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턴 황수정-- >
이튿날 나는 바로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미정에게는 전화 한 통화하지 않았다. 미안해서 도저히 걸 수 없었다. 미정을 생각하니 또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조회를 마치고 나니 미정에게서 내 집무실 직통 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 학원가요.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음."
"오늘은 내 손수 맛있는 반찬 해놓고 기다릴 게요. 사랑해요. 여보! 쪽!"
"알았어."
"끊어요."
"조심해 다녀와."
"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미정이 어제 안 들어왔느냐고 추궁이라도 하고 그러면 홧김에 뭘 어찌 해보기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더욱 난감해졌다. 어찌 됐든 일을 수습하기는
해야겠는데 골치가 아팠다. 아파트에서 수정은 수정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와 수정은 오늘 서로 약속하기를 가구며 필요한 생활용품 일체를 사기로 했다. 작게 한 숨을 쉰 나는 곧 관리과 사무실로 나가 채 과장을 찾았다.
"채 과장님!"
"네, 사장님!"
"오늘 바쁘십니까?"
"아니, 크게 바쁜 것은 없습니다."
"그럼, 나 좀 도와주시죠."
"알겠습니다. 사장님! 뭐든 분부만 하시죠."
"나랑 어디 좀 같이 갑시다."
"네, 사장님!"
그 길로 나는 채 과장을 데리고 수정이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로 갔다. 그런데 내가 아닌 채 과장의 차로 갔다. 이제 그도 면허를 따서 능숙하게는 아니지만 제법 운전을 잘 했다. 딩동, 딩동! 벨을 누르니 준비를 마친 수정이 아기를 안고 바로 튀어나왔다.
"다알링 왔어요?"
나를 부르는 호칭도 다른 여인과 달리 수십 가지다. 나 혼자 인 줄 알고 무심코 말을 하고 나왔다가 채 과장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수정이었다. 놀라기는 채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아는 유명인물인 데다가 그 사람이 자신의 사장을 보고 '다알링' 어쩌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역시 적응이 빠른 황수정이었다. 언제 놀랐냐는 듯 바로 초면의 채 과장에게도 먼저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는 수정이었다. 이에 반해 남자인 채 과장이 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준비는 다 된 거야?"
"네."
다른 사람이 있자, 평소와 달리 조신하게 변하는 황수정이었다.
"아기 이리 줘봐."
"네."
아기를 나에게 넘기고 자신의 옷태를 점검하는 수정이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참으로 잘 어울렸다. 겨울이라 포근하다 해도 추워서 남들은 잘 입지 않는 꽉 끼는 청바지를 입었는데, 처녀 때보다 확연히 몸매가 더 굴곡지고 예뻐져 있었다. 아기를 낳아 골반이 벌어져 히프는 더 커지고, 수유를 위해 젖은 더 커졌는데, 허리는 그대로 이니 확연히 몸매가 더 살아났다. 상의 또한 타이트한 실크 블라우스를 걸치고 있어서 그 느낌이 더 잘 전달되었다.
그 때 내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를 광고에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를 내색 않고 오히려 책망하는 말을 했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감기 걸리려고."
"외투는 준비했잖아요."
팔에 걸쳐진 외투를 들어 보이며 말하는 수정이었다.
"목록은 작성했어?"
"하느라고 했는데, 빠진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확인해 보세요."
'당신' 소리에 다시 한 번 나와 수정을 은근히 번갈아 살피는 채 과장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목록을 받아 읽어보았다.
어제 맨바닥에서 뒹구느라고 고생을 해서인지 이불, 요, 베개, 침대 등 침구류가 제일 먼저 올라와 있었다. 이를 보고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또한 행위도중 건넨 농담도 생각이 났다.
'아이고, 맨 바닥에서 하려니 되게 베기네요.'
'오 마이 갓, 내 실수!'
'알긴 아네요.'
'콩을 깔아 놓고 해야 되는 건데.'
'뭐예요?'
'더 박여서 몸부림을 칠 것 아니야. 그럼 나는 황홀감의 극치를 맛 볼 테고.'
'정말 못 됐어!'
행위도중 곱게 눈을 흘기던 수정의 곱던 표정까지 생각하니, 나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왜 웃어요. 여보?"
"응. 침구류가 제일 먼저 올라와 있어서."
"쳇.......!"
나의 말에 황수정답지 않게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다.
"갑시다."
"네, 사장님!"
"여보, 나 어때요?"
선글라스를 쓰고 마스크까지 하니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그녀였다.
"굿."
나의 말에 이제는 외투까지 걸쳐 아름다운 몸매마저 숨기는 수정이었다.
"가요. 여보!"
채 과장이 보거나 말거나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어 오는 그녀였다.
"험, 험........!"
나는 빠르게 걸어 채 과장이 열어주는 차 뒷좌석에 탔다. 수정이 바로 내 옆에 탔다.
우리 셋을 태운 차는 곧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기까지 넷인가?
"채 과장님!"
"네, 사장님!"
"광고 분야에 잘 아는 사람 있습니까? 텔레비전 쪽으로."
"음........! 글쎄요.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요."
"임권택 감독은 어떨까요?"
"TV광고 내시게요?"
"네."
"그 분이야 원래 유명한 영화감독이시니 괜찮겠네요."
"그럼, 모델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
나는 말과 함께 수정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보, 나 모델 시키게요?"
"생각 중이야."
"개런티는........ 요?"
반말로 물으려다 채 과장의 눈치를 보고는 끝에 간신히 '요'자를 붙이는 수정이었다. 전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던 황수정에서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 나는 내심 기꺼웠다.
"내가 살아주는 게 개런티지, 뭘 더 바래?"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나를 쓰려면 분명 주셔야 돼요."
"전에는 연예계에 진출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여보!"
"왜!"
"내가 당신한테 딱 하나 거짓말 한 게 있는데........."
그 말에 내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지금의 내 아들이, 진짜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할까보아서였다. 태연한척 내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빠가 나 보고 연예계 진출하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그녀의 아빠가 연예계에 진출하라고 했으나, 자신이 싫어서 안 한다는 말을 언젠가는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치고 딸을 화류계로 진출시키려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당시 아빠가 맹렬히 반대하셔서 내가 꿈을 접었던 거예요."
당시의 세태는 영화배우든 탤런트고 가수고 간에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화류계 사람으로 보고, 부모들은 아주 탐탁히 생각지 않았다. 특히 여자들 부모가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아빠 말을 쫓았다가 별로 좋은 끝을 못 봤잖아요. 아빠의 딸로서는 이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봐요. 이제는 제 꿈을 쫒아 살고 싶어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글쎄.......?"
나는 뭐라고 꼭 짚어 말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랬다.
"자기 마음대로 해."
"역시 당신은 나랑 뭐가 통하는 사람 이예요. 나 작품 들어오면 할 거예요."
"학교생활에 지장이 없겠어?"
"병행할 거예요."
"흐흠........!"
수정이 본격적으로 나서자 아까와는 달리 뭔가 께름칙한 마음이 드는 것은 뭐지? 온실 속의 화초로 나만 감상을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기분이랄까. 묘한 마음이 드는 것이 솔직한 내 속내였다. 이것이 내 본심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싫은 것도 아닌 묘한 심리상태였다.
"오늘 일 끝나고 임권택 감독과 한 번 접촉을 해봐요. TV 광고 하나 찍을 수 없느냐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참, 어디로 가는 거지요? 사장님!"
"빨리도 묻네요. 제사 다 지내놓고 누구 제사냐고 묻는 것과 뭐가 달라요."
"하하하.......!"
"호호호.......!"
"당신이 그 목록을 채 과장님에게 주세요."
"그럴까? 그런데 우리 채 과장이 과장인 것은 어떻게 알았어? 성 씨 하고."
"내가 바보예요? 당신이 계속해서 그렇게 불렀잖아요."
"그러고 보니 둘이 초면 아니야?"
"그럴 때는 당신도 똑 같네요. 이제 와서 통성명하라는 거예요?"
"응. 아시다시피 황수정 양 이예요. 내 내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금 운전대를 잡은 양반은 우리 회사 관리과 채 선장 과장. 됐어?"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제가 할 소리입니다. 사모님!"
"채 과장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어디 가서 함부로 떠벌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마구 떠들고 다녔으면 좋겠네."
"뭐라고?"
"그래야 어디 가서 당신이 더 이상 한 눈 팔지 않고 다닐 거 아니 에요. 참 두 사람은 잘 있어요."
"음........!"
내가 묵직하게 한 마디하고 입을 닫자 분위기를 눈치 채고 더 이상 말을 삼가는 수정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쇼핑은 그 날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가정을 꾸리는데 이렇게 많은 살림살이들이 필요할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물론 간단하게 살면 적을 수도 있지만, 제대로 갖춰놓고 살려니 많은 시간을 할애해 구매를 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이 과장에서도 사업적 아이템을 하나 건지기도 했다. 전자제품 코너에서 TV, 냉장고, 세탁기 등을 사는데 그 품목에 수정은 밥솥도 끼워 넣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전생에서 한국의 전기밥솥이 세계 재패를 하는 데 일등공신이 된 압력 전기밥솥을 떠올리고, 이를 빠른 시일 내에 개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일반 가스 등을 연료로 사용하는 압력밥솥도 개발할 것이다. 원리는 같으니까.
아무튼 나는 이 모든 짐들이 아파트에 계속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이 아파트를 떠났다. 수정이 서운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녀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내가 잠시 사무실을 들려 퇴근하니 미정은 자신의 말대로 이미 저녁을 지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 그녀는 물론 가정부아주머니 다정이까지 같이 식사를 하며, 일부러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렇게 되자 내가 어려워 말을 못 붙이는 식구들이었다. 식사를 끝낸 나는 피곤하다는 구실로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미정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우리 회사에서 발매되는 카세트테이프 광고 때문에 어제 황수정을 만났어."
"황수정이 누구죠?"
"샴푸 선전하는 그 아가씨 몰라?"
"아, 그 황수정. 왜요? 그 사람을 기용하게요."
"응. 우리 동네 사람이잖아. 약간의 개런티만 받고 해주기로 했어. 아직은 우리 회사가 어렵잖아. 이를 설득하느라고 너무 늦어서 그냥 사무실에서 잤어."
"알았어요. 누가 뭐래요?"
미정과 수정은 서로를 잘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미리 황수정의 연관성을 끌어들여, 나중에 그녀가 받은 충격을 가급적이면 완화시키기 위해 지금, 변명 겸 사전공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은 무사히 넘겼지만 앞으로 미정과 명희를 어떻게 설득할지 난감한 나였다. 나는 자는 척 했지만 이를 해결할 묘안을 강구하느라 계속 뒤척였다. 그러나 당장은뾰족한 수를 발견해 낼 수 없었다. 언젠가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세월에 맡기기로 하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너무 골치가 아픈 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