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면 돌파-- >
그날 저녁.
나는 작심을 하고 들어왔다. 아예 일을 터트리는 길에 터트리기로 하고.
그렇다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사실 술 생각이 간절히 났다. 술 힘을 빌려 털어 놓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시지 않았다. 왠지 비겁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갑게 나를 맞는 미정이었다.
요사이는 밖까지 마중 나오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내가 한 자라도 공부를 더 하라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음."
가방을 받아드는 미정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내 마음속의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가 묻어났다보다.
"별 것 아니야. 저녁은?"
"다 됐을 걸요."
말과 함께 주방 쪽으로 향하는 미정이었다.
"아줌마, 저녁 다 됐어요?"
"네, 사모님!"
"어서 씻고 오세요. 바로 저녁 먹죠, 뭐."
"알았어."
나는 곧 대충 씻고 식탁에 마주앉았다. 설거지까지 끝낸 아주머니가 다정을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서 잠깐 TV를 보고 있던 내가 미정이 공부를 하고 있는 안방으로 갔다.
"공부는 잘 돼?"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예비고사 점수가 잘 나와서 아주 고무되었거든요."
"잘 하고 있어. 그런데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뭔지 말씀하세요."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미정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있어."
"뭐죠?"
비로소 심각한 이야기임을 직감하고 책을 치우는 미정이었다.
"사실은........"
이 대목에서 입이 안 떨어져 잠시 망설이게 된 나였다. 나의 이런 행동에 점점 얼굴이 굳어지는 미정이었다.
"뭐든지 말씀해보세요. 제가 알아야 대처를 할 것 아네요?"
직감적으로 무엇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벌써부터 냉랭했다.
"사실은 여자 하나가 더 생겼어. 황수정이라고, 딱 한 번의 관계에 아들이 생겨서 낳아버렸어. 이게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아니면, 뭐가 용서를 구할 일이겠어."
나의 말에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더니, 이내 안색이 서릿발 같이 변하기 시작하는 미정이었다.
"제가 처음 당신하고 만날 때부터 그랬죠. 둘까지는 되고,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이제 어쩔 거예요? 그 여자와 아이는?"
"그 여자도 사정이 딱해 버릴 수는 없어. 아이는 당연히 당신과 나의 호적에 올려야지."
"흥! 낳지도 않은 아들이 하나 생겨서 좋긴 좋네요. 어머니, 아버지, 심지어 할머니까지 엄청 좋아하시겠어요? 흥!"
콧방귀를 뀌고는 순간적으로 돌아앉는 미정이었다.
"여보, 당신이 이해를 해."
"그게 이해하고 자시고 할 일이에요? 제 가슴이 얼마나 무너져 내리는지는 상상이나 해보셨어요? 당신에 대한 실망감은 또 어떻고요.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뭐 이것이 다 당신 것이니까. 저는 빈 몸만 나가면 되겠네요. 단 다정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어요."
"여보!"
"시끄러워요!"
말과 함께 발딱 일어나 쿵쾅거리고 2층으로 향하는 미정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내가 그래도 미정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인 제공자가 나고, 분명 잘못 한 것은 나니까, 한 번 더 용서를 구하고 설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벌써 다정이를 안고 2층에서 내려오는 미정이었다.
"여보, 그러지 말고 화 풀어."
"이게 화 풀고 자시고 할 일이예요. 나는 당신한테 정말 실망 했어요."
그러더니 안방으로 대충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는 미정이었다.
"여보, 용서해줘.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흥, 됐네요."
싸늘하게 말하고는 다정이를 들쳐 업는 미정이었다. 이어 대충 싼 보따리를 들고 거침없이 방을 나서는 미정이었다. 들고 거침없이 방을 나서는 미정이었다.
"여보!"
"그렇게 부르지도 말아요. 순 바람둥이 같으니........."
내가 미정을 따라 나가며 사정을 했다.
"그러지 말고........."
"흥, 됐어요.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더군다나 이 시간에 어딜 간다고........."
"아직 초저녁 이예요. 지금 가도 터미널에 가면 차가 쐤네요. 그리고 가면 제가 어딜 가겠어요. 친정으로 가죠. 이제 집도 절도 없는 년이........"
그러고 쌩하고 현관문을 열고 사라지는 미정이었다.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이제 내가 한 잘못은 생각 못하고, 짐을 꾸려 나가는 미정만 괘씸하게 생각되는 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미정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기는커녕 전화 한 통화 없었다. 그렇게 오늘이 닷새 째였다. 나도 화가 나서 그동안 처갓집에도 일체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었다. 수정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궁금한지 수정이 몇 번 회사로 전화가 왔을 뿐이었다. 내가 냉전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녀도 염치가 없는지 놀러오라 소리도 못했다. 그러길 오늘이 닷새 째 퇴근 무렵이었다.
제 풀에 꺾여 제가 돌아오겠거니 했다가, 오일씩이나 되자 슬슬 미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보고 싶기도 했고, 잠자리도 그리워졌다. 이제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심란한 게 술 생각만 간절했다. 맨 정신에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하겠고, 술이나 한 잔 먹고 처갓집에 전화나 한 통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라도 한 통화하면 상대편이 명분이 생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술집을 생각했다. 그러자 몇 번 갔던 가까운 횟집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길로 처를 몰고 그 횟집으로 향했다. 차를 받쳐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예의 그 여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오늘은 혼자신가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아나고 회 2인 분하고, 소주 세 병만 주세요."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진 양아! 여기 사장님, 7번방으로 모셔."
'또 7번방이야?'
수정과 왔을 때도 7번방에 든 적이 있어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7이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절 따라오세요. 사장님!"
"그럽시다.
"오늘은 어째 혼자시네요. 그 미인은 어디 두고?"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먼저 방으로 들자, 그녀는 내 신발을 똑바로 정렬해놓고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이미 카운터에 얘기해 놨으니, 가보시면 알 겁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나는 그녀가 홀로 가자 혼자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래봐야 무채색의 벽지뿐이지 뭐가 있겠는가. 그러고 있자니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우선 밑반찬과 함께 소주 세 병을 들고 진 양이라는 미시즈가 들어왔다.
"회는 지금 준비 중이예요."
"알겠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술병을 따서 스스로 잔에다 부었다.
"제가 한 잔 따라 드릴 걸."
"됐습니다. 일 보세요."
"네."
진 양이 밖으로 나갔다. 준비물 중에는 소주잔만이 아니라 음료수잔 용으로 글라스도 있었다. 나는 따라 놓은 소주마저 그라스에 쏟았다. 그리고 소주병을 들어 글라스에 8/10 쯤 되도록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꿀꺽꿀꺽 잔을 비워버렸다. 안주로는 대하 삶은 것과 계란찜, 깍지 째 삶은 콩, 멍게 조금, 여타 몇 가지가 더 보였다. 나는 그 중에서 계란찜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소주병을 기울였다. 잔을 다 채우니 소주 한 병이 금방 빈 병이 되었다. 이렇게 물마시듯 세 병을 비우고 나니 정신이 알딸딸한게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저녁도 안 먹은 상태에다, 급히 글라스로 6잔을 비웠더니, 빠른 속도로 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량이 세니 이 정도이니 술 약한 사람은 큰일 날 짓이었다. 나는 더 마셔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진 양이 회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왜 벌써 일어서셨어요?"
"가야 되겠습니다."
"회는 요."
"내가 시킨 것이니 계산은 하고 갈게요. 그렇지만 먹지는 않을 것이니, 도로 가져가세요."
"저희들도 입장 참 난처하시게......."
"계산한다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그렇잖아도 기분이 엿 같은데 진 양이 망설이고 서 있자. 내 목소리의 톤이 조금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 말에 흠칫한 진양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바로 카운터 쪽으로 사라졌다. 주인에게 그대로 보고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앉아서 손가락을 주걱 칼 삼아 구두를 신고 카운터로 향했다. 나의 등장에 보고를 받았을 것임에도 여주인이 깜짝 놀라는 시늉으로 말했다.
"아니 벌써 일어나셨어요?"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내가 시킨 것은 다 계산할 테니 얼맙니까? 그 전에 전화 한 통 쓰겠습니다."
"네, 쓰세요."
주인의 허락 하에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처갓집 전화번호를 알 턱이 없었다. 거의 안하다보니 그랬다. 나는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한 번 본 후,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신호가 가더니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나는 장인의 목소리인지 알았다.
"접니다. 장인어른. 강 서방!"
"아, 그래! 이 시간에 웬 일인가?"
"저... 다정이 엄마 거기 없습니까?"
"엉? 아직 도착 안 했어? 지금쯤은 시간상으로 봐도 도착했어야 되는데?"
"아! 제가 아직 집에 안 들어갔거든요."
"그래? 집에 빨리 가봐. 아마 도착해 있을 거야. 자네 장모하고 함께 올라갔어."
"아, 네~!"
"자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요. 그런 일 없었습니다. 친정에 간 사람이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직감적으로 눈치를 채고 거짓말을 했다.
"하하하........! 이제 오일 째인데 뭘 그렇게 안달을 하나. 하긴 젊어서는 단 며칠만 안 봐도 보고 싶긴 하지. 정말 별일 없는 거지?"
"네, 장인어른."
"나는 두 여자의 눈치가 좀 이상해서, 뭔 일이 있나 싶어서. 여자들이 뭐, 통 나한테는 얘기를 하나 뭐. 그러고 내 올부터는 직장 그만 두었네. 자네가 주는 용돈만으로도 충분하겠어. 사위 정말 고맙네."
"적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돈을 더 많이 벌면,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 나는 이 정도로만이라도 만족해. 오늘 괜히 쓸데없이 내 말이 길 군. 자네도 어서 전화 끊고 빨리 집으로 가 보게."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그래. 그럼, 들어가시게."
나는 찰칵 소리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도 예절이 있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도 먼저 끊는 것은 실례였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안도의 한숨이었다. 나는 곧 계산을 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주인 여자는 소주 세 병 값만 받으려 했고, 나는 회 값까지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주인여자가 승리했다. 나는 소주 세 병 값만 주고 횟집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쏘여도 술이 확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까 전화 걸 때는 좀 깨는 것 같더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아무래도 운전은 불가하다는 생각에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집을 쳐다보니 그동안 이 시간이면 깜깜하던 집안이 1,2층 모두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1층은 안방은 물론 거실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내가 벨을 누르자 가정부아주머니가 문을 따주었다.
"이제 들어오세요, 사장님!"
"네!"
"왔어요, 왔어. 사모님 하고, 장모님도 함께 오셨어요."
그녀라고 왜 우리가 싸워 이렇게 된 줄 모르겠는가. 미정이 돌아왔다고 내일처럼 기뻐하며 좋아하는 가정부아주머니였다.
"들어가시죠."
나는 번지는 미소를 참고 가급적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네, 사장님!"
"이제야 오는가?"
내가 미처 현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장모님이 현관에 서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 늦었습니다. 장모님!"
"회사에서 바로 퇴근하고 오는 길인가?"
"직원들하고 간단하게 소주 한 잔 하고 오는 길입니다."
"저녁은?"
"아직 안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옆에 서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정부아주머니가 물었다.
"사장님, 저녁상 차릴 까요?"
"술을 먹었더니 밥 생각이 별로 없군요. 국수 있습니까?"
"네, 사장님!"
"그럼, 국수나 삶아주세요. 소면으로,"
"네, 사장님!"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거실에 서 있었다.
"다정이 엄마는 요?"
"안방에 있네.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무심한가?"
"네?"
"아무리 다퉜다고 해도 그렇지 전화 한 통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방금 전화 했더니 장인어른이 받으시던 데요?"
"그래? 잘했군, 잘 했어."
그러고 내가 말이 없자, 장모님이 또 말을 꺼내셨다.
"처음에 물으니 모처럼 친정에 놀러왔다는 거야. 나는 그러려니 했지.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 돌아갈 낌새를 안 보이는 게야. 그래서 내가 직감적으로 느꼈지. 집안에 뭔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그때부터 딸년을 다그쳤지. 몇 번을 다그쳐서야, 울면서 사정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 이제 자네는 어찌할 셈인가? 다정이 엄마와 살 생각인가? 말 생각인가?"
"당연히 살아야죠."
"그렇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환한 미소로 묻는 장모님이셨다.
"나도 중간에 많은 설득을 했네. 그렇다고 헤어지면 몇 사람이나 백년해로를 하겠어. 물론 또 여자를 본 것은 사위가 잘못이지. 그렇지만 이만한 인물에 재력 겸비한 사위가 하나 더 얻었기로 서니, 미정이처럼 날뛰는 것도 나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앞으로라도 서로 예전처럼 서로 위해주며, 잘 살아."
"물론이죠. 더 아끼고 사랑할 겁니다."
"누가 뭐래도 역시 우리 사위야! 주책이지만 이 장모가 한 번 안아 볼까?"
"참, 장모님도. 그러시죠, 뭐!"
"호호호.........! 막상 그렇게 나오니 남사스러워서 못 하겠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