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86화 (186/322)

< --공장에 야전침대를 갖다놓다-- >

12월 31일.

대정그룹 이사 급 이상만 참여한 송년의 밤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워커힐 컨벤션센터 전체를 하룻밤 빌린 우리는 이곳에서 부부동반의 송년 만찬 겸 파티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정그룹 임원 외에는 특별히 다섯 사람만 더 초대되었다. 올 한 해 나를 많이 도와준 김만제 재무부 장관, 이필선 제일은행장, 박영수 대통령비서실장, 노태우 88올림픽 조직위원장,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효정사건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경호원의 부인이었다. 우리 임원들은 만찬이 시작되기 10분 전 7시에 모두 입장을 했지만, 5분 전인 지금 아직 초대된 외부의 다섯 사람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주인의 입장으로 입구에 나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에는 세 명의 내자들이 모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차별을 두지 않는 나로서는 오늘 같은 날 한 사람만 데리고 간다면 몹시 서운해 할 것 같아, 아예 세 명을 동시에 다 데리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는 특별히 한 사람 더 나온 사람이 있으니 집안의 장남 철산이었다. 그러나 올해 11살로 꽤 자란 철산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외부인으로는 제일 먼저 이필선 행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부인한 그가 빠르게 다가와 내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이런 뜻 깊은 자리에 초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을 기회로 내년에는 더욱 좋은 한 해가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감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고맙습니다. 회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오늘 비서실 직원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모두 출근해 행사를 돕고 있었다. 지금 안내를 자처한 사람은 비서실의 막내 유진선 양이었다. 이 행장이 유 양의 안내에 따라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연이어 초대된 외부 사람들의 차량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재무부 장관 부처였고, 다음으로는 박영수 비서실장 내외, 이어서 노태우 부처가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위원장님!"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노태우 조직위원장이 아주 겸손하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왔다.

"공무다망하실 텐데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초대해주는 사람도 없더이다. 하하하.......!"

노 위원장이 싱거운 농담을 건네자, 별로 우스운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물론 내자들도 빙긋 웃으며 그를 안으로 모셨다. 곧이어 오늘은 마지막 손님이 나타났다. 손 정혜(孫 淨慧)라는 경호원 부인과 철산이었다. 부부동반 모임이라 나는 아들 철산을 대기시켰다가, 제일 나중에 입장하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잊지 않고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까지 초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별 말씀을. 철산아, 잘 모셔야한다."

"네, 아빠!"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나는 두 사람을 에스코트하듯 해 장내로 입장을 했다. 올 사람은 다 왔으므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입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이게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도 철산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손 정혜 씨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지정된 좌석 즉 제일 앞 열에 앉히고, 곧 헤드테이블에 마련된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세 부인이 나를 따라 각각 좌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 좌측으로는 노태우 대표(민정당 대표위원이기도 했다)와 김만제 장관, 오른쪽으로는 박 비서실장과 이 행장 내외가 나란히 앉았다. 곧 사회자로 지정된 구인철 과장이 마이크를 잡고 멘트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대정그룹 85년도 송년의 밤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대정그룹 회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먼저 이 자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신 외빈 여러분과, 올 한 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려주신, 우리 가족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에~! 지금까지는 공식적인 멘트였고요. 음식을 앞에 놓고 길게 말하는 것 같이 볼 성 사나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차려진 음식 맛있게 드시고, 이 밤을 신나게 즐겨봅시다! 이상입니다."

와아..........!

나의 간단한 인사에 우리의 임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무한 박수를 쳤고, 참석한 외빈들도 빙그레 웃으며 함께 박수를 쳤다. 그러나 우리의 임원들과 같이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외빈을 대표해 노태우 88조직위원장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따라 단상으로 나온 노태우 씨가 미소를 띠고, 나와 전면의 임원들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해보인 후 축사를 시작했다.

"영광스러운 이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 있어 날로 위세를 더해가는 대정 그룹의 오늘날이 있기까지는 여기 계신 회장님 이하 임원 여러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 공도 없이 외부인으로 참석한 한 사람으로서 날로 달로 대정그룹이 그 세를 더 발전해 나갈 것을 믿으며, 축사에 갈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와아.......!

짝짝짝!

나의 인사말보다는 작았지만 꽤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어 구 과장의 말에 따라, 10인조 실내경음악단의 부드러운 선율 속에 우리는 곧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30분이 지나자 곧 여흥이 시작되었다. 초대된 가수들이 속속 등장해 노래를 열창하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 자리를 이동하며 탁자에 마련된 각종 양주는 물론 포도주, 음료수를 마시며 서로 분주하게 사교모임을 가졌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나는 세 부인을 이끌고 가장 먼저 손 정혜 씨에게 다가가 인사말과 함께 술잔을 들어올렸다.

"올 한 해 상심이 크셨겠지만 모두 이 한 잔으로 날리시고, 내년에는 보다 밝은 한 해가 펼쳐지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의 말에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포도주가 담긴 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손 정혜 씨였다. 나는 분위기를 띄우기 가벼운 조크를 했다.

"너는 뭐해, 이놈아!"

나의 말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 강 철산이었다. 내가 붉은 포도주가 따라진 그의 잔에다 내 잔을 부딪치고서야, 내 진의를 알고 얼굴을 붉히며 철산이 잔을 들어올렸다. 이에 따라 세 부인은 물론 손 정혜 씨 그리고 나의 동선을 쫓던 임원들의 입에서조차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아이고, 우리 철산이 벌써부터 술꾼 만드는 것, 아니 예요?"

수정의 조크를 내가 받았다.

"그 씨가 어디 가겠어?"

"하하하.........!"

"호호호.........!"

장내에 또 한 번 가벼운 웃음이 일고 우리는 보다 밝은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잔에다 입을 대었다. 이어 나는 사장단이 자리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제일 먼저 올해 가장 고생이 많았던 가전의 배순훈 사장을 찾아가 건배를 제의하며 말했다.

"올 한 해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는 부인의 훌륭한 내조가 있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덕분에 우리 내자들도 독수공방을 많이 했습니다만........"

"하하하........!"

나의 농담에 나를 에워싼 사장들이 왁자하니 웃음을 터트리는데, 부인들은 다만 입을 가리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더불어 유명 인사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자, 건배 한 번 합시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나는 잔을 부딪쳐오는 배 사장의 잔을 피했다. 그리고 부인에게 잔을 부딪쳐가며 말했다.

"아니, 당신 말고!"

또 한 번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나는 배 사장의 멋쩍은 웃음에서는 탤런트 유인촌과 함께 탱크주의를 말하는 그의 멋진 품격의, 신사다운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생에서도 배순훈과 유인촌이 등장하는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세탁기가 많이 팔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때뿐이었다. 후속 제품을 신속히 잇지를 못해, 종내는 그렇고 그런 제품으로 남은 대우 세탁기였다. 그래서 나는 공기방울 세탁기에 이어 요즈음 대세가 된 '드럼 세탁기'를 신속히 개발하도록 연구진에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이어 각 사장단과 연달아 잔을 부딪쳐가며 가볍게, 가볍게 술을 마셨다. 나 역시 오늘은 포도주였다.

대정전자 사장 서석준, DC텔레콤 사장 오 명, 반도체 및 컴퓨터 사장 진대제, 대정무역 사장 최우선, 대정엔지니어링 사장 이상백, 대정 헬스 케어 사장 조장희, 대정 백화점 및 유통 사장 김의철, 동서증권 사장 김만득, 전략기획조정실장 이범석 씨 등이 그들이었다. 건설의 홍성부 사장은 리비아에 있는 관계로 참석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한 인물 김만득은 우리가 동서증권을 인수하고 내가 이곳의 사장을 제안하자, 흔쾌히 이에 응해 바로 신탁은행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오랫동안 행장을 재직해 곧 경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6개월을 쉰 그가 동서증권 즉 대정증권 사장으로 정식으로 취임한 것은 채 보름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할부금융 사장도 겸직하고 있었다. 이어 나는 세 부인을 이끌고 김경제 비서실장, 김재익 기획실장, 나승렬 기획1팀장, 이순국 기획2팀장, 공병탁 경리이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구면인 김경제 비서실장 부인에게 인사를 건네며 농담을 했다.

"사모님 덕분에 요즈음은 비서실장님이 나보다도 더 건강해지셨습니다."

"호호호........! 저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철따라 보내주시는 회장님의 보약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사모님들이 한결같이 미인이세요."

"못난 사람들을 예쁘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여보, 이따 봐요."

나의 말에 공공연히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눈을 흘기는 수정이었다. 이 모습에 모인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수정이 효정의 사건을 잊고 옛날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내심 즐거웠지만 답은 그를 놀리는 것이었다.

"오늘밤은 당신이 무서워서라도 다정이 엄마하고, 인정이 엄마만 데리고 잘 테다."

"하하하........!"

"호호호........!"

나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남녀 불문하고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내 밑에서 일하다보니 우리 아이들 이름 외우고 있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재미나오?"

우리그룹 사장단에 합류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노태우 조직위원장이 다가와 웃음 띤 얼굴로 가세를 했다. 이에 나는 노태우 부인 김옥숙 여사를 보며 말을 했다.

"사모님이 참으로 미인이십니다."

"강 회장님, 그런 말 마오.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미인들은 다 데리고 사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좀 섭하다오."

하하하.......!

호호호.......!

그의 농담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지는데, 사회자의 멘트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장기자랑 시간을 갖겠습니다. 많은 경품도 준비되어 있으니, 갖고 계신 끼를 마음껏 발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우리의 호프, 우리의 희망이신 강 대정 회장님 내외분을 모시겠습니다."

와아........!

함성이 터지니 이것은 안 나가기도 곤란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비해 함께 입을 맞춘 곡이 있었다.

황태손 이 석 씨가 부른 '비둘기 집'이라는 곡이었다. 곧 나는 세 부인을 이끌고 나가 마이크를 잡고 경음악단에게 이 곡의 반주를 주문했다. 사회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이크를 하나 더 나에게 넘겨주려 했지만 나는 이를 거부 했다. 이에 세 부인이 나를 가운데 두고 밀착을 했다. 모두 이를 보고 일부는 소리 내어 웃고 일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곧 반주가 시작되고 이윽고 우리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이 부분까지 같이 노래를 부르던 내가 돌연 노래를 안 불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세 부인의 목소리만 마이크를 탔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멈출 줄 모르고 입만 벙긋거리던 수정이 발각된 것이다.

이에 또 한 번 장내가 뒤집어지고 수정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만 푹 숙였다. 이러다가는 오늘 정말 수정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아, 나는 얼른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짓궂게 사회자는 수정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노래를 주문했다. 이에 붉어진 얼굴로 망설이던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노래를 주문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가 끝난 후 사회자가 물었다.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시는 분이 아까는 왜 노래를 안 부르셨습니까?"

"나는 저이가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반드시 장난 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저도 장난을 쳤죠. 보세요. 제가 단독으로 노래 솜씨를 뽐낼 기회를 얻었잖아요."

하하하........!

호호호.........!

"그럼, 고의적이셨다는 이야기인데, 앞으로는 알아서 독창을 할 기회를 반드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생긋 웃은 수정이 마이크를 넘겨주는데, 그 웃음에 매료된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웬만한 사람은 수정과 같은 미인은 데리고 살라고 해도 못 산다. 그 웃음에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 수명이 단축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렇게 즐거운 웃음 속에, 어려웠던 또 한 해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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