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76화 (176/322)

< --공장에 야전침대를 갖다놓다--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나는 조회가 끝나자 서초동으로 향했다.

벌써 다섯 번째의 방문이었다. 내가 그를 만나 던진 말은 딱 한마디

'결정 하셨습니까?'

였다.

그러면 그는 언제나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아직 요' 이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나는 점퍼 차림으로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나승렬 사장을 불러 말했다.

"결정 하셨습니까?"

"네!"

의외의 대답에 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가 미소로 그의 입만 주시하고 있자 그가 물었다.

"저는 저를 잘 압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회장님 밑에서 더 배울 기회를 주신다면 승낙하겠습니다."

"고맙소!"

나는 덥석 그의 손을 잡아 크게 흔들며 물었다.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 하시겠소?"

"이제 이 주택도 다 지었으니, 5일만 시간 여유를 주십시오. 그동안 주변 정리를 하고 출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굳세게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곧 나는 그와 작별을 고했다. 그 길로 나는 이틀 동안 보성 화력과 울진원전 공사 현장을 시찰했다. 여기에는 엔지니어링 사장인 이 상백 사장이 수행을 했다. 그런데 동명이인 내 고향친구이자, 증평공고 출신인 이상백이 보이지 않아 내가 물었다.

"리틀 이상백은 어디 갔습니까?"

"벡텔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하하하........! 본격적으로 키워보실 모양이군요."

"내 뒤를 몇 년간 졸졸 쫓아다녀 이제 내게서 배울 것은 다 배웠습니다. 더 큰 물에서 원천 기술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지름길이죠. 한동안 고생 좀 하겠지만, 머지않아 쓸 만한 인재가 되어 나타나겠죠."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내 눈은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강동선 아저씨를 쫓아다니며 그에게서 건축 기술을 배우던 고향친구 이상백을 어느 날 불러, 이 상백 사장의 비서 겸 보좌관으로 붙여주었다. 그 결과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많은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향 친구 이상민은 다음 해에는 원하던 서울 상대에 진학해, 3학년 수료 후에 휴학계를 내고 군 입대 후 제대를 하여, 지금 4학년에 복학하여 열심히 공부 중에 있었다. 내가 졸업을 하면 우리 회사에 입사를 하라고 했는데, 두고 볼 일이었다.

다음 날.

나는 돌연 하와이로 출국해 전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서석준 씨를 만났다. 해외정보원들이 예비접촉을 통해 그가 많이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나의 돌연한 방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 그룹의 비전, 그중에서도 전자의 비전을 중점적으로 역설했고, 또한 저승사자가 당신의 몸 가까이 이르렀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이에 최연소 부총리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내려놓고 결국 우리 회사를 택했다.

당신이 몇 월 몇 일에 죽는다는 예언을 들어보라. 백이면 백, 설마 하는 심정도 있지만, 꺼림칙한 것도 사실일 게다. 그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어서 심사숙고 끝에 대정전자 사장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틀 후면 그가 귀국한다는 날짜다.

그날 저녁 나는 조금 늦게 퇴근을 하여 저녁상을 물리고 잠시 KBS의 저녁 9시 뉴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방송화면에 불타는 화재현장이 나타면서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 6시 경 충남 아산 군 온양 읍 실리에 있는 온양 펄프공장 폐지야적장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이 불로 인해 야적장에 쌓여있던 2천4백 톤의 폐지와, 7백 톤 가량의 펄프가 불탔습니다. 불은 10시간 만인 오늘 오후 4시에 진화되었으나,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의해 진화에 큰 어려움을 겪어, 야적장에 쌓여있던 폐지와 펄프가 전소 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불로 인해 공장 측에 엄청난 재산적 손실을 안겨주었습니다. 경찰 측 추산에 따르면 온양펄프는 3억1천만 원 가량의 재산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인명 피해가 없어 다행입니다만, 이렇게 되면 온양펄프의 재기가 한동안 어렵게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상자용 원료중의 하나인 중심지(中心紙)를 일 1백 톤 생산하고 있는 온양펄프는, 내수경기침체로 인해,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홍콩 등 동남아로의 판로를 모색해 왔으나,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데다, 이런 물질적 피해는 가뜩이나 어려운 온양펄프의 재기를 더욱 어렵게 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상 온양펄프 화재현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나는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비릿한 미소를 짓고 TV뉴스를 껐다. 훗날 신호그룹을 일구는 이순국 사장이 그곳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일 후, 오전 6시.

책상이 모두 치워진 대회의실에는 그룹 내 부장 급 이상 전 간부들이 집합해 있었다. 각 사별로 오와 열을 맞추어 전 간부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가운데 김경제 비서실장이 단상에 설치된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들을 아침부터 모이라 한 것은 그룹 차원의 인사 발표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내정된 인사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대정전자 사장에 전 상공부 장관 출신 서석준 씨가 임명되었습니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간부들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김 실장의 발표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금번 저희가 인수한 대한전선 가전부분을 별도로 독립시켜 대정가전으로 개명된 이 부분의 사장에는 전 대정전자 사장 배 순훈 씨가 임명되었습니다. 또 새로 출범하는 DC텔레콤 사장에는 오명 전 체신부 차관이 임명되었습니다. 또 새로 출범하는 반도체 및 컴퓨터 사장에는 진대제 전 연구실장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금번 새로 신설되는 직제인 전략기획조정 실장에는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이범석 씨가 임명되었습니다. 참고로 직급은 각사 사장 급입니다. 그 밑으로 신설된 기획실장에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셨던 김재익 님이 임명되었습니다. 그 외 기획 1팀장에는 나승렬 씨가 임명되었습니다. 기획 2팀장에는 이순국 씨가 임명되었습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으로 회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나는 내 뒤로 죽 배석해 있는 기존, 신임 사장단을 한 번 바라본 후, 단상의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그룹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마음으로, 눈으로 체득하고 있을 것입니다. 해서 우리 그룹은 국내 일등 아니 세계 일등을 지향하는 회사답게, 금번에 우리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인재들을 새롭게 모셨습니다. 이 분들을 중심으로 각사는 일치단결하여, 국내 1등 아니, 세계 1등 기업이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환영사에 가름하겠습니다."

사장단과 모인 간부들의 갈채가 쏟아지는 속에서 나는 단상을 내려왔다. 다음 날 사보에는 어제의 임명 소식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게재되었다. 대정전자 사장: 서석준 대정가전 사장: 배순훈 DC텔레콤 사장: 오 명 반도체 및 컴퓨터 사장: 진대제 전략기획조정실장: 이범석(사장 급)기획실장: 김재익(전무)기획 1팀장: 나승렬(상무)기획 2팀장: 이순국(상무)정보 1팀장: 이청신(이사)정보 2팀장(해외): 엄 삼탁(이사)경호 팀장: 소진열(부장)법무 팀장: 공석조정실장: 서 인석(전무)경리 이사: 공병탁다음 날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미국 지사에 특명을 내렸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접촉을 해서 어떻게 하든 지분을 대폭 인수하되, 곧 출시될 우리의 컴퓨터에 그들이 개발한 윈도우 소프트 2.0을 탑재하겠다는 것을, 허락한다는 조건 하에서의 협상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83년 11월 달이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청주 오창 건설에 주력하여 새롭게 설립되는 품목의 공장은 물론 기존 대한전선의 가전부분도 각각 구미와 인천에 나누어져 있던 것을 모두 철수해서, 오창 공단으로 옮겼다. 기존 공장은 모두 헐고 아파트나 상가 또는 오피스텔을 지어 분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가전부분을 인수한 후에도 계속해서 적자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전날 통보한 대로 새벽 6시가 되자 몰려든 서울에 있는 사장단은 물론 비서실 및 전략기획조정실의 전 간부들을 이끌고 오창 공단으로 쳐들어갔다. 수십 대의 차량이 꼬리를 물고 '대정가전'이라 쓰인 제1공장을 들어서니, 공장은 허무할 정도로 고요 그 자체였다. 시간을 보니 8시가 갓 지나 있었다. 정문 경비만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뛸 뿐이었다.9시 출근이라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사장단과 비서실, 기획실 인원들을 이끌고 공장 곳곳을 샅샅이 살폈다. 흑백TV라인, 칼라TV라인, 전자레인지, 세탁기, VCR라인, 냉장고, 팩시밀리, 카 오디오, 라디오 라인 등이었다.

외관상으로 봐서는 정리정돈이 확실하게 안 되었다는 점 외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 수 는 없었다. 수행한 사람들이 무엇을 수첩에 열심히 메모하나, 무엇을 메모하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8시 40분 되자 배순훈 사장을 필두로 간부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우리의 출현에 깜짝 놀란 배 사장이었다.

"너무 나태해진 것 아니오? 서울에 있을 때는 6시면 어김없이 아침 조회에 참석하던 사람이?"

"면목 없습니다."

"이유가 뭐요?"

"아직도 이들은 대한전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 말로 나는 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불을 보듯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왜 먹히지 않죠?"

나는 그동안 배 사장이 개혁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을 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이들도 승계 당시 자신들을 안 자르겠다는 인수조항이 있음도 알고 있고요!"

"흥! 돼먹지 않은 소릴. 그렇다고 그것을 두고 볼 기업주가 어디 있단 말이오? 일단 알았으니, 시간 되거든 대리급 이상의 간부들은 전부 집합을 시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얼굴이 벌개져서 물러나는 배순훈 사장이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길로 공장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머리에 문득 내가 사업초창기에 실시해 재미를 본 사업단위제가 떠올랐다. 새시, 하이새시, 유리, 철물 등 분야별로 나누어 맡긴 결과, 지금도 그들은 매년 연말이면 못해도 200 ~ 300%, 어떤 부서는 500%의 성과급을 받아가는 곳도 있었다. 물론 내가 영업을 많이 해준 덕도 있었지만, 그들도 적자가 나면 퇴출된다는 위기의식에 불철주야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또 하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니 삼성의 휴대폰 사업이었다. 삼성이 일본과 기술제휴를 하여 휴대폰 사업에 진출하였으나, 불량률이 10%가 넘는 등 도저히 가격 경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니, 전 생산 공장의 휴대폰을 모조리 끌어 모아 불태운 사건이었다. 이후로 뚜렷한 품질개선을 이루어 비약의 발판을 마련한 생각까지 내 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는지, 배 사장이 직접 나를 모시러 왔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조금 전의 명을 철회했다.

"간부들뿐만 아니라 전 종업원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시오."

"네, 사장님!"

배 사장이 급히 자리를 떴다. 그런 내 눈에 공장 조성이 된지 얼마 안 되어 맨살을 드러내 놓고 있는 운동장이 보였다. 잔디가 심어져 있었으나 아직 땅에 제대로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가에는 사람이 못 들어가게 전부 줄을 쳐놓고,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요소요소에 붙어 있었다. 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사원용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고, 종업원용 기숙사 역시 마치 학교 기숙사를 보듯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나는 이렇게 그들을 대우해 주고 있는데, 그들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괘심했다. 내 눈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사내 방송이 시작되자 작업복을 갈아입은 남녀 종업원들이 공장가에 서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배 사장 역시 지시를 하고는 바로 내 옆에 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전부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마이크도 설치하시오."

"잔디가........?"

"무슨 헛소리요! 잔디가 그렇게 중요하오! 적자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흑자만 나면 이 까짓 잔디 수십 번이라도 다시 심을 수 있소."

눈치 없이 뿔이 난 나를 제대로 건드린 배 사장이었다. 미처 대답도 못하고 부리나케 안으로 달려가는 배 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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