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91화 (191/322)

다음 날 아침.

이 과장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꺼려 줄곧 피해 다녔다.

어제 저녁에는 그렇게 당차게 행동하던 이 과장이었으나, 자신의 본심을 고백한 후로는 쑥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며칠이 지나면 평소의 태도로 돌아갈 것을 알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나 또한 오늘은 가급적 비서실에 가지 않으려 생각을 하며 결재서류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김재익 기획실장과 이순국 기획 2팀장이 내 방을 찾았다.

나는 인터폰으로 차를 주문하고 그들을 소파에 앉혔다. 내가 그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김 실장이 입을 떼었다.

"온양펄프와 삼성특수제지를 어제 부로 인수했습니다. 회장님!"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순국 팀장이 덧붙였다.

"100% 증자 조건이었습니다. 회장님!"

"잘 알겠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이제 경영을 해애 할 텐데, 이 팀장님을 내

그 두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할 테니, 열심히 해서 반드시 그룹의 알짜 기업이 되도록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자신의 오랜 희망이 이루어져서인지 이 팀장 아니 이제 이 사장이 감격한 얼굴로 급히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이 순국 사장에게 김 실장이 농담을 던졌다.

"이제 나보다도 더 높은 직위이니 잘 봐주세요."

"실장님은 무슨 그런....... 아마 그룹 내 파워로 따지면 넘버 3 안에 들 분이......"

이......"

"자, 자, 그만하고....... 이 사장님은 경영 정상화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올려주세요. 제가 검토해 보고 추가로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하게끔 말이죠."

"네, 회장님!"

이후 우리는 제지분야의 발전 방향에 대해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대화도중 호출한 최우선 사장이 들어오자, 그들은 내방을 나갔다.

"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요즘 수출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세계적인 불황으로 힘듭니다만, 그래도 우리 그룹은 선전하고 있는 편입니다. 회장님의 지시대로 미개척 시장을 개척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전개한 탓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다름이 아니라 금번에 우리가 제지 회사를 인수했어요. 해서 이 품목 또한 주 수출품목으로 삼아 이 회사들이 정상화 되는데 일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하실 말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나가 일보세요."

"네, 회장님! 그럼......."

목례를 해보인 최우선 사장이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내 방을 벗어났다. 이날 오전 10시.

정부의 대변인 격이 문공부 장관의 발표가 있었다. 모든 언론이 참여한 가운데 기자회견 방식을 빌어 가칭 '서울방송(SBS)'의 허가를 내주었다는 내용이 주였다. 자본금 500억에 대주주는 대정그룹이고 이외에도 한국일보를 비롯해 8개 회사가 지분참여를 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이어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으나 추후 답변을 드리겠다는 말로 기자회견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현장을 벗어난 문공부 장관이었다 나는 이를 비서실에 설치된 TV로 지켜보다가 종내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90년대에나 허가를 내주었을 것을 나에 의해 4년은 앞당겨진 셈이 되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오후.

급히 회장실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김재익 기획실장과 나승렬 기획 팀장이었다. 모두 희색이 만면한 얼굴들이었다.

"기쁜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네, 회장님! 우리가 대한중석의 인수에 성공했습니다."

"잘 됐군요. 아무리 기뻐도 자리에 앉아 이야기합시다."

"네, 회장님!"

두 사람이 자리를 잡자 나는 비서실장을 불러들여 함께 듣도록 했다. 곧 김경제 비서실장도 들어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회장님의 지시대로 15억을 더 써내 우리가 영풍광업을 제치고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나 팀장 본인이 더 써내야 될 것 같다고 제의를 하고는 영광은 나한테 돌리려는 모양새였다. 하긴 내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면 될 일도 안 되었을지도 모르니,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리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미소만 띠고 경청하고 있자 나 팀장의 신명 오른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예상가보다 15억이 더 많은 1,155억 원을 써냈고, 영풍도 예상가 보다 10억 원이 더 많은 1,150억 원을 써냈습니다. 5억 차이로 패퇴했으니 영풍으로서는 지금쯤 배가 아플 것입니다."

"좋습니다. 우선 애쓴 두 분의 노고에 치하를 드립니다. 하고 이제 흥분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산 가치를 보고 인수했지만 인수한 이 시점에서는 광산도 중요하니, 그 사장을 당장 본사로 올라오도록 하세요. 그 현황을 들어야겠어요."

"네, 회장님!"

내 지시에 김 비서실장이 인터폰을 통해 내 명을 비서실로 하달했다. 나는 계속해서 비서실장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명동의 옛 중석의 본사 건물은 김의철 사장에게 지시해 백화점이나 저가 마트로 개발이 가능한지 검토해보라 하시고, 대구의 공장 용지는 아파트로 개발이 가능한지 배용석 부사장에게 살펴보라 하세요."

"네, 회장님!"

"그리고 대한중석이 보유하고 있는 100만 주에 이르는 포항제철 주식은 계속해서 그냥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합시다. 아마 내 생각에는 이 주식이 크게 뛰어서 우리에게 큰 선물을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내 기억으로는 이 포항제철 주식을 정부는 국민주 1호라는 명목으로 전 국민들을 상대로 청약을 받는다. 당시 1만5천 원에 청약한 국민들에게 배정이 되었으나, 일정 시점이 되어 이 물량이 다시 거래 될 당시는 4만5천 원 내외를 오르내렸던 것으로 기억되니, 그 차익만 해도 엄청난 것이다. 그 시점이 2년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시점이 아니더라도 이는 우량주이기 때문에 계속 보유하고만 있어도 큰 차익 실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참고로 포철의 요즘 시세는 주 당 300,000원 선을 오르내리니, 이 주식만 해도 나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남기게 될 것이다.

아무튼 내가 다시 입을 열어 나의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알기로 대한중석을 이렇게 처분하는 것은 분명 적자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산으로서의 생명은 길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해서 나는 텅스텐을 가공하지 않은 광물로 단순히 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를 제련해 이차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템포 쉬었던 나의 말이 이어졌다.

"텅스텐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현존하는 광물 중에는 용융점이 최고로 높아 특수합금이나 초경합금의 원료로 주로 쓰이지 않습니까? 해서 나는 이를 좀 더 차원 높게 절삭공구로 개발해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면 귀중한 우리 자원이 헐값에 매도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네, 회장님!"

모두 대답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 김 기획실장이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구의 필라멘트의 주재가 텅스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멘스에도 교섭을 해서 수출을 하고, 우리의 전구 공장에도 공급을 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자체 소비량이 늘어날 것입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이후 나는 텅스텐을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연구하도록 하라 지시한 후 이들을 내방에서 내보냈다. 다음 날 아침.8시가 되자 현 대한중석 사장인 노 중석(盧 仲錫) 씨가 내 명대로 내 방을 찾아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기가 막히게도 중석이었다. 물론 텅스텐을 말하는 중석(重石)과는 한자가 틀렸지만 말이다. 그의 인사를 받자마자 내가 질문을 했다.

"요즘 광산의 경영 상태가 어떻습니까?"

"50, 60년 전만 해도 나라의 보배였죠. 한 때 한국의 수출고에서 75%를 점할 정도로요. 그러나 지금은 중공이나 미얀마의 저가 공세로 아주 괴롭습니다. 그나마 '한미중석협정'에 의해 미국으로의 수출물량에 의해 근근이 연명은 하고 있으나, 앞으로 이 협정이 만료되는 5년 후의 일이 더 걱정입니다."

"생산량은 얼마나 됩니까?"

"평균으로 쳐서 연간 텅스텐(W)이 4,000톤, 부산물인 몰리브덴(Mo)과 창연(蒼鉛) 즉 비스무트(Bi)가 1,000톤가량 생산되고 있습니다. 단일 광산으로서는 세계 최대 생산량이고, 세계 시장의 10%를 점하고 있습니다."

"각 광물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나는 이 광물들의 쓰임새를 내가 알고 있는 상식 외에 더 많이 알아, 개발할 상품이 없는가 알아보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다.

"주로 특수강과 초경합금의 원료로 쓰이고,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필라멘트 선, 고온용 열선, 용접 전극봉, 전자기기의 전극 및 전기접점 이외에 절삭공구나 금형합금의 초경합금으로 텅스텐이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흐흠........! 몰리브덴은 요?"

"주로 강(鋼에 첨가하여 인성을 증가시키거나 강도를 증가시켜 공구강, 고속도강, 스테인리스강의 첨가물로 쓰입니다. 또 광물 중에는 미끄러운 성질이 가장 강해서 엔진 내면의 코팅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비스무트는 요?"

"이융합금(易融合金), 활자합금, 의약품의 원료, 화장품, 도자기의 안료 등으로 쓰입니다."

노 사장의 말을 들어보았으나, 주재로 쓰인다기보다는 주로 첨가물 정도이니 이것을 가지고 단독 상품을 개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휘휘 내젓고 그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내 생각은 말이오."

"네, 회장님!"

"좀 더 생산에 효율성을 높이되 필요 이상으로는 생산하지 마세요. 우리 그룹 자체적으로도 텅스텐 등을 소화할 수 있는 상품도 개발하고 있으니까, 미국에 어쩔 수 없이 수출할 물량과 우리가 소화해 낼 물량에는 더 이상 생산을 하지 말아요."

나는 그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나의 말을 이어나갔다.

"잘 아시다시피 광물이라는 것은 부존자원만 캐 먹으면 그만이잖아요. 여느 공산품 같이 계속 생산해 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의 귀중한 자원을 아낍시다. 하고 종당에 이 광량이 다 되었을 때는 500만 평의 용지에 우리 그룹의 자체 연수원이나, 휴양시설을 건설해 이용할 수 있는 방안도 미리미리 강구하도록 해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내 불시에 광산을 한 번 방문할 테니 그리 아시고, 특히 안전사고에 각별히 유념하세요. 나는 생산량보다 안전을 더 중시합니다."

"이제 우리 그룹에 편입되었으니 앞으로는 보다 잘 될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내 말대로만 행하시면 됩니다."

"네, 회장님!"

"처음 우리 그룹을 찾아주셨는데, 그룹의 간부들과 방마다 찾아다니며 인사도 나누시고, 점심이나 함께 하고 내려가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나가보세요."

"네, 회장님!"

처음이라 그런지 군기 든 신병 같은 모습의 노 사장이었다. 나는 그를 내보내고 남은 결재서류를 마저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후 결재를 마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일이 토요일이었다. 여동생 경순이 올라오기로 한 날이었다. 아무래도 어머니도 참석하셔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촌의 어머니께 다이렉트로 전화를 걸었다.

겨울철 농한기라 그런지 바로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셨다.

"잘 계셨어요? 어머니!"

"큰 애냐?"

"아, 이제 제 목소리도 잊었어요? 어머니!"

"하도 오랜만에 들어서 그렇다."

"자주 전화를 드린다는 것이 바쁘다보니 좀 그렀네요."

"알고 있다. 몸은 성하고?"

"네, 어머니!"

"아버지 바꿔주랴?"

"그게 아니고 내일 경순이를 서울로 올라오라 했거든요. 맞선 자리 한군데가 생겼어요. 그래서 어머니도 함께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건 그래야지. 내 봐서 신랑 재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퇴짜를 놓을 테다. 그런데 신랑 재목이 뭐 하는 사람이냐?"

"현대그룹의 정 주영 회장 아시지요?"

"전 국민이 다 아는 양반을 나라고 모를까보냐?"

"그 양반의 일곱째 아드님 이예요."

"뭐시라고? 우리 집안과 어울리기나 하겠냐? 너무 기우는 거, 아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매파를 먼저 보낸 것도 그 집안이라고요. 절대 우리가 기울지 않습니다. 현재는 그들이 벌려놓은 게 많아 우리보다 재계 서열은 앞서지만 그나마도 내년이면 따라 잡히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

"정말이냐?"

"아들을 뭘로 알고.........."

"하긴 네가 대단하긴 하지. 내 아들이긴 하다만은 어떤 때는 정말 내 아들인가 싶어, 나 스스로 꼬집어보기도 한단다."

"하하하..........! 참, 어머니도."

"올라오실 거지요."

"하모, 하모. 내 당장 오늘 올라갈란다."

"알았어요. 떠나기 전에 전화주세요. 터미널로 차 보낼게요."

"고맙다."

"끊습니다. 어머니!"

"그래, 그래!"

나는 곧 전화를 끊고 비서실로 인터폰을 연결해 바로 조처하도록 지시를 했다.

어머니를 올라오시라고 해놓고 가만히 생각하니 미정이게도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아무 준비도 없이 있다가 어머니를 맞으면 여자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전화기를 들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가고 미정이 받았다.

"여보세요."

"난데."

"네, 여보!"

"오늘 어머니가 올라오실 거야. 그러니 알아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큰 아가씨 때문인가요?"

"그래, 그래."

"내일은 큰아가씨도 올라올 것 아니 예요."

"그렇지."

"무턱대고 올라오면 어떻게 해요. 올라온 김에 당사자라도 한 번 만나보게 사

전 준비가 있어야지요."

"그건 그렇지. 얼마 전에 정 회장으로부터 사돈 관계를 맺자는 제안은 들었지만 나는 당사자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거든."

"물론 이죠. 평양 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마는 것 아니 예요. 그러나 저러나 매파를 통해서 서둘러 약속 장소를 잡아야겠네요."

"그 문제는 당신이 알아서 하되, 장소는 가급적 남의 눈에 안 띠는 장소로 했으면 좋겠어. 언론에서 냄새라도 맡고 보도하고 그러면 낭패거든."

"네.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그 문제는 제가 십분 유념해서 장소를 선택하도록 할 게요."

록 할 게요."

"알았어. 그런 문제는 당신이 잘 알아서 처리하리라 믿고 나는 이만 전화 끊을게."

"네, 여보. 오늘은 일찍 들어오시는 거죠?"

"그런 말은 묻지 마. 일찍 들어가고 싶어도 여자들이 그런 주문을 하면 괜히 안 잡힌 약속이라도 잡는 게 남자들이니까."

"헤헤헤........! 그럼, 늦게 들어오세요."

"정말이지?"

"제 마음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알았다, 알았어. 일찍 들어가도록 할게."

"네, 여보. 끊어요."

"그래, 그래."

나는 대답을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 요즈음은 집이 너무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미정과 나의 신혼집을 중간에 조금 보수는 했지만 전혀 증축도 하지 않아, 전 식구들이 모이면 비좁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또 아들 중산이 머리가 커지자 자신만의 방을 달라고 요구해, 지금은 이층의 작은 방을 주었지만 너무 비좁다고 투덜거리고 있는 참이었다. 차제에 집을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우리 이웃들에 대한 생각으로 내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맺혔다. 처음에는 그들도 몰랐으나 내가 유명인이다 보니, 그들도 내가 누구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것 까지는 좋았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 집에 드나들며 은근히 자신들의 집을 우리가 구매했으면 하는 의사를 내비쳤다. 당연히 내가 재벌이니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것이었다. 재벌의 집이 이게 뭐냐는 등 하면서, 우리 집까지 사서 크게 집도 짓고 트라는 권유였지만 이면에는 자신들의 집을 시세보다 비싸게 팔아먹을 욕심이 작용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그런 이야기를 미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지만 나는 이 집이면 족하다고 계속해서 거절해오던 차였다. 이제 집을 늘리기로 작정을 했으니 조금은 시세보다 더 주는 한이 있더라도 양쪽 집을 사서 트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나였다. 결심이 서면 바로 움직이는 게 나의 장점 아닌가. 나는 바로 인터폰을 들어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비서실이라는 데가 항상 회장과 마주하고 있으니, 예로부터 문고리 권력이라고 파워는 세었지만 고되기는 짝이 없는 데였다. 공적인 일은 물론 회장의 개인사까지 모든 업무를 챙기다 보면,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르는 데가 비서실이라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집만을 관리하는 집사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나의 지시에 의해 바로 김경제 비서실장에 노크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네. 거기 좀 앉으세요."

나는 김 비서실장을 소파에 앉히고 나도 그쪽으로 걸아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름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작은 듯해서요."

"이를 말입니까? 작아도 너무 작지요."

"해서 양쪽 집을 다 사서 허물고 새로 증축을 할까 해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양쪽 집의 구매를 추진해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아무래도 시세 보다는 높게 달라 지 싶은데.......?"

"그렇습니다. 전부터 내게 제의한 바가 있어요. 그런데 가격을 너무 높게 달라는 바람에 내가 번번이 거절하기는 했는데, 이제 그들도 지쳤을 테니 아주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웬만하면 매입하는 방향으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구입하는 대로 바로 설계 의뢰해서 집을 지을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추진하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구 과장과 이 과장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이제 회장님까지 알고 계시는 군요. 비서실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 구 과장의 구애가 어느 때는 업무 중에도 이루어진다니까요. 그래서 나에 의해 질타를 많이 받기도 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과장은 전혀 구 과장에게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업무에 지장은 없습니까?"

"그런 정도까지야 물론 아니지만, 이 과장이 상당히 불편해 하는 눈치입니다. 요즘에는 부쩍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구 과장을 인사조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유능하긴 한데....... 저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몇 번 건의를 들이려다가 만적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구 과장을 기획 쪽으로 보내고, 어디서 유능한 인물을 급에 맞게 들이는 방향으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답을 하고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으나, 웬일인지 멈칫거리기만 하고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김 비서실장이었다. 여간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인지라 궁금해서 내가 말했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망설여요?"

"회장님 신상에 관한 일이라 입에 담기가 거북해서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든지 해봐요."

"아무래도 이 과장이 제 눈에는 회장님을 은애하는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거 참.........!"

남녀 사이라는 것이 묘해서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그게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변의 인물들이 대개 눈치를 채게 되는데 이 과장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하나 더 거두는 것이."

내가 무어라 말을 못하고 있자, 한 술 더 뜨는 김 비서실장이었다.

"셋이나, 넷이나 별 차이가 없을 듯한 데요."

"내 솔직히 말하죠. 어제 이 과장으로부터 그런 비슷한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단호하게 거절한 바가 있어요. 하니 이 과장은 평생 시집도 안 가고 비서실에 근무하겠다니 나로서는 난감하지만, 어찌 됐든 나로서는 더 이상 생각이 없어요.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좀 가여운 생각도 들고 하니, 실장님께서 잘 돌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다고 업무 쪽으로 봐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 말도 그 말 이예요. 괜히 비서실 직원들끼리 농담이라도 시집가니, 안 가니 하며, 이런 쪽으로 아예 말을 건네지 않도록 다른 직원들에게도 평소부터 주의를 환기시켜 달라는 말이죠."

"회장님의 뜻을 정확히 알겠습니다. 그대로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네, 회장님! 그럼, 이만........"

조용히 목례를 올리고 방을 벗어나는 김 비서실장이었다. 내가 퇴근을 하고 현관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가 올라오신다하니 미정이 명희는 물론 수정이네 식구까지 모두 부른 모양이었다. 그네들의 목소리는 물론 아이들의 목소리까지 밖으로 울려나왔기 때문이었다.

"험, 험........!"

내가 현관문을 들어서며 큰기침을 하고 들어서자 실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셨어요?"

"아빠!"

"이제 오니?"

각양각색의 인사가 나에게 쏟아졌다.

"차를 늦게 대지는 않았던가요?"

내가 어머니에게 안부 인사 삼아 물었다.

"아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때부터 나를 안내하는 바람에 내가 아주 편안하게 잘 왔다."

"그랬다면 다행이고요. 저녁은 요?"

"너 오면 먹는다고 다 기다라고 있었다."

"다 모이니 집이 좁긴 좁군요. 아무래도 집을 넓혀야 되겠어요."

"내 생각도 그렇다. 옛날에는 모르겠더니 손자들이 자꾸 늘어나니 좁은 느낌이 든다."

"오늘 지시를 해놨으니, 조만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보, 상 차리도록 해요."

"아니래도 준비가 다 되었어요."

나의 말을 받아 미정이 답했다. 미정의 말에 눈을 돌려 주방 쪽을 보니, 주방에서는 수정과 명희까지 시어머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함인지, 가정부 아주머니를 도와 한창 상차림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세 개의 상이 펼쳐지고 우리는 일제히 상에 둘러앉았다.

내 상 앞에는 나와 어머니 그리고 세 부인이 겸상을 하고 나머지는 아이들과 가정부 아주머니까지 내 지시에 의해 겸상을 하게 되었다.

"애비야!"

식사를 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네, 어머니!"

"신랑 재목 얼굴은 한 반 봤다더냐? 어떻게 생겼어?"

"저도 실물은 못 보고 매파가 가지고온 사진으로만 보았는데, 인물이 좋더라고요."

"어머니, 제가 가지고 올게요."

내 말에 미정이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곧 증명사진 크기의 사진 한 장을 내와 어머니께 드렸다. 이를 보시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만 하면 됐다. 인물도 아주 훤칠하구나!"

"사실 사진으로만 본다면 미남자입니다."

"글쎄 말이다."

"어머니 저도 좀 보여주세요."

명희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너도 못 봤냐?"

"듣는 이 오늘 처음 이예요."

"말이 오간지 얼마 안 됐어."

나의 말에 서운한 표정이 가시는 명희와 수정이었다. 명희와 수정도 각각 사진을 돌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머니와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미정에게 물었다.

"약속 장소는 정했어?"

"네. 정 회장 집 청운동 자택에서 뵈었으면 하던데요."

"안 돼!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자리로 가게 되면 우리가 부담이 커. 최악의 경우 결렬될 때를 생각해야지."

"그럼, 이제 와서 어째요?"

울상을 짓는 미정이었다.

"차라리 화진포 우리 별장에서 남의 눈에 안 띄게 보는 게 낫겠어. 지금 당장 전화 걸어 그렇게 전하도록 해."

"네, 여보!"

내 말에 밥을 먹다말고 벌떡 일어서서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는 미정이었다. 이어 우리는 미정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계속해서 식사를 해나갔다. 잠시 후. 식사 자리로 돌아오며 미정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우리의 의사대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약속은 시간을 감안해 일요일, 오전 11시로 정했어요."

"잘 했어."

이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정이 물었다.

"고모 결혼하시 게요?"

"그래."

내 말에 요상한 표정을 지은 다정이 말했다.

"이제 용돈도 다 탔네."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달에 한 번씩 고모가 나한테 용돈 부쳐주셨거든요. 그런데 남의 식구가 되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다정이는 그게 걱정이로구나. 그럼, 이 할미가 용돈 아껴서 주마."

"할머니 돈은 안 받아요."

"왜? 늙은이가 주는 돈이라서?"

"그게 아니고요. 할머니 쓰시기도 빠듯하실 텐데, 우리 줄 용돈이 어디 있겠어요."

"쓰고도 남는다. 내 꼭 우리 큰손녀 딸만은 주마."

"할머니 저는 요?"

"그러고 보니 우리 장손도 있었네. 우리 장손도 줘야지."

철산이까지 주겠다고 오지랖을 넓게 펴는데 이제는 효정이까지 나선다.

아예 제 할미 밥상까지 와 그 옆에 찰싹 달라붙더니 애교까지 부리며 말한다.

"아이고, 내가 우리 효정이는 생각 못했네. 우리 효정이도 주어야지."

"어머니 그러시다가 땅 다 팔아도 모자랄 테니, 그만 하세요."

"호호호........! 그럴 까?"

중산과 인정이 이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명희가 안 되었던지 시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제가 용돈 아껴서 부쳐드릴 테니, 인정이 하고 중산이에게도 주세요."

"뭣들 하는 거야. 용돈 인상해줄 테니, 더 이상 할머니 조르지들 마. 알았어?"

"네!"

내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즐거운 얼굴로 합창을 했다. 이를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짓는 세 엄마들이었다.

============================ 작품 후기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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