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41화 (141/322)

< --리턴 황수정-- >

세월은 흘러 어느덧 12월 중순에서도 끝 무렵이 되었다. 학기말 고사도 끝나고 거리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로 흥정거리고 있는데, 나는 오늘도 사업에 분주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약간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처음 워크맨이 출시되고 나서 나는 세계 최초의 제품에다가 일본의 소니도 빅 히트를 친 제품이라 기대를 잔뜩 걸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의 기존 제품에 비해 너무 파격적이다 라는 혹평과 같이, 발매 첫 달에는 국내외 시장 합하여 겨우 5천 대를 팔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서서히 인지도가 생기는지 월 3만대는 나가고 있는 요즈음이었다. 그러나 내 기대치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이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퇴근한 저녁 무렵. 나 혼자 나는 내 집무실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이의 대책에 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빈 사무실의 저쪽 전화가 끊임없이 울어댔다. 받을까말까 망설이다가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이제는 내 집무실 전

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받았다.

"나야!"

여자의 음성이었다.

"나가 누구야?"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젊은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잘 한다, 잘해. 이제는 아주 잊었다보네. 정말 내 목소리도 이젠 기억을 못하는 거야?"

오래 그 목소리를 듣다보니 나는 금방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황수정이었다.

"웬일이야?"

심드렁하게 내가 받았다.

"흥! 사내새끼들이란, 벌려줄 때나 좋아하지, 한결같이........."

짜증이 나서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뭔 말이 그래?"

"야! 강 대정! 달장 달려와, 네 새끼 가져가!"

"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심정으로 깜짝 놀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귀 처먹었어? 너 때문에 나 신세 조졌으니, 네 새끼나 얼른 데리고 가란 말이야."

뭔가 사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너, 거기 어디야?"

"흥, 여기. 무교빌딩 지하 이화정이라는 룸싸롱이다. 왜?"

"룸 싸롱?"

"요새 술도 잘 안 마시러 다니는가 보지? 요새 요정보다는 룸싸롱이 대세인 거 몰라?"

"아직은 아닐 걸."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바로 택시타고 와. 아니면 네 새끼 길거리에 내다버릴 테니."

말을 해도

'뭐, 이런 년이 다 있나!'

싶어 내가 버버거리고 있는데, 찰칵하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차를 끌고 가려다 솔직히 그곳은 아직 지리도 잘 몰라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고 거리로 나섰다. 이제 우리 회사 앞까지 4차선 도로가 뚫려 이곳은 시내버스도 다니고 그랬다. 그러니 가끔 빈 택시도 보이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전혀 안 보였다. 내가 초조한 마음에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데, 저쪽에서 빈 택시 하나가 라이트를 켜고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지만 나는 급한 마음에 손까지 흔들며 연신

'택시!'

를 부르고 있었었다. 나를 발견했는지 더욱 속도를 내어 달려온 택시가 끽하고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길거리에다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급히 택시에 올랐다.

"무교동 갑시다. 혹시 무교빌딩 아십니까?"

"아, 무교빌딩 요. 7층짜리 건물이 거기 하나 있긴 있는데, 아마 그게 무교빌딩 맞을 겁니다. 그 앞까지 모셔다 드릴 까요?"

"네. 서둘러 갑시다."

"알겠습니다. 손님!"

그 다음부터 택시는 속력을 내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만대사관 반대편을 끼고 우회전한 택시가 채 20m도 못가 서서히 멎었다.

"손님 이곳입니다. 저기 보이네요. 무교빌딩이라고 씌어있지 않습니까?"

"고맙습니다. 잔돈은 됐습니다."

나는 아저씨의 친절에 1,000원짜리 한 장을 내고 그냥 내렸다. 하긴 거리가 있어서 몇 푼 남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에 부딪칠 것 같아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수억이 왔다 갔다 해도 전혀 긴장을 안 하는 내가, 오늘따라 긴장을 하는 내 꼴이 우스웠지만, 긴장이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화정(梨花亭)'이라는 네온 간판을 확인하고는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몇 모금 빨고는 신경질적으로 발로 비벼 껐다. 그리고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안으로 발을 떼어놨다.

나는 한 계단 한 계단 느리게 지하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에칭유리(문에 그림이 그려진 유리)를 보고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결코 밝지 않은 은은한 조명 속에 곧 카운터가 보였다. 그곳에는 수놈만 둘이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급히 90도 꺾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몇 분이십니까?"

"나 혼자요. 그러나저러나 여기 황수정이라는 여자 혹시 없소?"

이때 룸 하나의 문이 벌컥 열리며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들어와!"

황수정의 목소리였다.

나는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은은한 조명 속에 두 여인이 앉아 있다가 한 여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품에는 포대기 싸인 아기 하나가 안겨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결코 황수정이 아니었다. 황수정은 내게 등을 돌리고 비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서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는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인사를 받고 말없이 간단하게 목례만 하고, 황수정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그녀의 앞에는 양주병과 글라스 그리고 빨간 메니큐어를 칠한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다. 글라스에 담긴 담황색 양주를 거침없이 한 잔을 들이킨 그녀가, 안주 대신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가 내 앞으로 훅 쏘아 냈다. 그리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왔어?"

아까는 빨리 안 오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설치더니 의외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그녀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녀의 담배 연기에 이맛살을 찌푸릴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담배 피울지도 모르는 게 피우더니, 꼴좋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말이었다. 한참 만에 진정을 한 황수정이 내게 대뜸 물었다.

"너, A형이지?"

"그래!"

"네 새끼 데리고, 빨리 꺼져!"

또 다시 화를 벌컥 내는 황수정이었다.

"뭔 말이야. 차근차근 얘기를 해야 사람이 알아듣지. 무조건 화만 낸다고 될 일이냐?"

"그 새끼와 나 둘 다 O형이다. 그런데 A형이 태어났으니, 네 새끼 아니면 누구 새끼냐? 그러고 그 새끼와 내가 관계한지는 9개월 밖에 안 됐어. 그러니까 그 새끼 입장에서는 9개월 만에 아새끼 하나가 태어난 셈이지."

"칠삭동이도 있고, 팔삭동이도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 머릿속에는 DNA검사라는 말이 무수히 맴돌고 있었다.

"누가 그걸 몰라? 9개월 만에 아새끼가 태어나니, 그 미친 새끼가 의심을 하고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린 살을 찔러 피를 뽑았다는 것 아니냐. 그 미친 의심병 환자가. 그러고 네가 그 새끼 사무실에서 나와 마주친 이래로는 너와 나의 관계를 줄곧 의심하곤,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캐물었지. 끝까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종당에는 결혼식 한 번 못 올려보고 쫓겨났지만 말이다. 됐냐?"

"허허, 그것 참!"

"웃음이 나와?"

"너무 화내지 말고,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너 말 한 번 잘했다. 이 언니 밑에서 마담 생활하기로 했다. 왜? 그것도 새끼마담. 됐냐?"

"너,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야, 황수정! 함부로 말하지 마라! 누가 그걸 허락했는데?"

"뭐? 내가 지금 누구 허락 맡고 일하고 말고 할 군번이냐?"

"까불지 말고. 얘 들쳐 업고 따라와."

"무슨.........?"

"닥쳐! 이리 와!"

나는 무작정 황수정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여인 앞에 가서는 말했다.

"아기 이리 주세요."

"네, 여기요."

냉큼 내게 아기를 건네는 미모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참 너도 인물 값 하는 모양이다!'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나는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한 손으로는 황수정을 잡아끌었다. 비척비척 끌려오던 황수정이 기어코 넘어졌다. 나는 멈춰 섰다.

"으웩!"

갑자기 토하려하고 있었다.

"가지, 가지, 한다. 술도 별로 못하는 게 뭔 술은 그럴게 많이 마셨어?"

그러나 황수정은 올라오는 것을 참느라고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꾹꾹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네 발로 따라 와라!"

황수정이 간신히 넘기는 것을 억제하고 일어서자 내가 말했다.

"너, 이새꺄! 어디로 가는데?"

"네 집!"

"뭐? 내 집이 어디 있어? 그 새끼한테는 쫓겨나고, 집에서도 이 사실을 다 알아 오고갈 데도 없는 나인데."

"있어. 압구정동에 네 앞으로 된 집 아파트 한 채가."

"뭐?"

어이가 없는지 또 버럭 소리만 지르는 황수정이었다.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따라 와."

그러나 황수정은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서 말했다.

"확실히 알고나 가자."

"네 아파트라잖아."

"그게 어디서 난 건데?"

"원래는 내 아파튼데, 오늘부터 네가 거기서 살아. 네 명의로 해달라면 당장 내일이라고 해줄 테니까?"

"너 이렇게 될 줄 알았냐?"

"알긴, 내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냐? 내가 외국 연구원 하나 살라고 얻어준 아파트인데, 일반 주택이 좋다고 해서, 그거 한 채 얻어주고 지금까지 비어있던 집이다. 됐냐?"

"침대고 뭐고 가구도 하나도 없겠네."

"내일이라도 당장 들이면 되지. 오늘 하루만 어떻게 거기서 자. 정 불편하면 오늘 하루만 여관에서 자든지."

"알았다. 그 대신 너, 내 몸에 손대면 안 된다?"

"왜?"

"너는 이새꺄! 남 거쳐 간 보지가 그렇게 좋냐?"

여자가 말을 해도 하도 거칠게 하니까, 나는 입이 떡 벌어져 말을 못 하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내가 빙긋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도 좋다면?"

"미친 놈!"

한마디 툭 내쏘고는 제가 먼저 앞장을 서서 걸어가는 황수정이었다.

"어딜 가? 같이 가야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황수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폼만 요란했지 술은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던 황수정이 갑자기 우뚝 멎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기 나 줘라. 내가 안고 가게."

"안 돼. 너는 술 취해서."

"나 얼마 안 마셨단 말이야. 빈속에 딱 두잔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채긴 조금 챈다."

"내가 안고 갈 테니,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이제는 내가 앞장을 서고 수정이 다소곳이 나를 따라왔다.

드디어 지하 계단을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왔다. 나는 마침 지나가는 빈 택시가 있어 택시를 세웠다.

"타!"

말없이 먼저 조수석에 타는 황수정이었다.

나는 찬바람이 들어갈까 봐 여민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고, 뒷좌석에 탔다.

"압구정동 현대 3차 갑시다."

"네, 손님!"

나는 택시 기사에게 방향을 일러주고, 앞좌석에 탄 수정에게 농담을 했다.

"너, 거기 타면 택시비 계산하는 것 알지?"

"내가 아무리 빈 몸으로 쫓겨났다지만, 나한테도 그 정도 돈은 있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자꾸 황수정을 흘끔거리는 것이었다.

'아차!'

나는 내심 자책하며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황수정에게 주며 말했다.

요즘 나도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어 하고 다니던 놈이었다.

"마스크 해라. 감기 기운 있는 놈이 그러지 말고."

"뭐?"

나의 눈짓에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은 그녀가 얼른 마스크를 받아 얼굴에 걸쳤다. 우리는 그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아파트 단지가 아닌 내 사무실 앞에서 차를 내렸다.

"잠시 들어와라."

"여기가 어디인데?"

"내 사무실과 공장."

"뭔 건물이 이렇게 많아?"

"건물뿐이 아니지. 주위 16만 평이 다 내 땅인데."

"정말?"

"그럼. 그 뿐이냐. 역삼동에도 100만 평의 땅과 전자공장도 있다."

"정말? 너 그러고 보니 갑부네."

"이제야 알았어?"

"내 진즉 알았으면, 그 새끼한테 안 가는 건데."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 너한테 기대 살아도 되는 거냐?"

딴에는 애교를 부린다고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대어 콧소리를 내는 황수정이었다.

"그럼, 미쳤다고 내가 너한테 아파트 한 채를 주냐?"

"아기 때문에 주는 것 아니고?"

"아기도 아기지만 너도 항상 그리웠다. 그 새끼랑 같이 있는 걸보고는 화가 나서 며칠 잠도 못 잤다."

나는 수정이 듣기 좋으라고 조금 과장을 했다. 그렇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한 수정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멎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알다가도 모를 여인의 감정에 잠시 지켜보다가 사무실로 들어가 아파트 키를 가지고 나왔다. 그새 수정은 어느새 울음이 그쳐 있었다. 그리고 명랑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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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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