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면 돌파-- >
곧 설이 다가왔다. 나는 음력설을 맞아 전사적으로 3일 간의 휴식을 명하고, 나 또한 고향을 가기 위해 서둘렀다. 설 하루 전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미정을 닦달해, 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가정부 아주머니도 삼 일 동안의 휴가를 주었다.
내가 미정에게 물었다.
"준비 다 됐어?"
"네, 다 돼가요. 다정이 옷만 갈아입히면 돼요."
"선물은 준비 좀 했어?"
"아니요. 미처 못 했어요. 그냥 돈으로 드리면 안 될까요?"
"돈은 돈이고, 그냥 빈손으로 가기는 뭐 하잖아."
"가다가 사죠, 뭐."
"그럼, 그렇게 하자고. 당신이 이해 해."
"뭘 요?"
"이번에는 수정이 명희 다 함께 데리고 가야겠어."
"쳇, 어머니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시겠네요. 맏손자까지 데리고 가니. 나도 학교 휴학계 내고 아들이나 하나 낳을까 보다."
"아들 낳을 자신은 있고?"
"당신 말대로 하면 된다면서요?"
"그건, 그래. 80% 이상의 확률로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야."
"100%가 아니고요?"
"그건 삼신할머니의 영역이니, 넘보지 말자고."
"호호호.......! 알았어요."
"그러나저러나 우리 다정이 설빔이 아주 예쁘네. 색동저고리가 정말 잘 어울려."
"그림 같죠? 그런데 어째 커가며 당신을 닮아 가는 것 같지 않아요?"
"아니, 나는 당신 닮아가는 것 같은데?"
"그래요?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커봐야 알지 뭐."
"그렇겠죠? 가죠 뭐. 뭐, 빠진 것 없나?"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뭔데요?"
"뽀뽀!"
"쳇, 알았어요."
정말로 미정은 내 입술에 살짝 뽀뽀를 했다.
"다정이는 내가 안고가지."
"네!"
내가 다정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미정은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들었다.
"우리 다정이 예쁘네. 누굴 닮았을까?"
"아빠!"
"엉? 아빠는 엄마 닮은 것 같은데?"
"아니야. 엄마가 그랬어. 아빠 닮았다고."
"그럼, 그렇다고 하고 아빠한테 뽀뽀해야지?"
"따가워서 싫어!"
"아빠 면도 했잖아. 이젠 안 따가워."
"그래도 싫어!"
"에이, 그러면 다정이 미운데."
"안 돼. 아빠가 나 미워하면. 아빠가 그냥 해."
"알았다."
"쪽!
나는 다정이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그러자 얼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입을 훔치는 다정이었다. 비록 옛날같이 '디러워'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행동만은 여전했다. 이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차 앞에 와 있었다.
아직 아무데도 가지 않은 아주머니가 배웅을 나와 있었다."
문단속 잘 하시고, 어디 가실 데 있으면 다녀오세요."
"네, 사장님!"
"보너스는 좀 드렸어?"
내가 미정에게 물었다.
"네. 많이 못 드리고 100% 드렸어요."
"잘 했어. 그럼, 다녀올게요."
"네, 사장님! 고마워요. 잘 다녀오시고요."
"네, 나주머니도 명절 잘 보내세요."
"네, 사장님!"
나는 곧 미리 뒷좌석에 앉은 미정에게 다정이를 넘기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곧 부드럽게 미끄러져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는 곧 현대아파트에 가서 멎었다. 수정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차에서 기다리지."
"네!"
수정과의 첫 대면이라 긴장이 되는지 미정이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곧 3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벨을 누르자 수정이 아기를 안고 나오고, 장모님도 따라나섰다.
"나도 청주 가려고. 여기 쓸쓸하게 혼자 남아 있으면 뭘 해."
"알겠습니다. 제가 청주 집까지 모셔다 드리죠."
"고맙네, 사위!"
나는 둘을 데리고 차로 향했다. 우리가 현관에 나타나자, 다정이를 품에 안은 미정이 차에서 내렸다.
"둘은 처음이지? 서로 인사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 인사를 하는 미정과 수정이었다.
"장모님이야, 인사드려."
내가 미정이를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가볍지도 그렇다고 정중하지도 않게 인사를 하는 미정이었다.
"어찌 사위가 맞은 여자들은 한결같이 미인일까? 참으로 곱기도 하네. 나는 우리 수정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봐?"
"엄마!"
수정이 겸연쩍은 얼굴로 팔을 툭 쳤다.
"연속극 잘 보고 있어요."
미정이 수정이 나오는 청실홍실이라는 연속극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고마워요."
수정이 기쁜 얼굴로 답을 했다.
"자, 가자고. 다들 차에 타시고."
"네!"
미정이 조수석에 타고, 뒤에는 모녀가 나란히 탔다.
미정이 뒤로 고개를 돌려 붙임성 있게 말했다.
"어디 아기 좀 볼 수 있을까요?"
"어머, 딸이 엄청 예쁘네요. 철산이 아빠 말로는 다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비로소 다정을 칭찬하는 수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식을 맞교환하는 꼴이 되었다. 수정이도 다정이를 안아보길 원했으므로 서로 바꾸게 된 것이다. 다정이 싫어서 버둥거렸지만 미정의 눈총에 마지못해 수정의 품에 안겼다. 나는 이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곧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3시간을 달려 청주 모충동에 도착했다. 차가 적으니 많으니 하는 시대지만 일시에 고속도로로 쏟아져 나오니, 조금 정체가 되어 평소보다 1시간은 더 걸렸다. 그 한 요인으로 지금과 같이 고속도로가 확장되지 못한데도 한 원인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장모님을 차에 내려주면서 용돈으로 50만 원을 드렸더니, 사양하는 척했지만 끝내는 받으시면서 아주 좋아하셨다. 그러고 나니 확인할 필요성이 있어 내가 다시 차에 오르며 미정에게 물었다.
"처갓집에 50만원 부치라는 건 부쳤어?"
"네, 어제요."
"잘했어."
"고마워요, 여보! 번번이 미안하기도 하고."
"명절인데 아무래도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겠어. 별도로 드리는 게 당연하지."
"엄마가 미안해하면서도 엄청 좋아하셨어요. 사위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라는 걸,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됐어. 내가 공치사받자고 하는 건 아니니까. 돈이 좀 있어서 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
이때 수정이 끼어들었다.
"철산이 아빠! 저도 고마워요. 엄마한테 뭔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세요."
"다 똑같이 드리는 거야. 누구는 적게 누구는 많게도 없어. 그렇지만 시골 내 부모들한테는 100만원을 드릴 테니 이해해.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드리면 재미없지. 각각 30만원 씩 어머니한테 드리는 것으로 하고, 나도 시침 뚝 뗄 수는 없으니 10만원 드리는 것으로 하자고."
"호호호.......! 역시 배려심이 많은 당신이네요. 그래도 며느리들 안 미안하게 게 배려를 하다니."
미정의 말에 나는 미소만 띠고 답을 안했다. 대신 나는 차를 출발시키는 것으로 화답을 했다. 채 10분도 안 되어 차는 문화동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이곳도 특별 3일 휴가가 시행되어, 모두 떠난 뒤라 공장 문이 닫혀있었다. 다만 경비 둘이 주야로 나뉘어 교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비직 같은 경우가 이럴 때는 참으로 좋지 않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차가 공장 앞에 멎으니 경비 아저씨가 쫓아와 문을 열었다. 나는 다시 차를 움직이기도 귀찮아 모두 내리도록 했다. 이때 명희가 이층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완전 준비를 갖추어 뛰어내려 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오늘은 게으름 좀 피워, 방금 준비를 마쳤어요."
"안녕하세요? 언니들!"
내가 수정을 소개하기도 전에 먼저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는 명희였다.
"잘 지냈어?"
"네, 언니!"
미정이 답례 쪽으로 명희의 안부를 물었고, 수정은 미안한 표정으로 웬일인지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답례를 해야지. 명희라고 나이는 가장 막내지."
"고마워요."
나의 말에 수정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언니도 별 소릴 다하네요. 우린 이제 한 식구잖아요. 식구들끼리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이 필요할까요?"
"고마워요."
녹음기를 튼 듯 명희의 말에도 그 말만 되풀이하며 어느덧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수정이었다. 내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명희에게 물었다.
"혹시 사무실에 봉투 좀 없을까?"
"당연히 있겠죠. 그런데 문이 잠겨서......"
"경비 아저씨 보고, 문 좀 따라고 해."
저만치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경비에게 명희가 곧 다가가 말을 전했다.
경비가 뛰다시피 해 얼른 사무실 문을 땄다. 명희가 곧 책상서랍을 뒤지나 모두 잠겨있어, 캐비넷을 열더니 그곳에 흰 봉투 한 묶음을 꺼냈다. 나는 봉투 2장을 빼내 각각 5만원씩 담았다.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이거 경비아저씨 드리고, 한 사람 건 전해드리라고 해."
"경비아저씨들은 별도로 더 드리는 거예요?"
내가 봉투를 명희에게 내밀었으므로 명희가 내게 물었다.
"그래, 명절에도 제대로 차례도 못 지내고 쉬지도 못하잖아. 작지만 나의 성의라고 전하고."
"아저씨가 굉장히 고마워하겠네요. 돈을 꼭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생각해주는 사장님의 성의가 놀라운 것이죠."
"그렇다고 네가 미리 감격할 필요는 없잖니?"
"호호호.......!"
나의 말에 약간 이상해지려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명희가 봉투를 들고 경비에게 간 사이에 나는 봉투 다섯 개를 꺼냈다. 그리고 각각 30만원 봉투 3개와, 10만원 봉투 1개, 끝으로 50만원 봉투 1개를 더 만들었다. 나는 그 중에서 30만원 봉투 2개를 집어 각각 미정과 수정에게 주었다. 이때 명희가 들어왔으므로 그녀에게 건네주는데, 그녀의 말이 먼저였다.
"사장님한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네요. 그 말을 백번도 더 할 것 같아, 내가 얼른 뛰어왔어요. 이건 뭐예요?"
영문을 모르는 명희가 얼결에 봉투를 받고 물었다.
"응, 시어니 드리라고. 30만원이야. 다 똑같아."
"역시 우리 오빠야! 나도 미안해서 내 용돈에서 좀 드릴까까지 생각을 했는데. 돈 굳었네. 고마워요. 여보!"
쪽!
두 언니들이 있으니 지기 싫은지 '오빠'소리보다 '여보'라 지칭하는 명희였다. 우리가 문을 열고 나오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비아저씨가 얼른 모자를 벗더니,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명절 잘 쉬는 건 물론, 사장님의 배려에 감격했습니다."
"우와! 오늘따라 우 씨 아저씨 무척 말 잘하시네. 평소에도 그렇게 말 좀 잘 해봐요."
명희의 말에 무안한 얼굴로 씨익 미소만 짓는 우 씨라는 경비아저씨였다.
"적어서 안 됐습니다만, 명절 잘 쉬세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사모님들하고 잘 다녀오십시오."
경비아저씨의 말에 발그레 홍조를 띠는 나의 세 여인이었다. 우리는 채 1시간이 안 걸려 고향동네에 도착했다. 우리 차가 동네 빈 공터에 멎자 얼음을 지치던 아이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곧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우와! 선녀들이다!"
"짜식아, 선녀가 뭐야. 미스코리아들이지."
"우와 저기 연속극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탤런트, 탤런트 자식아!"
"그러고 보니 명희 아줌마도 있네."
"너희들 차 만지마. 우리 오빠 차야."
막내의 목소리마저 들려 우리를 웃음 짓게 했다. 그 와중에 수정은 팬 관리 차원인지, 방긋 미소를 띠우고, 아이들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야, 빨리들 들어가자. 남부끄럽다!"
"흥, 알긴 아네요!"
명희에게 다정이를 빼앗긴 미정이 내 옆으로 다가와, 살짝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