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경순이가 오전에 올라오자 우리는 일제히 몇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화진포로 향했다. 다행히 큰 눈이 오지 않아 길이 막히지 않아 좋았다. 내 차에는 어머니와 동생 경순이만 태우고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물론 경순이도 별장에는 처음이라 모두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으나, 한편으로 걱정도 되는지 경순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며 한마디 했다.
"언젠가는 모두 시집을 가야되는 것이니, 그런 줄 알고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도록 해."
"나는 돈도 더 벌고, 미스 시절을 즐기고 싶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지금도 늦었어."
어머니의 반격에 입만 삐죽 빼죽이는 경순이였다. 이때 가만히 생각하니 아버지도 계셨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도 같이 모실 걸 그랬어요."
"아니래도 서운하게 생각하시더라. 나 혼자 서울 올라간다니까. 정말 옛 날 노인들의 말씀이 한 마디도 그른 게 없어. 나이가 들면 얘가 된다고. 서운해서 삐지셨어."
"하하하........! 그래요?"
나는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서울 톨게이트를 갓 벗어난 시점이라 통화권에 들었다. 그래서 토요일이라 모두 퇴근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서실로 카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네, 대정그룹 비서실입니다."
이 미연 과장의 목소리였다.
"아니! 토요일인데, 아직 퇴근 안하고 뭐 하고 있어요?"
"잔무가 남아서요."
"그럼, 말이오. 을조 경호원들 시켜서 촌에 계신 내 아버님 좀 모시고, 화진포 별장으로 오도록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수고해요."
"네, 회장님!"
내가 카폰을 정 위치에 놓는데 어머니가 물으셨다.
"연락이 된 게냐?"
"네, 아버지도 오실 수 있을 거예요."
"잘 됐다. 자꾸 나이 들면 조그마한 일에도 서운한 감정이 많이 드니, 너희들이 잘 챙겨드려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차가 좀 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강원도 쪽으로 넘어오자 더 많은 잔설이 산등성이에 남아 우리의 마음을 더욱 포근하게 했다.
매일 도시에 갇혀서 살다가 이런 풍경을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며,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 든다. 이래서 주말이면 사람들이 들로,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우리의 차가 화진포 별장에 들어서자 주변 경관에 감탄을 하는 동생과 어머니였다.
"참으로 경치가 좋구나!"
"엄마, 저 철새 떼 좀 봐요. 마치 군무를 추는 것 같지 않아요?"
"눈 쌓인 저 소나무 밭은 어떻고?"
서로 자신이 본 것이 더 멋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나는 내심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는 다른 자랑을 했다.
"어머니! 봄에 오시며 더 멋있어요. 이곳에 내가 해당화를 무척 많이 심어놨는데, 이게 피는 날이면 그야말로 장관 이예요.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니까요."
"언제 봄에도 한 번 와봐야겠다."
"그러세요. 어머니! 저희가 잊고 있으면 어머니가 말씀하세요.
'나 거기 구경 한 번 갈련다!'
하고요."
"그래, 그래! 내 우리 아들 잘 둔 덕에 지금 당장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무슨 그런 말씀을."
"딸도 잘 두었는데,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런 말 들으면 이 딸 슬프다니까요."
"네 말 하는 것을 들으니, 이제야 네가 성숙한 처녀라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리에는 자꾸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 푹 숙이고 있던 모습만 연상이 되는데, 곁에서 보니 이제 정말 너도 어엿한 숙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오빠는 나를 매번 애 대하듯 한 거예요?"
"그렇다."
"쳇, 이제 나도 어엿한 성인이고 숙녀라고요."
"오늘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다 되었다. 차가 주차장에 멎었던 것이다.
차에서 먼저 내린 내가 어머니를 부축해 내리고 내처 어머니와 함께 돌계단을 올랐다. 돌계단을 다 올라가 잔디밭에 이르자, 멀리 동해의 푸른 바다가 시야에 잡혔다.
"참으로 좋다! 바다가 한 눈에 다 내려다보이는구나!"
"옥상에 올라가 보면 훨씬 잘 보여요.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볼만은 해요."
"그래, 그래! 저것이 해당화 나무 아니냐?"
"맞습니다. 봄이면 저 해당화 군락지가 붉은 꽃으로 붉게 물들면, 온 세상이 붉어지는 느낌 이예요."
"정말 볼만 하겠다."
"날이 쌀쌀하네요. 어서 방으로 드시지요."
"그래, 그래."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둥근 성채 모양의 내실로 들어갔다.
"어머니 옥상에 올라가 보실래요."
"나는 높은데 올라가는 게 싫다. 어지러움 증이 있어서 말이야."
"그럼, 어머니 이 안락의자에 앉으셔서 밖의 경치나 구경하세요."
미리 들어와 있던 미정이 내가 평소 애용하던 흔들의자를 권했다.
"그래, 그래!"
어머니는 미정이 권하는 대로 흔들의자에 앉고 나는 경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으로 그녀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나는 올라가 보고 싶어요. 올라가요. 오빠!"
"그래, 따라와라."
나는 경순을 데리고 옥상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간 몇 번 보아서인지 시들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쌀쌀한 바깥 날씨가 싫었던지. 아무튼 둘만이 옥상에 올라가게 되었다.
"와! 정말 멋있기는 멋있네요. 속이 탁 트이는 느낌 이예요."
"그렇지?"
경순의 감탄에 괜히 내 어깨마저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경순의 물음 때문에 내 어깨는 금방 쳐졌다.
"오빠, 그런데........"
"뭔데?"
"부인 세 명을 한 번에 데리고 자봤어요?"
"너! 이 가시나 야! 그렇게 안 봤더니 별 게 다 궁금하네."
"여자라고 그런 로망이 없는 줄 알아요. 남자 셋을 거느리고, 마치 하인처럼 부리는........"
"쓸데없는........ 명가일수록 예법이 까다롭고, 순종적이여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라. 안 쫓겨나려면?"
"무슨? 뭐가 벌써 다 이루어진 것 같이 말해요. 오빠는?"
"보면 너도 가문을 떠나 싫지는 않을 게다. 미국 유학파에다 매너까지 좋은 사람이라니 말이다. 물론 인물도 잘 생겼다."
"제발 좋은 일 하느라고, 제 이상형이었으면 좋겠네요."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일단은 내일 보고 이야기하자."
"네. 나도 이곳을 알았으니 자주 이용해도 되겠네요."
"알아서 해라. 그렇다고 너무 자주 와서 아주머니 성가시게 하지 말고."
"그렇게 하래도 저도 바쁜 몸이라 그렇게는 못하거든요."
"알았다, 알았어. 알아서 해라. 그만 내려가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알았어요. 나는 조금 더 보다 내려갈 테니, 오빠 먼저 내려가세요."
"바로 내려와야 한다."
"네~!"
나는 여동생 혼자 남겨두고 그냥 1층으로 내려왔다.
그날 저녁 때였다. 뜻밖의 외인 한 명이 찾아들었다. 아버지와 경호원이야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 과장이 손수 아버지를 모시고 예까지 찾아올 줄은 예상 밖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우리 가족은 잔디밭에서 드럼통을 개조한 난로에 삼겹살을 굽고 있는 판이었다. 물론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한 옆에는 화톳불도 피워져 있었고 실외등도 환하게 밝힌 상태였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이 사람들이 하도 가자고 성화를 부려 오기는 왔다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여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자 젊은 날의 패기보다는, 점점 위축되고 여성화 되어가는 아버지가 나는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어머니는 그 반대이니 문제 될 것이 없고.
지금도 어머니와 내 눈치를 보느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니,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아버지를 더 반겼다.
"잘 오셨어요. 아버지. 제가 시킨 일이거든요. 어머니도 혼자 계신 아버지가 안 됐다 하시고요."
"그러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불가를 찾는 아버지셨다. 그제야 며느리 손주들이 분분히 시아버지 할아버지를 맞아 인사를 드린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이 과장과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토요일인데 쉬지 않고, 왜 예까지 직접 왔어요?"
"쉬어도 외롭고 어디가나 마찬가지이니 일 속에 파묻혀 살려는데, 회장님이 제게 좋은 기회를 주셨네요. 여기까지 왔으니 바로 내쫓지는 않으시겠죠?"
"가능하다면 하루 묵어가도 돼요. 방은 많으니까."
"고마워요. 회장님!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신세질게요."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회장님!"
활짝 웃으며 감사를 표한 이 과장이 금방 아이들 속에 묻혀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리 고기는 없나?"
나는 고기가 구워지고 있는 드럼통 곁으로 가며 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준비는 했는데요."
"여기 있어요. 여보!"
미정의 말에 이어 명희가 오리고기가 든 봉지를 꺼내들고 우리 곁으로 왔다.
"이리 줘봐. 불포화지방산이라니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돼지고기 보다 이게 나을 것 같아."
"제가 구울 게요."
"아니야. 오늘 같은 날은 아이들 하고 어울려 구운 고기나 먹어."
나는 경호원과 함께 오리고기를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회장님! 우리 몫도 있는 것이죠?"
갑조 조장 조성택의 물음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항상 음식은 넉넉히 준비하니, 걱정 말고 함께 들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얼른 사의를 표하고 희희낙락하는 조 조장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친밀하지 않아 서먹서먹하더니 매일 붙어다니다시피 하니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가족과 같이 가까워져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들이었다. 나는 곧 구운 오리고기를 가지고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자리로 갔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오기고기인데 고기가 기름지지 않아서 좋아요."
"어디?"
내가 내려놓자마자 젓가락으로 한 첨을 집는 어머니셨다. 아버지도 덩달아 한 첨을 집으셨다.
"나는 술도 안 주냐?"
내 말에 가까이 있던 수정이 잔을 건네더니 소주를 따랐다.
"아버지 양주 드실래요?"
"양주도 있냐?"
드시고 싶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시는 아버지셨다. 미정이 눈치를 채고 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무릎에서 내리지."
"아니다. 내가 좋아서 이러고 있다."
아버지 무릎에는 인정이, 어머니 무릎에는 중산이 안겨있어서 내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효정이 나이가 들어도 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효정아, 너는 아빠 곁으로 와라!"
"정말? 우리 아빠가 최고야!"
발딱 일어나 내 곁으로 달려오는 효정이었다.
"아빠는 효정이만 예뻐하고."
인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너는 할아버지가 예뻐해서 무릎에 앉혔잖아."
"알았다. 쳇!"
이때 미정이 양주를 가져와 아버지 어머니께 한 잔씩 따라드렸다. 나는 그냥 소주를 마셨다. 특별히 양주 맛이 좋은 줄 모르겠다.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고, 많이 먹으면 두통에 시달리는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밤이 깊어 가는데, 이 과장만이 이따금 높이 솟아오른 반월을 보고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곤 했다. ============================ 작품 후기 즐거운 날들 되세요!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즐거운 날들 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