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62화 (162/322)

< --제 2부끝없는 도전-- >

1983년 2월.

나는 설을 맞아 지금 리비아 건설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1시. 모래 바람이 불어 한 치 앞도 분간 할 수 없는 길을 뚫고 나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마저 죽을 맛이었다. 비서실장 김 경제 전무이사를 비롯해 대정건설 홍 성부 사장, 경호원 둘이 필사적으로 나를 보호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거센 모래바람이 그치며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500미터 전에서 갑자기 타고 온 차의 시동이 꺼졌다. 게이지를 보니 오일이 다 되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때부터 내려서 걸었다. 벵가지 동쪽 250km 지점에 있는 토부록에서도, 더 남쪽으로 250km 지점에 건설되고 있는 군용비행장 건설 현장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가깝게 보이는 불빛이었지만 걸어보니 무척 멀었다. 그곳에서도 또 우리는 30분을 더 걸어 약 오전 2시쯤에야 마침내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한밤중이지만 나의 도착에 불침번을 서고 있던 자들이 간부들은 물론 모든 근로자를 깨웠다. 자고 있던 추 호석 상무이사가 제일 먼저 뛰쳐나와 나를 맞았다. 비록 아직 졸린 눈을 비비며 맞고 있지만 말이다.

"회장님! 이 밤중에 이 먼 나라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고생이 많소? 그래? 공사 진척 상황은 어떻소?"

"언제 우리가 공기 어기던 가요? 이번 건도 상당히 공사 진행이 빠른 편입니다."

"다행이오. 다들 이역만리 타국에서 밤낮을 잊고 열심히 한 덕분임을 내 잘 알고 있소.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설이네요. 근로자들이야 모두 알고 들뜬 마음들이지만, 우리야 바쁘다보니 금방 기억했다가도 잊고 말죠."

"내 그래서 트리폴리 출장길에 위안 차 들렀소."

"감사합니다. 회장님! 근로자들에게는 회장님의 방문이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모두 집합한 모양이니 한 말씀 하시죠."

"그럴까요?"

그러고 보니 어느덧 1천여 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이 모두 집합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뒷사람이 안 보일까봐 급히 사무실에서 갖다 붙여놓은, 두 개의 책상에 올라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고국에서는 오늘이 설 아닙니까? 그래서 먼 먼 타국에서 고생하는 여러분들을 위안할까 하고, 강행군을 하여 오다 보니 오히려 밤중에 도착해, 여러분들의 밤잠만 설치게 했군요."

"아닙니다!"

내 말에 마치 군기 든 신병처럼 우렁차게 답을 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근로자들이었다.

"여러분!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멀고 먼 타국에서, 이 험한 환경에서 부쳐주는 달러로 가족이 편안하게 생활함은 물론, 2차 오일쇼크를 맞아 휘청거리던 한국경제가 버텨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좀 더 여러분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더 나아가 국가를 위해, 계속 분투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설이라지만 큰 선물을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금일봉이라도 추 상무에게 전하고 갈 테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근로자 여러분! 이 강 대정 여러분들을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와아..........! 우리 회장님! 만세!"

"대정건설 만세!"

갑자기 한밤중의 사막이 떠나가도록 함성을 지르는 근로자들이었다.

나는 곧 급조된 단상에서 내려와 앞에서 선 근로자들부터 차례로, 그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하나하나씩 맞잡아 나갔다. 나와 악수를 하는 와중에 어느 근로자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내 손에 입을 맞추는 근로자들이 있는가하면,

'설이라고 방문을 해주셔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라고 울먹이는 근로자, 어느 근로자는 조금 전의 내 연설을 빗대어

'회장님,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라고 말해 폭소를 유발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추 상무에게 말했다.

"밥 있으면 나 밥한 술 주세요."

"네? 아직 식사도 못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전부 못 먹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추 상무가 눈짓을 하자 부장 하나가 현장식당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반찬이 없는데 어떡하죠? 김치 밖에는. 밥도 다 식은 밥뿐입니다."

부장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갑시다."

나는 일행을 데리고 현장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내가 추 상무에게 말했다.

"오다가 기름이 떨어졌어요. 식사할 동안에 기름 좀 채워줘요."

"어디 입니까?"

나는 비교적 상세히 차가 멈추어진 곳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곧 우리는 정말 다 식은 밥에 김치 몇 조각을 얹어 허겁지겁 밥 한 그릇씩을 비웠다. 모두 식사가 끝나자 말했다.

"출발합시다."

"네? 이 시간에 어디를 가시겠다고?"

"내일 오후에 카다피 원수와 면담약속이 잡혀있어요. 아무래도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것 같군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추 상무였다.

"이것 적지만 근로자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추 상무에게 금일봉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비록 한밤중이지만 트리폴리를 향해 다시 출발을 했다. 트리폴리는 리비아의 수도다. 리비아는 남한의 18배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인구는 겨우 200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지중해 연안에 면한 트리폴리나 벵가지 등은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기후가 나았지만 내륙의 사막은 거의 인간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신은 공평해서 이 척박한 땅에도 많은 지하자원 특히 그중에서도 원유를 다량 매장시켜주었다. 이런 나라에 우리가 처음으로 공사발주 소식을 접한 것은 1978년도였다. 중동지사에서 가리우니스 의과대학 신축공사 발주소식을 보내온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건설 내부의 분위기는 모두 회의적이었다. 리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로 이미 북한과는 수교가 되어 있었지만, 우리와는 전혀 수교도 되어있지를 않아, 공사를 해도 공사대금을 제때 받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으로 간부들 대부분이 머리를 졌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고지도자인 카다피가 반미주의자라 그 우려는 더욱 깊었다. 그러나 나까지 참여한 확대회의에서, 난상토론 끝에 나는 최종 단안을 내렸다. 원유는 풍부한 나라이니, 최소한 원유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일단은 견적을 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리비아에 발을 들여놓았다. 몇몇 건설업체를 제치고 우리가 가리우리스 의과대학 신축공사를 수주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어 우리는 계속해서 리비아 내의 공사를 수주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도로, 공장, 군사 비행장 등 다방면에 걸친 공사였다. 이는 처음 우리가 의과대학 공사를 마쳐가고 있을 때 보여준 공기단축 및 신뢰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맡은 이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이들의 실수로 미처 기숙사가 설계도면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뒤늦게 본 공사와 같이 이것을 개교에 맞추어 끝내달라는 주문을 했다. 이에 우리는 적극 응해 횃불을 밝혀가며 공기를 맞춰준 것이 그 신뢰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매번 수월하게 공사를 수주하고 공사를 행한 것은 아니었다. 매번의 견적 싸움에 한국의 대우가 꼭 참여해 견적 싸움을 벌였고, 한 번은 카다피가 직접 나를 만나고 싶다고 청하기에 대면을 했더니 어려운 부탁을 했다. 리비아 남쪽 국경 차드 부근에 있는 우조비행장을 건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난공사인지 이탈리아 업체가 수주를 했다가 포기한 공사였다. 나는 또 이 문제를 가지고 간부들과 또 한 번의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현장의 최고 지휘책임자인 추 호석 이사(당시)가 제안하길, 우물만 있으면 어떻게 하든 공사가 가능하니 우물만 파달라는 제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 또한 그 말에 동감해 이를 카다피에게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카다피 역시 화답해 스웨덴 기술자를 동원해 수개월의 탐사 끝에 물을 찾아냈다. 우리는 곧 이 공사를 수주했고, 카다피는 자신의 관심사인지라 공사 기간동안 서너 번을 이 현장에 다녀갔다. 그때마다 우리 근로자들과 기념 촬영도 했고, 친필 사인도 해주었다. 리비아에서 카다피의 친필은 무가지보로써 어디가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아주 진기한 물건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공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카다피는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79년 리비아주재 미국 대사관이 시위대의 공격으로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카다피를 '미친 개'라고 부르며 더욱 리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이런 중에 우리는 결정적으로 대우를 배제시킬 수 있는 쾌거를 이룩했다. 우리가 도로 공사의 일부 구간을 끝내, 이에 대한 기성 분을 받아야 했으나, 웬일인지 리비아 도로국에서는 이를 제때에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추 상무와 부장 하나가 이를 항의하러 도로국을 방문했더니, 국장이 말하길 공사가 너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상부에 미처 대금청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우리의 건설 팀이 현장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화 도중 도로국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와 바로 옆방으로 국장이 전화를 받으러 간 일이 있었다. 그러자 무료해진 추 이사가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니, 빨강, 파랑, 노랑, 삼색으로 종횡으로 내달린 선들이 무수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보는 순간 이것은 공사계획도라는 생각이 들어 추 이사와 수행한 부장은 열심히 이를 기록했다 한다. 잠시 후 국장이 도로 나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완벽한 리비아의 건설 계획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이를 외무부에 정식으로 통보했다. 그렇게 되자 더 이상 대우는 견적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중동에서 우리 기업체끼리 과당경쟁을 일삼자, 선 공사발주 소식을 통보한 업체에게 기득권을 인정해, 나머지는 아예 견적 자체를 참여할 수 없도록 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에 올해 말 즉 83년 11월 달에 최종 발표되는 대수로 공사도 포함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회사만 단독으로 응찰 할 수 있는 기회까지 덩달아 생겼다. 물론 사전에 리비아 당국의 허가부터 얻는 것이 관건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이 문제 때문에 지금 카다피를 만나러 트리폴리로 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라 대부분의 상가가 철시한 저녁 6시.

나는 카다피의 집무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각각 통역만 한 명씩 배석시킨 단독 면담이었다. 통역으로는 그간 트리폴리에 대기하고 있던 대정엔지니어링의 사장 이 상백 박사가 맡았다. 대정엔지니어링은 우리가 울진원자력을 수주하기 위해 만든 별개의 회사로써, 지금은 수주에 성공한 울진원자력 1, 2호기 외에 몇 개의 공사를 수행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금번 9월에 발주되는 대수로 공사 입찰에 참여할 건설업체를 선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도 기회를 주십사하는 부탁말씀 드리기 위해서 뵙자고 했습니다."

이를 이 상백 박사가 영어로 통역을 했다. 나도 이제 기본 영어는 구사할 줄 아나, 깊게 들어가면 혹시 실수가 있을까 하여 이 사장을 통역으로 참여시킨 것이다.

"그간 대정이 리비아에 끼친 공로를 생각하면 당연히 기회를 드려야지요. 그러나 이 공사에는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미국의 압박 수위가 점점 거세지니, 우리의 원유를 팔아먹기가 점점 힘이 들어요."

여기서 일단 말을 멈추고 탁자 위에 이미 따라진 물을 조금 마신 카다피가 계속해서 발언을 이어 갔다.

"그래서 우리 본래의 의도야 무조건 다 현금으로 드리고 싶지만, 최악의 경우 공사대금의 절반을 원유로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수용할 수 있어야만 이 공사가 가능할 것입니다."

"사전에 그런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만한 위험과 자본도 감당할 여력이 되고요."

"그래요? 그렇다면 내 주저 없이 대정에게는 입찰 기회를 주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다른 하실 말씀은 없고?"

"네. 특별히 달리 할 말은 없군요."

"좋습니다. 예까지 먼 길을 오셨으니, 저녁이나 함께 하면서 못 다한 이야기는 하도록 하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대수로 공사에 응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겸하여 나는 카다피와 더한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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