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부끝없는 도전-- >
손을 놓으며 내가 아들을 다정하게 불렀다.
"철산아!"
"네, 아빠!"
"오늘 아빠 엄마랑 모처럼 한 번 놀러갈까?"
"어디로 가실 건데요?"
"화진포로 가보자. 거기 가서 드넓은 바다를 보노라면 답답했던 가슴도 확 트이고, 그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내로서의 웅지도 키우는 거야."
"네, 가요! 대신 아빠가 저도 엄마랑 효정이 만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하하하........!"
웃음의 여운이 남은 넉넉한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아빠가 변명 좀 해야겠다. 너는 두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내야. 우리 집안의 장남이기도 하고. 너도 더 커보면 알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내란 말이다. 사내에게 사내로서의 애정을 잘 드
러내지 않아. 오히려 엄한 표정을 짓지. 이것을 사랑이 없다고 느낀다면 곤란하지."
여기서 일단 말을 끊었던 나는 좀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곁에는 항상 표현을 않지만 늘 너를 지켜보고 있는, 이 아빠의 따뜻한 가슴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해. 다만 여자들에게처럼 겉으로 잘 드러내지를 않을 뿐이지. 그런데 이것이 서운하다면 이제부터는 이 아빠가 좀 더 표현을 하도록 노력하지.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자들에게 만큼은 아니야. 이 점 늘 기억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알았어요, 아빠! 저도 이제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도 하겠어요."
"거기다 한 가지 더."
"네?"
"당장 내일부터라도 영어 회화 학원에 등록해라. 우리 세대와는 달리 너희 세대는 영어는 필수를 넘어 기본이야. 여기에 제2 외국어로 한 두 개 더 익히면 좋지. 세계가 이제 더욱 좁아져 한 이웃이 된단 말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아빠!"
"가자! 네 엄마 기다리겠다."
"저도 준비를 해야죠."
"그래. 준비하고 얼른 나오너라!"
"네, 아빠!"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철산의 방을 나왔다. 방 밖에 기다리고 있던 수정이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잘 하겠데요?"
"뭘? 언제는 그 아이가 비행 소년이었어?"
"그것은 아니지만........"
"하하하.......!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니, 어디 두고 봅시다. 당신도 얼른 준비하고. 효정이를 먼저 준비시켜야 되지 않겠어?"
"그런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발 철산이나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으면 좋겠어요."
"그 도도하던 황수정은 어디 가고, 자식을 걱정하는 모정만 남았군."
"이이가 정말.......!"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수정이었다. 우리가 화진포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1시였다. 서울에서 늦게 출발한 탓이었다. 이곳에는 연구원들과 회사원들이 아무 때나 머물 수 있는 500실 규모의 거대한 대정콘도가 있지만, 내 전용 별장도 있었다. 물론 콘도에는 외부 손님도 받지만 우리의 연구원들과 사원들이 우선이었다.
나는 곧 차를 내 전용 별장으로 몰고 가게 했다. 차는 곧 72만평, 둘레 16km의 화진호를 끼고 달려 이내 울창한 송림 사이로 진입했다. 그러자 곧 금빛 잔디로 조성된 정원이 나타나고, 전적으로 해당화만 심은 제법 큰 규모의 꽃밭도 나타났다. 그 뒤로 나지막한 야산이 나타나고, 그 야산 중심에는 성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2층 별장이 위용을 드러냈다.
우리는 곧 붉은 보도블록이 깔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모두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알아서 트렁크를 열고 가지고 온 짐을 꺼냈다. 나는 효정을 안고, 수정은 철산의 손을 잡고 석축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50m 정도 길게 이러진 돌로 된 계단을 오르니, 그곳부터가 본격적인 별장 관내로, 누런 잔디와 함께 이곳에도 해당화 화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봄이면 피처럼 붉은 해당이 장관을 이루었을 텐데, 아직은 겨울이라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이윽고 원형의 성채로 들어서니 마침 관리인 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이 관리인들은 대정콘도 소속으로 가끔 이곳에 들러 청소는 물론 시설물 관리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셨습니까? 회장님!"
오십대인 이 사람들은 부부로 우리의 출현에 다소 놀란 듯 했으나, 얼른 붙임성 있게 인사를 해왔다.
"수고들 많으십니다. 일요일인데도 나오셔서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저희들에게 일요일이 따로 있나요. 다만 저희들의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죠."
"고맙습니다. 청소는 아직?"
"아닙니다. 회장님! 마침 청소도 다 끝난 참이었습니다. 혹시 점심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아주머니이지만 참으로 붙임성이 있었다.
"아직 점심 전이지만 점심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비록 솜씨는 없지만 명하시면 원하는 음식을 해 올리겠습니다."
"아주머니 솜씨 좋은 것이야 우리가 다 아는 일인데, 너무 겸양하실 필요 없고요. 점심은 자셨습니까?"
"우리들도 아직........."
"그럼, 같이 해서 함께 들도록 하죠."
"저희들이 어찌 감히........"
"그럼, 점심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경호원들이 알아서 짐 보따리를 주방으로 옮겨 놓았다.
"아빠! 내려주세요."
"응? 효정이는 아빠가 싫은가? 왜 내려달라고 하지?"
"아빠 힘드시잖아요."
"아이고, 우리 예쁜 딸! 아빠 생각까지 했어. 이 아빠는 말이야 효정이라면 하루 종일 안고 있어도 힘들지 않단다."
"거짓말. 저 요새 살 많이 쪘단 말 이예요."
"그랬어? 우리 공주님이 어쩐지 조금 무겁더라."
"아빠! 그런 말 숙녀 앞에서 하면 실례 예요."
"하하하........!"
"호호호........!"
효정의 말에 나만이 아니라 듣고 있던 사람 모두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여보, 옥상으로 한 번 가봅시다."
"네!"
나는 웃음 끝에 수정을 불러 함께 옥상으로 가자고 했다. 효정을 여전히 안은 채 나는 내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또 우리는 내부 계단을 통해 옥상 출구로 나왔다. 그곳에는 이미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어, 우리의 행동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멀리 군청색의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앞으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녹색의 섬들과 시선을 가까이 당기면, '명사십리'라는 말처럼 밟으면 쇳소리가 나는 하얀 백사장이 껍질 벗긴 뱀처럼 길게 가로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해당화 군락지가 있고 그 뒤에는 10층의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우리의 대정콘도가 소나무 밭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 앞에는 부서지는 흰 포말이 장관을 이루고 있고, 때로 갈매기 떼들이 하늘 높이 비상을 하기도 했다.
시선을 우로 돌리니 드넓은 화진포에 고니를 비롯한 겨울 철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계속해서 내가 몸을 돌려 바라보니 이기붕 별장, 김일성 별장, 이승만의 별장이 차례로 보였다.
"여보, 올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곳 이예요."
수정이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대어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니 다행이군. 어때? 내게 시집오길 잘 했지?"
"이 이가 정말, 또 자화자찬 하시려고요?"
"그럼, 해야지. 그 도도하던 황수정을 내가 어떻게 꺾었으며........"
"여보!"
더 이상의 말이 나올까봐 철산의 눈치를 보며 급히 내 입을 막아오는 수정이었다.
"이 사람이 왜 이래?"
나는 비켜서며 그의 입 막으려는 행위를 피하고, 멀리 푸른 파도에 시선을 주고 있는 아들 철산을 불렀다.
"철산아!"
"네, 아빠!"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떠냐? 가슴이 탁 트이고 웅지가 생기지 않느냐?"
"그 보다는 배고픈데요?"
"뭐?"
"하하하........! 아니 예요. 아빠 말씀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모름지기 사내라면 가슴에 원대한 뜻을 품고, 시선은 멀리, 그러나 행동은 차근차근,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전진해 나가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빠!"
"좋았어! 네 말 한 마디로 오늘 이 아빠는, 시간을 투자해 여기에 온 보람을 단단히 느낀다."
나의 말에 빙그레 웃기만 하는 철산이었다.
"여보!"
다시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대온 수정의 눈가가 어느덧 촉촉이 젖어있었다.
"이 사람, 오늘 따라 왜 이래?"
살짝 얼굴을 붉힌 수정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따라 당신과 너무 사랑을 하고 싶네요."
"이 사람이 정말.........!"
끝내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지만, 효정이 무슨 눈치를 챘는지, 제 어미를 이상한 눈치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곧 1층으로 내려가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그러고 1시간 후에는 그곳을 떠났다. 해가 너무 짧아 지금 떠나야만 초저녁에 서울로 입성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끝내 수정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보초병들이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나는 그날 밤을 수정의 집에서 묵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아침 일찍부터 청주로 향했다. 이 시찰에는 건설의 홍성부 사장, 배용석 전무, 관리과의 채 선장 이사, 비서실의 이 미연 과장, 구인철 과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오창의 우리 공장이 들어설 공단용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이곳은 지금 전 통의 지시로 예비비가 투입되어 용지에 해당되는 땅은 전부 보상이 시행되고 있었고, 일부 값을 더 달라고 응하지 않는 자들은 강제 수용을 하겠다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신속하게 용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는 대부분이 논이거나 나지막한 임야인 이곳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보는 우측으로는 2년 후면 중부고속도로가 착공되어 지날 곳으로, 아직은 논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 드넓은 땅 중에서도 1차 2백만 평의 공장 용지가 조성될 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이곳이 일차 공단용지인데........ 채 이사!"
"네, 회장님!"
여전히 부지런하고 군기 든 신병 같은 모습의 채 이사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이 주변의 터는 매입이 끝났습니까?"
"네, 회장님! 회장님이 지시한 대로 청주시가 이를 발표하기 전에 미리 조금은 높은 가격을 주고 전부 매입해 놓았습니다. 사원용 아파트나 상가를 짓는데 별 문제가 없도록 벌써 시와 용도변경 협의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잘 하셨군요. 들으셨죠?"
"네. 회장님!"
내 시선이 일본 시미즈건설 출신의 배 박사에게 멈추었으므로 배 전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공단 조성도 우리기 직접 하기로 했죠."
"네, 회장님!"
이번에는 홍성부 사장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공단을 조성하면서 병행하여 공장을 지음은 물론 사원아파트 또 편의시설마저 동시에 지어, 우리 사원들이 입주해 생산 공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배 전무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내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넉넉하게 터를 매입해 놨으므로, 녹지지대도 군데군데 만들어 너무 삭막한 도시가 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설계에 반영되도록 하겠습니다."
"갑시다. 율량동 아파트를 지을 대지로."
"네, 회장님!"
내 한 마디에 줄줄이 승용차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그룹의 간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