 변 여사와 몽윤은 바다가 보이는 쪽 즉 내실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리 배치도 나는 용의주도하게 했다. 햇빛의 각도까지 신경을 쓴 것이다. 지금 시각이 거의 11시 쯤 되었을 텐데, 정면으로 햇빛이 들이치지는 않지만, 색시가 만약 투과되는 햇살에 눈살이라도 찌푸리면 이는 곤란할 일이었다. 그리고 빛의 각도는 어깨 좌측 뒤로 받는 광선이 경순에게는 가장 유리했다.
그래야만 콧날이 오뚝 서고 얼굴 형체가 가장 아름답게 표출된다. 그래서 경순은 해를 등지고 앉았고, 어머니 좌측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되자 양쪽의 어머니는 어머니끼리, 몽윤과 경순이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초면이라 모두 서먹서먹하시겠지만 천천히 과일과 음료수라도 드시면서 즐거운 대화가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저는 이만 빠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강 회장님도 의자 하나 갖다놓고 앉으세요. 정말 초면들이니 감초 같은 분이 한 분이라도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자리를 뜨려하자 나를 만류하는 변 여사였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다. 촌에서 농사만 짓다 온 나로서는 도대체가 이런 좌석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하실 이야기 없으시면 농사짓는 이야기라도 하시면 됩니다."
"하하하.......!"
"호호호.......!"
나의 농담 성 발언에 금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어쨌거나 돌아가는 낌새를 보니 내가 빠지면 분위기가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 나는 벽 쪽으로 치워놨던 소파의자 하나를 갖다 놓고 양인의 중간에 갖다놓았다. 그러자 꼭 내가 헤드테이블에 앉은 격이 되었지만 나는 이를 사양하지 않았다. 중재자 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모님! 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물어보셔도 됩니다."
나의 말에 비로소 경순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떼는 변 여사였다.
"약학과를 나왔다고 들었는데, 특별히 그 쪽으로 간 이유라도 있습니까?"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이 앉아 있던 경순이 살짝 시선을 들어 변 여사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와 답변을 했다.
"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시집을 가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첫째네 둘째네 하며 재력을 다투는 오빠가 있는데, 굳이......."
"그것은 오빠의 재산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오빠의 도움을 받기는 싫었습니다."
"호~! 얼굴은 곱상하니 부잣집 맏며느리감인데 당찬 구석이 있군요."
아무런 답을 않는 경순이었다. 이때 몽윤이 입을 열었다.
"충북대 약학과라하면 서울대만큼이나 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하셨습니까?"
"촌에서야 잘한다고 했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오빠한테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참, 강 회장님도 서울대 공대를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고 일까지는 서울대 상대 갈 실력도 되었어요. 그런데 그때 지금의 내자를 만나는 바람에 좀 공부를 게을리 해서, 하향 지원을 한 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안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머리가 좋다고 제 자랑 좀 했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나의 말에 다시 한 번 좌중에 웃음이 터지고 번졌다.
"어머니도 묻고 싶은 게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그럴까? 음.........!
사위!"
"무슨 벌써 사위예요?"
"이런, 실언을........."
"하하하.........!"
"호호호.........!"
어머니의 돌출발언에 좌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제가 물어보지요. 몽윤 씨?"
"네, 회장님!"
이 사람이 나보다도 두 살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 지위가 대기업의 회장인데다 만약 경순과 혼인을 하게 되면 손위 처남이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깍듯한 정몽윤이었다.
"특별히 생각한 여성관이라도 있습니까?"
나의 질문에 경순도 살짝 고개를 들어 몽윤을 유심히 한 번 살펴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현모양처입니다."
"말이 쉽지 가장 어려운 게 현모양처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때 변 여사가 경순에게 시선을 주고 질문을 했다.
"색시는 집안에서 살림만 할 수 있어요?"
"남편의 능력이 충분하다면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음........!"
가벼운 멘트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변 여사였다. 좋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곤욕스러운 사람은 누가 뭐래도 경순이었다. 경순에게 있어서 오빠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려서부터도 이들의 우상이었다. 오늘도 우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말했다.
"사람의 품성은 한두 번 만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교언영색을 할 수도 있고요. 해서 그 사람을 잘 알려면 주위의 평판을 탐문하는 수밖에 을 할 수도 있고요. 해서 그 사람을 잘 알려면 주위의 평판을 탐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고요. 그러니 이만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당사자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나의 말에 변 여사가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종내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이에 내가 황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몽윤 씨! 뭐 하세요. 데리고 나가 해변이라도 거닐며,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지 않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네!"
작게 대답하고 나에게 시선을 던지는 경순이었다.
그대로 따라도 되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무리 오늘은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지만 바닷바람이 찰 테니, 둘 다 두텁게 입고 해변으로 가도록 하세요."
내 말에 멀찍이 주방의 커튼 곁에 서있던 미정이 급히 시누이의 임시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챙겨왔다. 그리고 경순에게 들고 가 아예 입혀주는 미정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별로요."
생긋 웃으며 미정이 경순의 얼굴을 살피듯 들여다보았다. 꼭 놀리는 것도 같생긋 웃으며 미정이 경순의 얼굴을 살피듯 들여다보았다. 꼭 놀리는 것도 같지만 그런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곧 내 생각이 증명되었다. 미정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파이팅 이에요!"
주먹 쥔 손을 당겨 까지 보이는 미정 때문에 빙긋 웃고 마는 경순이었다. 곧 두 사람이 현관을 벗어나고 이들을 거실에서 보낸 두 어머니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두 분만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자리를 비켜드리는 의미에서라도 주방으로 들어가 점심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을 했다. 밥만 되어 있었다. 각종 재료는 모두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직 냄새 때문에 요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마마 아주머니(곰보)에게 본격적으로 점심 준비를 하도록 이르고, 세 부인도 이를 거들도록 했다. 총감독, 총연출은 여기까지만 이다. 나는 곧 현관을 벗어나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내 손을 떠났다. 다만 두 사람의 의사를 존중할 뿐이라고.
둘은 서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몽윤이 청주로 내려가고 때로는 경순이 서울로 올라와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요즈음은 몽윤이 일방적으로 청주로 내려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관여치 않고 둘의 하는 양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86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집무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관심 있는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한중(韓重) 조공(造公) 누가 인수하나'라는 타이틀 하의 기사였다. 경영난이 심각한 한국중공업과 (대한)조선 공사를 정부당국은 내일부터 공매 절차를 걸쳐 3개월 이내에 새 주인을 확정 발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국중공업에 입찰에 참여한 업체를 나열해 놓았다. 그 이름의 첫 번째로 우리그룹의 이름인 대정을 필두로 삼성, 럭키금성, 쌍용, 한국
화약, 동부, 현대가 제일 끝에 언급되어 있었다.
현대가 이렇게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제일 끝에 언급되어 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화학조정당시 이를 현대그룹의 하나인 현대양행에서 운영하고 있다가 정부에 빼앗긴 기업인데, 이 당시에 현대 측과 정부의 출자기관으로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산업은행, 한국전력, 외환은행과의 정산이 아직 끝나지 않고 다툼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당시 제3자라 할 수 있는 영화회계법인의 감사 결과에 의하면 현대는 9백8억 원을 더 받아야 한다하고, 주주기관 측은 2백75억 원만 더 주면 된다고 하며,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라 주주기관측이 현대의 참여를 못마땅하게 생며,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라 주주기관측이 현대의 참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공사는 누적적자가 2천8백78억 원에 이르고, 자산보다 부채가 2천5백45억 원이 더 많은 중병환자라 누가 더 주주기관 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부채를 떠안느냐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그룹 외에 사업다각화를 꾀하려는 진로와 한진 만이 입찰에 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입찰의 응찰과정에서 전략기획조정실에서는 조선공사의 입찰에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입찰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개진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내가 강력하게 우겨 입찰에 응한 상태였다. 신문을 내려놓은 나는 곧 인터폰을 들었다.
"네, 올리비아 리(Olivia Lee)입니다."
"한중과 조공의 입찰 관련자료 챙겨서 비서실장, 기획실장과 함께 들어와요."
"네, 회장님!"
인터폰을 내려놓은 나는 잠시 올리비아 리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기획2팀장으로 옮겨간 구인철 과장의 후임으로 미주지사에서 본사 비서실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이탈리안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2세로서, 여인치고는 드물게 조지워싱턴 대 및 대학원 국제관계학 석, 박사를 딴 재원으로, 미주지사에 과장으로 특채되었다가 금번에 차장으로 승진하면서, 본사 비서실 2팀장으로 발령이 난 사람이었다. 김경제 비서실장이 이 과장 아니 지금은 올리비아의 관계를 고려해, 확대 개편된 비서실 제1팀장이자 차장으로 승진한 이 미연 차장을 배려해, 아예 여성을 2팀장으로 택한 때문이었다.
올해 나이 29세인 그녀는 머리만 어머니를 닮아 동양인의 풍모를 일부 지녔을 뿐, 외모는 이탈리아인 아버지를 닮아 완전 서양인이었다. 그런데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왕년의 여배우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외모에, 동양인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탁월한 몸매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도발적인 D컵 가슴에 잘록한 허리, 갑자기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히프는 과히 압권이라 할 만 했다. 어찌됐든 그녀에게 배당된 금번 관련서류를 가지고 그녀는 두 명의 실장과 함께 내방으로 들어섰다.
"거기들 앉아요."
나는 세 명을 소파에 앉히고 보던 신문을 들고 천천히 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신문의 타이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의 결과를 어찌 예상해요?"
잠시 타이틀 기사를 읽어본 셋이 답변을 궁구하는데, 올리비아 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 다 우리 그룹이 우선 협상대상자로 선정되리라 봅니다."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나요?"
"제가 로비를 특별히 했으니까요."
"하하하.......!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실은 인수를 희망하는 업체 중 우리 그룹이 제시한 가격도 가격이지만, 제일 적격이라고 관련주주기관들이 판단할 것이라 믿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팀장의 말을 받아 김재익 기획실장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인수를 해도 문제는 조공입니다. 해운이 호경기라 하나 조공 놈들의 하는 짓들을 보면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수주 받은 것마다 하자가 걸려 말썽이니........ 부채도 심각하지만 저는 이게 더 마음에 걸립니다."
"흐흠.......!"
김 기획실장의 발언에 잠시 침음하던 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됐든 우리가 우선협상자로 지정됐을 때를 상정해, 2차 응찰준비를 철저히 해주세요."
"네. 회장님!"
내 지시에 일제히 순응하는 세 사람이었다.
"오늘은 이 때문에 불렀어요."
내 말이 축객령인 것을 알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올리비아 리만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발언을 했다.
"제가 볼 때는 나라에서 오래 경영을 하다 보니 기강이 해이해졌고, 기술력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이 두 문제만 해결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문제는 인수를 하고 난 후 토론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회장님!"
생긋 웃음을 짓고 올리비아가 일어서는데, 이를 서서 지켜보던 두 실장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는데 말이다.
사실 나도 그의 웃음에는 가슴이 진탕되어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는 편이니, 사내치고 그녀의 웃음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이 몇 있을까 싶긴 하다. 아무튼 그들이 나가고 나자 나는 이를 인수했을 때에 대비한 경영 정상화 방안을 미리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의 예측대로 우리는 양 공기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한중은 우리와 삼성이 선정되었고, 조공은 우리와 한진이 선정되었다. 이제 각각 2파전으로 좁혀진 금번 인수전에서 누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느냐는 것과 누가 더 확실한 경영정상화 방안을 제시하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이중 단연 가격이 최우선이겠지만 말이다. 이번 양 공기업의 민영화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한 달 후인 4월 초에 그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의 예상대로 둘 다 우리가 양 공기업의 최종 인수자로 결정이 되었다. 모두 2파전으로 진행된 이 인수전에서, 우리는 자산 2조원이 넘는 한중을 1,557억 원을 제시했고, 삼성은 1,500억 원을 제시한 결과였다. 여기에 조건이 붙어있으니 현대 측과 미 정산 금액을 양사가 원만히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 단서 조항을 원만히 해결치 못하면 인수 자체가 취소될 수 있다는 구절이 명문화 되어 있어, 앞으로 우리에게 불리한 싸움이 되게 되었다.
또 조공은 총 부채 2,878억 원의 48%는 주주기관이 자체 상각하되, 나머지는 5년 거치 10년 균등분할 상환 조건을 제시한 우리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추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진은 끝까지 총부채의 50% 삭감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내 뜻대로 덩치 큰 양 공기업을 인수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현대와 우리의 관계가 껄끄러워졌다. 미수금 정산문제로 얽힌데다가 드디어 우리 그룹이 자본금이 큰 양 사를 인수함으로써 대우와 현대를 제치고 재계 서열 1위로 올라선 것까지, 모든 신문에 대문짝하게 실리니 묘한 감정싸움까지 얽히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재계서열 1위는 현대, 대우, 대정, 삼성, 럭키금성 순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하긴 순 자산만 따지면 오래 전에 우리그룹이 재계 서열 1위였다. 우리가 그간 불리했던 것은 기업공개를 하지 않아 외형이 크지 않은 탓이 제일 컸고, 다른 재벌들과 달리 선단식 아니 백화점식 경영을 하지 않은 영향이 제일 컸다. 아무튼 이 문제로 인해 현대와 우리의 미묘한 감정싸움이 엉뚱한 데까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몽윤과 경순의 만남에도 영향을 주어 지금은 둘 다 냉각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이 몇 개월 사이에 나는 정보 팀을 대폭 보강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큰 폭으로 정보원들을 영입했는데, 그 숫자가 물경 250 명에 달했다. 해외 파트는 세계 정보 분야의 오랜 베테랑은 물론 중간 퇴직자들을 대거 영입한데다, 국내는 정보원 외에도 분석 팀 기능을 50명 더 충원하는 바람에, 정보실이 이제는 웬만한 나라의 국가정보원 못지않은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대는 정보전의 시대다.
대정무역의 종합상사원들이 보내오는 각국의 정보는 물론 자체 정보원들이 보내오는 신속한 정보에 의해 우리는, 그 사업에 진출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은 물론, 정권의 장래까지 예측할 정도의 거대한 정보 체제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국내정보원들 중 일부를 몽윤과 경순에게도 붙여 이들의 진척 상황을 수시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그냥 단순한 남녀 간의 연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 그룹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행했던 것이다. 이런 기류 속에 퇴근을 앞둔 내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뜻밖에도 몽윤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오?"
"형님, 오늘 시간 좀 내주세요."
어느 순간부터 몽윤은 나이 어린 나를 형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물론 경순과의 관계 때문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무슨 일로?"
"모시고 술 한 잔 하고 싶습니다."
"애로 사항이라도 있는 것인가?"
"네."
"알겠네. 그럼, 7시에 무교동에 있는 이화정으로 오도록 해요."
"고맙습니다. 형님!"
"이따 봅시다."
"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내 방문을 열고 비서실로 나갔다. 모두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을 흘깃 보니 5시 정각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 미연 차장과 김 비서실장만이 아직 아무런 준비 없이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내가 한 마디 했다.
"이 차장과 실장님은 퇴근 안 합니까?"
"아직 잔무가 남았습니다."
"회장님, 오늘 술 한 잔 어때요?"
김 실장이 그 이유를 말하는데, 이 차장은 엉뚱한 제의를 하고 있었다.
"동석 좋지요?"
올리비아 리마저도 이 차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 여인이 온 뒤로 비서실의 분위가 확 바뀌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정시만 되면 본인부터 퇴근하는 것은 물론 부하들까지 일제히 내모니, 이 차장도 자신의 부하들을 정시 퇴근시키고 있는 요즈음 분위기였다. 이에 김 비서실장에 몇 번 올리비아를 나무랐으나 법정 시간 근무 다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덤비니, 김 실장도 처지가 난감해 이제는 포기한 모양새였다. 아무튼 둘의 제안에 내가 답을 했다.
"방금 내 약속을 잡았어요. 다음에 한 잔 합시다."
"네, 회장님!"
이 차장이 서운한 표정으로 답하고, 올리비아는 눈을 찡긋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여튼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관계로 나는 다시 내 집무실로 들어와 보류된 결재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저녁 7시 5분 전.
나는 이화정으로 들어섰다.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몽윤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형님!"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이때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이 마담이 내게 인사를 해왔다.
"이 마담은 시집 안 갑니까?"
"적당한 남자 있으면 하나 소개시켜주세요."
물론 전주 남편이 있는 그녀였다. 재일동포였다. 그녀의 역공에 내가 답했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어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
얼굴이 벌개져 화를 내는 몽윤이었다. 이에 반해 이 마담은 정몽윤을 자세히 살피니 묘한 대조를 이루어 그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미소를 띤 내가 말했다.
"준비는 됐지요."
"7 번방에 모두 세팅 되어있습니다."
"가시죠."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는 이 마담이었다. 나와 몽윤은 이 마담을 따라 7 번방으로 들어갔다.
"전과 동인가요?"
"술과 안주는 전처럼 가져오되 아가씨는 필요 없소. 대신 내가 부르면 이 마담이 잠시 상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퇴물도 필요할 때가 있다니 영광입니다."
방긋 웃은 이 마담이 준비를 위해 방을 나갔다.
둘만 남으니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내가 물었다.
"무슨 곤란한 일인데 그래요?"
"냉각기를 좀 가지라고 하니 저로서는 난감합니다."
"회장님이요?"
"네!"
"그렇게 안 봤는데, 회장님께 그런 면모가 다 있었어요?"
"저도 의외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긴 요즈음은 왕 회장이라 불릴 정도로 파워가 센 정 회장이었다. 이는 그룹 전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계에서도 적용되어 가정 내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였다. 자식이라도 말을 안 들으면 유산 상속을 전혀 못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자식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를 현대 화재해상보험의 부사장으로 내정한 것을 보면 그에게 이 회사를 물려줄 복안인 모양이지만, 그의 마음먹기 따라서는 언제든지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의 명에 따르지 않는 자식이 없다고 보면 되었다.
"양 그룹 간에 조금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알고 있죠?"
"물론이죠."
요즈음 양 그룹의 실무진 간에는 한국중공업의 정산문제로 팽팽한 기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는 주주기관측이 제시한 금액만 주려고 하고, 현대 측은 영화회계법인의 결산 내용대로 달라고 주장하니, 합일점을 찾기 어려워 지루한 협상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언론마저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감정싸움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양 그룹이었다.
재계 서열 1위를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를 빼앗긴 현대재계 서열 1위를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를 빼앗긴 현대로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양, 더욱 굳어진 자세로 협상에 임하고 있는 요즈음의 현대였다.
"실무자들 맡겨놨더니 아무 것도 안 되고 있어요.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요. 회장님을 찾아뵙고 직접 담판을 짓던지 원........"
"제발 그렇게 좀 해주세요. 이러다가는 그간 친밀한 양가가 원수지간이 되겠어요."
"그 문제는 내게 맡기고 오늘은 사내 대 사내로써 호쾌하게 술이나 마십시다."
"좋습니다!"
이때 이 마담이 웨이터들과 함께 술과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이를 본 몽윤이 웨이터들에게 선뜻 팁을 주었다. 그것도 통 크게 5만원씩이었다. 받은 웨이터 둘이 깜짝 놀라 몽윤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얼른 90도 각도로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 회장 아닌데? 부 사장이오, 부 사장!"
"그게 뭔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들에게는 회장님보다도 더 위대하게 보이시는데요."
이쯤 되면 아부도 급수가 있다고 제1급은 되리라.
이들의 아부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그가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이 마담이 나섰다.
"제가 먼저 두 분께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그러세요."
나의 말에 술병을 이 마담에게 넘기는 몽윤이었다.
"이 잔 잡수시고 더욱 사업 번창하시고 만수무강하세요."
"젊은 사람보고 만수무강하라면 얼마를 더 살라는 이야기야?"
이 마담의 말을 나도 농으로 받았다.
"백세! 아니, 천세!"
재치 있게 대답하고 생긋 웃음을 짓는 이 마담이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요염했으므로 몽윤이 잠시 넋을 잃었다. 이에 내가 따라 놓은 술을 들어 그의 잔을 툭 치며 말했다.
"자, 건배!"
"아, 네, 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몽윤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나를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양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몽윤이 먼저 건배사를 읊조렸다.
"그보다 나는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군."
"그렇지요? 형님!"
금방 희색이 만면해 잔을 신나게 부딪쳐오는 몽윤이었다.
"건배!"
"건배!"
나의 선창을 따라하며 입을 술을 가져가는 몽윤이었다. 그나 나나 화통하게 스트레이트였다. 전혀 얼음조각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 이 마담도 한 잔 받아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형님, 제 잔 한 잔 받으세요."
"그러지."
내가 이 마담에게 술을 권하니 몽윤은 내게 자신의 잔을 권했다. 몽윤이 따른 잔을 천천히 마신 내가 그 잔을 돌려주자, 기다리고 있던 이 마담 역시 내게 잔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잔이 원위치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따라 준 잔을 급히 비운 몽윤이 자신의 잔을 이 마담에게 권하는 바람에, 한 사람은 항상 잔이 비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양주 한 병을 다 비우자 내가 말했다.
"한 병 더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눈을 찡긋하자, 입을 틀어막고 가볍게 웃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로 술 올릴게요."
그러나 그녀는 나의 눈짓을 받아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웨이터가 시버스리갈을 한 병 들여놓고 갔다. 몽윤의 잔을 먼저 받은 내가 그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경순과 둘 중에 누가 더 강자라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제가 더 강자 측에 들지 않겠습니까?"
"물론이네. 강자가 아량을 보여야만 모든 매듭은 순조롭게 풀리게 되어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네, 형님!"
"앞으로도 그래. 살다보면 당연히 부부 싸움도 하게 되어 있어. 그때도 이 원칙을 적용하면 가정을 꾸려가는 것도 무난할 걸세. 나는 그 반대지만 말일세."
"하하하.......! 그러면서 제게는 그렇게 권하십니까?"
"윗사람의 훈계가 꼭 당신이 실천해서가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반성 내지는 후회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걸세."
"하긴 그렇지요. 그런데, 형님........"
"말씀 해 보시게."
"강자가 아량을 보여야한다는 원칙을 양 그룹에도 적용하면 안 되겠습니까?"
"누가 더 강자인데?"
"당연히 대정그룹이죠."
"왜?"
"요즈음 언론의 보도를 빌지 않더라도 사실은 전부터 대정이 내실이 탄탄하고, 더 강자라는 것은 재계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외형만 중시하는 정부나 언론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죠."
"흐흠.......! 이거, 내 말에 내가 엮인 꼴인 걸?"
"하하하........! 자승자박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나네요. 형님 말대로 저도 아량을 보일 테니 형님도 아버님에게 아량을 보여 줄 것을 믿고, 제가 그런 의미에서 3잔을 거푸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다 취하는 것 아닌가?"
말 중간에 '자네'라는 말을 넣고 싶었지만 나보다도 나이가 두 살 위이다보니, 함부로 하기도 어려워 화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였다.
"취하면 형님이 알아서 책임지시겠지요. 뭐?"
"그런 말은 여자들과의 대사에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은데? 농담이고 우리 그룹의 보험이란 보험은 전부 삼성에 들어있다는 것만 기억하시게."
"정말입니까? 형님! 그럼, 대박이네요!"
"잘 돼야 대박이지."
"이 시간 이후로는 분명코 잘 될 겁니다. 형님!"
"술 석 잔은 어디로 갔는가?"
"하하하........! 그렇지요? 암, 마셔야지요."
말이 끝나자 스스로 자작을 하며 연달아 석 잔을 입안에 퍼붓는 몽윤이었다.
"아, 이러다가 술 금방 떨어지겠네."
"떨어지면 또 시키면 되지. 양주 한 병에 그까짓 얼마 한다고."
"형님은 총수시지만, 저는 아직 월급쟁이란 말입니다."
"오늘은 내가 쏠 테니 아무 걱정 마시게. 하지만 다음에는, 알지?"
"하하하......! 네. 다음에는 제 단골집으로 한 번 모시겠습니다. 물이 아주 좋습니다."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별로 듣기 좋은 말이 아닌데?"
"이것, 실례.......!"
재빨리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굽혀 사과한 그가 자신의 잔을 손수 따라 내게 쌍 잔을 안겼다. 속된 말로 안경을 끼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둘은 술이 취하도록 마셨고,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잘 해볼 것을 권하는 것으로 술자리를 마쳤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정 주영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야야?"
평상시에 듣기 어려운 냉랭한 어투의 정 회장 이었다.
"한 번 뵙고 싶습니다."
"무슨 일로?"
'어째 나와 몽윤과는 반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은데?'
나는 내심 생각하며 대답을 했다.
"정산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양보할 뜻이 있으면 오고, 아니면 마시게."
"알겠습니다. 방문하도록 하죠."
"기대하겠네."
"9시까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선약 다 취소하고 기다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전화를 끊고 세 사람을 불러들였다. 곧 비서실장, 기획실장, 비서실 2팀장인 올리비아 리였다. 나는 그들에게 명했다.
"지금 정 회장 사무실을 방문할 테니, 대정중공업의 정산자료 모두 챙겨 함께 가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렇게 해서 나는 세 명을 데리고 현대의 회장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어서 오시게."
내가 약속한 것이 있어서 인지 전화를 받을 때와는 아주 딴판으로 정감 있게 나를 맞는 정 회장이었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덕분에."
그렇게 받는 정 회장의 어투는 그간의 소원했던 관계 때문인지 이 말은 좀 쌀쌀하게 들렸다.
"여 봐! 여기 차 좀 내와."
"네, 회장님!"
지켜보고 있던 비서실 직원이 황급히 대답하고 회장실을 물러갔다.
"이렇게 대부대를 데리고 와서 어쩌자는 거야?"
"곧 실무적으로 매듭지으려 함입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고."
내 수행원들에게 자리를 권하면서도 한 마디 툭 던져 상대를 이상하게 불편하게 만들어, 일종의 기선을 제압한다고 할까, 하여튼 노련한 정 회장이었다.
"그래, 얼마를 준비했는데?"
"절반씩 손해를 보죠."
"흐흠.......!"
나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정 회장이 곧 단안을 내렸다.
"좋아! 우리가 그까짓 돈 몇 푼에 멀어져서야 되겠는가. 강 회장 말대로 함세."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 참에 날 잡지?"
"네?"
너무 뜬금없는 화법에 나도 모르게 즉각 반문하고 나니 정 회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못 알아들어?"
"그게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좋습니다. 상의해서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강 회장답지. 아무튼 자네의 통 큰 양보에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네. 아무튼 양가가 인척이 되는 것과 같이, 사업에서도 협력을 더욱 확대 강화하는 것으로 하지."
"좋습니다. 여러모로 협력할 것이 많으니, 서로에게도 유익할 겁니다."
"그나저나 강 회장은 차부터 바꿔."
"언제 제 차를 보신 모양입니다."
"자고로 장사는 말이야 그 분야에 알게 모르게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어있어. 이발쟁이는 상대를 볼 때 먼저 상대의 머리를 보고, 구두쟁이는 상대의 구두부터 살펴. 내 말 뭔 말인지 알아듣지?"
"그럼요. 근간에 새 차종이 나온다면서요?"
"준비하고 있네. 머지않았어. 7월24일이면 그랜저가 출고될 거야."
"그때 우리 임원급 이상은 그 차로 모두 바꿀 테니, 지금 선주문 받으세요."
"하하하.......! 좋았어. 그렇게 통 크게 놀아야 재계 제1의 그룹총수답지."
"인정하시는 건가요?"
"진즉에 인정했어, 이 사람아. 알짜배기 부자는 당신이라는 걸."
"농담이었고요, 회장님! 인수는 했어도 조선 때문에 요즘 골머리가 아픕니다."
"조선에 정통한 사람들은 조공이 아니 이제 대정조선인가? 그것이 정상화되는데 7년을 잡드 만?"
"남들이 다 그렇게 잡지만, 저는 늦어도 3년이면 정상화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강 회장이라면 재계에서 벌벌 떠는 거야. 이는 곧 시기와 질투이기도 하니 앞으로 좀 더 처신을 유연하게 하시게. 이 말 나이 먹은 사람의 충고이니 괜히 허투루 들어 낭패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얘들은 차를 어디 아프리카에서 구해가지고 오나, 왜 이렇게 늦어!"
정 회장이 짜증을 내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노크 소리가 들리며 여비서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굼떠서야 어디 일 되겠어?"
"워낙 종류가 다양하다 보니......."
"변명 하지 마. 내가 질색하는 것 몰라?"
"죄송합니다. 회장님!"
"놓고 나가."
"네, 회장님!"
"저 녀석 때문에 괜히 분위기만 싸해졌군. 자 한 잔씩 들지."
"네, 회장님!"
모두 잔을 드는데 가만히 잔을 든 채 나를 바라보던 정 회장이 한마디 했다.
"우리 이제 사돈지간 맞지?"
"네."
"앞으로 그게 아니더라도 더 잘 해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회장님!"
"재계에서 찧고 까부는 일은 내가 방패막이가 될 테니, 정가나 관가에는 강 회장이 로비를 잘 해서, 괜한 질시 받지 않도록 해. 사업도 사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제일 중요해. 위정자라든가, 정재계에 찍히면 생각지도 않은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하는 곳이, 한국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의 애환이야. 명심해요."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좋았어! 근간에 몽윤이 하고만 말고, 나 랑도 술 한 잔 해야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나도 많이 가르쳐줘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늙은이가 되도록 해주시게."
"별 말씀을.......!"
"내 강 회장만 믿음세."
"저도 회장님께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는 법이거든. 앞으로도 서로 돕고 잘 해봄세."
"네, 회장님!"
"그런 의미에서 우리 새삼 손 한 번 잡아볼까?"
"하하하........! 그러지요. 회장님!"
나는 웃을 일도 아니었지만 부러 대소를 터트리며 쭈글쭈글한 정 회장의 큰손을 잡아갔다. ============================ 작품 후기 오늘도 변함없이 읽어주시고, 선작, 멘트, 추천, 게다가 크고 작은 많은 쿠폰을 주신 님들께 정중한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
"대단히 대단히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을 주신 님들께 정중한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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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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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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