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에 야전침대를 갖다놓다-- >
일요일.
오늘 오후의 날씨는 갑자기 한 여름의 날씨처럼 더웠다.
수은주를 안 봐서 모르겠지만 분명 30도를 오르내릴 것 같았다. 명사십리 흰 모래 백사장에 우리 식구는 모두 나와 놀았다. 한여름이 아닌 백사장은 우리 가족 외에는 거의 없었다. 콘도에 숙박한 우리 회사 가족들이 간혹 보였지만,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멀찍이 피해 다녔다. 뜨거운 햇빛과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 고운 입자의 백사장을 맨발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밀려왔다 밀려가는 찰랑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바닷가를 걷는 내 가족들이었다. 나는 효정이를 품에 안고 다정이와 함께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효정아!"
"네, 아빠!"
나는 품속의 효정을 다정하게 불렀다.
이제 7살이라 제법 커서 안고 있으니 머리 하나는 내 머리 위로 올라와 있었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아기였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별일은 다 겪는단다. 어린 네게는 잊기 힘든 공포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한 나쁜 기억은 빨리 잊고 좋은 쪽의 일만 많이 생각하고 생활하기 바란다."
"나에게는 든든한 아빠와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엄마가 있으니 한결 마음이 놓여요."
"그래, 그래. 네 곁에는 아빠 엄마 말고도 철산이며 많은 가족들이 있잖니? 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다. 효정이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나쁜 기억일랑 빨리 털어버려라."
"네, 아빠!"
이때 함께 걷고 있던 올해 12살의 다정이 나를 불렀다.
"아빠!"
"왜?"
"저도 효정이 사건 때 걱정을 많이 했어요.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고마워요, 언니!"
효정의 말에 빙긋 웃고 마는 다정이었다.
"이 아빠는 다정이가 우리 집안의 장녀로서 책임감이 남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단다. 그렇지만 아직은 배울 시기고 하니, 집안일은 아빠 엄마에게 맡기고 배움과 인성을 발달시키는데 집중하기를 바라."
"알았어요. 아빠!"
정말 다정이는 집안의 장녀라는 의식을 항상 갖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집안일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는 아이였다. 그것을 한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기특하기도 하지만, 때론 안쓰럽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
"여보, 이 것 좀 봐요."
뒤쪽에서 미정이 쫓아오며 손을 벌려보였다.
그곳에는 작은 조개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바닷물에 쓸려 온 모양이지."
"그런가 봐요."
신기한지 이리저리 작은 조개를 돌려가며 살펴보던 미정이
'놔줘야겠다!'
하며 바다로 던졌다.
이때 해풍이 건듯 불어 순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시원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족을 잘 보살피고, 사업도 더욱 힘차게 전재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오늘 안온한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다 내 경제력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부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호원의 장례는 삼일장으로 결정되어 오늘이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가족묘지 하나 없는 빈한한 가정 출신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홀어미 혼자 합류하여 시종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우리 회사의 간부나 간혹 들릴까 조문 하나 없는 빈 식장을 지키다가 가족들은 삼 일째가 되는 오늘 일제히 벽제화장터로 향했다. 생전 고인이 늘 입버릇처럼 말한 대로 화장을 해, 바다에 뿌리기 위해서였다.
나도 이 장례식에 참석해서 오전 11시 그의 시신이 한 줌 유분으로 변해 나오는 것을 보고,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나에게는 유럽 출장을 다녀올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우리가 극비리에 추진해오던 프랑스 국적의 회사 테크닙 지분을 인수하는 계약서에 서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출장에는 엔지니어링 사장 이상백 박사와 김경제 비서실장, 그리고 김재익 기획실장, 이미연 비서실 과장이 수행을 하게 되었다. 물론 경호원도 8명 동행을 했다.
나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국제건설의 미수금 문제로 요원들과 함께 이란 현지에서 모든 정보를 끌어 모으고 있던, 엄삼탁 해외 정보 실장을 파리 현지로 오라는 명을 내렸다. 아무튼 프랑스 현지에 도착하니 아침 7시가 갓 지나 있었다.
공항에는 이번 협상을 현장에서 총괄 지휘하던 이범석 전략기획조정실장과 이에 참여한 새내기 통상전문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지사원을 거느린 프랑스 지사장 염동현 씨 또한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인품이 훌륭한 이범석 전략기획조정실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를 맞으며 세 사람을 소개했다.
"이번에 활약이 컸던 사람들로 김의기, 김종훈, 김종현입니다. 우리는 이들을삼 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하하........"
나는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아직 젊은 사람들로 둘은 전생에서 한미 FTA체결 때 활약한 사람들로 내게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김의기라는 사람은 잘 모르겠다. 이어 나는 염 지사장은 물론 지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
고 대기시켜놓은 승용차에 올랐다.
김종현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나머지는 외국에서 마쳤다. 1977년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해 국제정치학 학부과정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198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들어가 국제상거래와 통상법을 공부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미국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나의 지시로 스카웃 한 사람이었다.
김종훈은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외무고시에 합격해 이름도 잘 모르는 아프리카의 2등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나의 지시로 스카웃한 사람이었다. 김의기 라는 사람은 1975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에 정식 발령을 받은 후에는 일본에서 국제무역 훈련에 참가했고, 독일에서 관세행정 교육을 받았다. 또 미네소타 대학에서 2년간 국제정치경제학을 공부했고, '미국의 통상정책과 통화정책 결정 과정'을 연구한 논문으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정무역에 특채 돼 미주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이번의 협상에 차출된 사람이었다. 다 고만고만한 삼십 안 밖의 나이로 그룹차원에서 통상전문가로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내가 프랑스로 날아오게 된 배경부터 설명을 하면 이러했다. 작년부터 세계 경기는 서서히 불황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1, 2차오일 쇼크로 큰돈을 벌어들였던 중동도 이제는 서서히 발주를 줄이기 시작하다가 작년부터는 그 물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여파를 세계 엔지니어링 업계의 거목 테크닙도 비켜가지 못해 작년만 해도 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 이에 테크닙은 구주조정 차원에서 5천여 명이었던 종업원을 2,750명으로 거의 절반 가까이 줄이다시피 했다.
이에 반발한 노조에서 단체행동을 하게 되니, 해고된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이고, 남은 사람들은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니 사회문제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급기야 구제 금융을 실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4억5천만 달러는 투입해야 프랑스의 자존심 테크닙이 회생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프랑스지사로부터 모두 보고 받고 있던 나는 특별 지시로 테크닙의 인수를 타진해보도록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프랑스 정부에서 외국 업체에 이를 매각하겠다는 내용을 언론에 슬쩍 흘리자 여론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국민들마저 들고 일어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도 마땅치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프랑스의 자존심이라 일컬어지는 기업이지만, 엄연히 사기업을 정부에서 구제 금융으로 살린다는 것은 선례가 될까보아서라도, 망설여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절충을 택하게 되니 국영기업인 프랑스석유, 프랑스가스, 은행 등을 통해 72%의 지분을 인수하되, 이중 약 절반 가까이 되는 34%의 지분을 우리에게 매각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강요한 것이 우리에게 정부의 우호지분으로 남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테크닙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고, 아무런 말썽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까지의 지루한 협상이 마무리 되고 우리는 이에 대한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서 내가 날아온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부청사가 아닌 힐튼 호텔을 그 약속 장소로 정했고, 그 대표로는 정부가 아닌 엉뚱한 프랑스 토털사의 화학부문 재무책임자인 다니엘 바로(Daniel Valot) 씨가 나섰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이 프랑스 정부에서 내정한 다음 대 테크닙의 CEO였다. 아무튼 우리는 2억1천2백5십만 달러를 프랑스 정부가 지정하는 은행에 납부하고, 테크닙의 지분 34%를 차지하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 플랜트시장에서 전천후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플레이어인 테크닙의 지분을 정식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은 물론, 매우 빠르고 정확한 플랜트 업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다음 대 테크닙의 CEO 다니엘 바로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멕시코의 기업가인데 회장님이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제가 그를 만날 이유라도 있습니까?"
"나를 찾아와 투자를 권유하는데 나는 이미 현직을 떠나게 되었고, 아시다시피 테크닙은 그럴 여유가 없질 않습니까?"
"만나서 손해 볼 것은 없을 것 같으니 한 번 만나보기로 하죠."
"바로 이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곧바로 멕시코 기업가에게 연락을 취해 나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그를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청하도록 했다. 그곳은 스위트룸으로 굉장히 크고 시설도 화려한 방이었다. 나로서는 이런 호화 객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상대인 프랑스 정부에 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허세 작전으로 이 실장이 잡아놓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우리 회사의 주요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이 박사는 물론 이 실장을 비롯해, 비서실장, 기획실장, 염 지사장, 멀리 이란에서 날아온 엄삼탁 해외정보 실장까지 이곳의 주요 간부들은 모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길래 내가 입실을 허락하자,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달랑 통역 하나만을 데리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앞까지 다가와 우리 일행을 한 번 죽 살펴본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멕시코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카를로스 슬림 헬루(Carlos Slim Helu)입니다."
"카를로스 슬림?"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라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익숙한 이름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아, 아니오. 단지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아서 말이오."
"네~! 회장님 되십니까?"
그의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결례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황급히 손을 내밀며 내 소개를 했다.
"네! 강 대정입니다."
"회장님이 굉장히 젊으십니다."
"그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계속 서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이쪽 자리로 앉으시죠."
"고맙습니다. 회장님!"
나는 그를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혔다.
"제가 금번에 멕시코의 두 기업을 인수하려는데 자금이 좀 모자라서 투자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다니엘 바로님도 찾아뵙게 되었던 것이고요."
"혹시 어느 업체를 인수하려는지 알 수 있을까요?"
"보험사인 세구로스 데 멕시코(Seguros de Mexico)와 레스토랑 체인업체인 산보른스(Sanborns)입니다."
금융업종 진출에 목말라 있던 나는 보험사라는 말에 흥미가 동해 물었다.
"인수자금은 총 얼마로 예상하십니까?"
"두 업체 모두 합하여 총 5천만 달러면 충분합니다. 83년부터 멕시코 경제가 급속한 불황에 빠져들고 있어서, 자산 가치에 비하면 지금 모두 헐값이라 거저줍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흐흠........! 그래요?"
나로서는 멕시코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답답했다. 회사 내라면 멕시코 지사장이라도 불러 대충이라도 이 회사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으련만, 지금은 그럴 처지도 못 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일단 여지를 만들어 놓기 위해 말했다.
"일단 저도 그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니 연락처 하나 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당장 투자를 결정하지 않으니 조금은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면 이 정도 관행이야 상식이므로, 금방 표정을 회복하고 뜻밖에도 금박으로 된 명함을 내게 건네는 카를르스 슬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가부간에 결정이 되는 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회장님!"
그를 보내고 나는 곧 엄삼탁 해외정보 실장에게 눈길을 돌렸으나, 머리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 한 때 세계 제1의 갑부!"
나는 탄성을 터트리며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내 무릎을 탁 쳤다.
"이 과장! 빨리 가서 그분을 다시 모셔오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나의 지시에 이 미연 과장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달려 나갔다. 잠시 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슬림 사장이 이 미연 과장과 함께 스위트룸을 들어섰다.
^^쓰는 대로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