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대정(大正)-- >
내가 유리공장 견적을 내고 있는데 최 상철이 청주에서 올라왔다.
내 생각보다 늦게 올라왔기에 호통을 쳤더니, 흩어져 있던 부하들 모아서 올라오느라고 늦었다고 변명을 했다. 이에 나는 차를 같이 한 잔 나눠 마시며, 아마 그 범인이 금강유리에 입사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유리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곳에 가서 사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그곳에서 그들 팀과 협조를 하던, 단독 플레이를 하던 간에 꼭 그 과장 놈을 잡아오라고 하고, 최상 철을 그곳으로 보냈다. 어찌됐든 철 구조물 사업까지 손을 대고 보니, 이 또한 사람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기존 인원은 인원들대로 바빠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있는데, 여기서 차출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또 광고를 내어 철 구조물 경력자 15명에 신입 15명을 뽑아, 철 구조물 파트를 별개로 하나 더 꾸렸다.
나는 선발 과정에서 경력자는 방화문 시공이나 난간 시공 경험이 있는 자들을 우선 대상자로 삼아 뽑았다. 일이 없을 때는 철물 일에 투입하기 위한 대비였다. 아무튼 나는 이들에게 곧바로 장비를 갖추어주고, 여주 유리공장 건설 현
장으로 투입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이번에는 대우개발의 홍성부 이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지난번에 이야기한 바 있던 교보빌딩의 견적을 내라고 했다. 나는 이 또한 도면을 가져다가 견적을 내고 있는데, 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심신이 지쳐 가고 있는데, 미정은 미정대로 나를 졸랐다. 해수욕장으로 한 번 놀라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또 짜증나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였다. 건축자재를 잔뜩 싣고 쿠웨이트로 떠난 최우선 부장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 전화를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경리가 받아 조동호부장에게 연결시켜준 것이었다. 강풍으로 틀면 내던 견적서류가 다 날아가, 미풍으로 틀어놓고 간신히 더위를 참고 일을 하고 있는데, 조 부장이 비지땀을 흘리며 내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중동에서 문제가 발생했답니다."
"무슨 문제요?"
"체선(滯船)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답니다. 벌써 한 달째 싣고 간 물건 하역도 못 시키고 외항에 떠있는데, 무슨 묘안이 없을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참, 빨리도 전화 했네요. 그런 문제가 있으면 진즉, 진즉 전화를 할 것이지, 뭐 하다가 이제야 전화를 한답디까?"
"곧 해소되려니 하고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보기보다는 그 사람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네. 그래? 조 부장님은 대책이 있습니까?"
"저도 뾰족한 묘안이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사장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참 더운 날씨에 사람 더 덥게 하는 문제로군!"
투덜거리며 조 부장의 답답함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내가 말했다.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내 말에 일언반구 질문도 없이 숨죽여 내 말을 기다리는 조 부장이었다.
"선장실에 불을 지르라 하세요."
"네?"
'사장이 더위 먹었나?'
하는 표정은 아니더라도, 황당해하는 표정만은 확실했다. 너무 의외의 지시에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표정과는 아랑곳없이 내쏘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싣고 간 상품에 불을 지를 수는 없잖아요. 내 말은 실제로 크게 불을 질러 배를 다 태우라는 것이 아니라, 금방 끌 수 있을 정도의 불을 지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쓸데없이 크고 작건 간에 불은 왜 지릅니까?"
"하하하..........! 내 먼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그 말을 꺼낸다는 것이 마음이 급하다보니........ 아무튼 내 말 잘 들으세요. 쿠웨이트 항만법에 의하면, 항구에서 불이 난 선박은 제일 먼저 최우선적으로, 하역을 하게끔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이제야 사장님 말씀을 알아듣겠습니다. 쿠웨이트의 방화선이 달려와 바로 진압할 정도의 불을 질러, 바로 하역하게끔 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선장과 협의 없이 함부로 남의 배에 불을 지르다가는 큰 곤욕을 치를 테니, 사전에 모든 손해배상은 해준다고 양해를 구하고, 작업을 해야죠. 이것도 어떻게 이번 한 번만 써먹어야지, 상습적으로 써먹다가는 아예 외항에 정박도 못 할 수가 있으니, 다음 회 차에는 다른 묘안을 강구해보도록 하세요."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쿠웨이트 항만법까지 꿰뚫고 계십니까?"
'내 그 질문 나올 줄 알았다.'
내심 생각한 내가 답변을 궁구하기 위해 경리를 불러 냉수를 청했다.
그렇다고 내가 전생에서 경제소설을 몇 편 쓰다 보니 그때 알았노라고, 이실직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시 궁리를 하던 내가 답변을 했다.
"난 우리 배가 항구를 떠나기 전부터 다각도로 현지 사정에 대한 탐문과 공부를 했어요.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인데 내 바쁘다보니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은 내 불찰이지요. 하지만 무역을 하는 사람이 현지 사정도 전혀 모르고 무조건 몸으로 부딪친다는 생각은 무모함을 넘어 바보들이나 하는 짓 이예요. 조 부장님도 앞으로 이를 교훈삼아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말이 끝나도 어째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조 부장을 바라보니 내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무한한 존경심을 내포하고 있어서, 살짝 나를 무안케 했다.
"험, 험..........!"
내 헛기침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조 부장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추태를 보였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만.........."
'그런 추태라면 백 번을 부려도 좋고, 그런 실례라면 천 번을 범해도 괜찮소.'
나는 내심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조 부장에게 말했다.
"얼른 최 부장에게 알려주지 뭐 하세요?"
"아, 내 정신 좀 봐. 사장님, 이 기쁜 소식을 바로 알려주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평소보다 더욱 정중하게 꾸벅 절을 올린 조 부장이 부리나케 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런 일이 있고 난 그날 밤.
내가 퇴근을 하니 집에서는 엉뚱한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태어나서 바다구경 한 번 못해봤다'고, 올 여름에는 꼭 해수욕장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는 미정의 말을,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거절했더니, 이 영악한 여편네가 이제는 별 재주를 다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내가 집에 가보니 청주에서 명희마저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즉각적으로 나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지난 번 전생의 와이프 최수빈 사건 이후로, 미정의 군기를 다잡기 위해 내가 호락호락하지 않게 굴자, 이번에는 아마도 명희까지 충동질해 올라오게 한 것 같았다.
"오빠, 퇴근하셨어요?"
미정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명희 혼자 차 소리가 나자 대문까지 쫓아 나와 나를 반기는 모습이었다.
"응, 왔어?"
내가 명희의 출현해도 데면데면하게 굴자, 급 당황한 얼굴의 명희가 이제는 울상으로 변했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아니!"
"그런데, 왜 제가와도 반가운 표정이 아니 예요?"
"그런 일 없어."
"오빠!"
그냥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가로막은 명희가 읍소했다.
"말해주세요. 제가 뭘 잘 못했는지?"
"함께 부화뇌동한 죄."
"네?"
"함께 해수욕장 가자고 조르려고 왔지?"
"오빠가 그걸 어떻게..........?"
"너희들 속에 내가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야. 그나저나 미정이는 어디 갔어?"
"너무 덥다고 샤워 중 이예요."
"그래? 일단 들어가자."
"네, 오빠!"
아무튼 나는 양쪽에서 매달리는 두 여인의 애정공세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즉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모레부터 1박2일로 피서를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도 끝까지 버텨 두 여인으로부터 모종의 약속을 얻어냈으니, 그것은 나중에 밝히기로 하겠다. 아무튼 그 이튿날 나는 두 여인을 차에 태워 오후 내내 캠핑 장비를 사러 다녔다. 물론 현지 여관에서 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피 끓는 젊은이 이다. 요즘 대세인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코펠과 버너에다 밥을 끓여 먹는 낭만을 어찌 쉽게 포기하랴. 그래서 우리는 이 당시 젊은 남녀의 풍속대로 경포대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거기서 일박을 하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끝냈다.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떨어지기 싫어하는 다정이를 억지로 내가 강제하여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을 향해 떠났다.
아무튼 내가 피서를 간다고 해서 꼭 놀러만 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나름대로 꿍꿍이속이 있었다. 나는 크게 붐비지 않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하행하다가,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문막 인터치인지가 나타나자 나는 그곳으로 방향을 꺾었다.
"여보, 벌써 다 온 거예요?"
서울 생활이 좀 되지만 전국 지리는 거의 깜깜이라 어수룩한 미정의 물음이었다.
"그래, 다와 간다."
"생각보다 굉장히 가깝네요."
"하하하.........! 가깝긴 가깝지. 이제 얼마 안 가면 되니까."
"그런데 어째 웃음이 의심스러운데요?"
이런 데는 또 눈치가 빠른 미정이었다. 나는 미정의 말에는 답을 않고 뒷좌석에 나란히 타 주변풍경 구경에 여념이 없는 명희를 불렀다.
"명희야!"
"네, 오빠!"
"네 생각에도 다와 가는 것 같으냐?"
"글쎄요. 저도 지리는 잘 모르니, 그런데 암만해도 오빠가 뭔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것들이 눈치는 9단이군.'
나는 내심 생각하며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빨리하며 말했다.
"너희들이 너무 지루할 것 같아 잠시 쉬어가려고."
"휴게소에 안 들리고요?"
"오줌 마려운 사람 있어?"
"아니요. 어제부터 물 한 모금 안 마셨거든요."
"촌년들!"
"뭐라고요?"
발끈하는 미정은 아랑곳없이 내가 대답했다.
"아, 신랑차로 가는데 가다가 오줌 마려우면 잠시 휴게소 들렸다가자고 하면 되지. 왜 고생을 사서 해."
"헤헤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지만, 여자입장에서는 그 말이 쉽게 나오질 안잖아요."
"그도 그럴 듯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멀리 도로변에 크게 터를 닦아놓고, 천막 몇 개 쳐져있는 사이로 수많은 철제 빔과 함께 많은 인부들이 보였다.
"다 왔다."
"네?"
"내가 맡은 공사 현장인데, 어떻게 작업들을 하고 있나 살피고 가야지. 이런 기회 아니면 여기까지 쉽게 와 지겠어?"
"아니래도 한 번은 왔어야 했겠네요?"
미정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겸사 겸사지."
"하여튼 일벌레! 잠시도 쉬는 걸 못 봐요."
"너희들 입에 밥 떠먹여 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노력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어."
"하여튼 우리는 오빠 때문에 밥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명희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라,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하지."
내 부지런하니 너희들에게 끼니 걱정은 안 시킨다는 말을, 나는 애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작품 후기 오늘 연재분을 보시고,
'아, 이거 어디서 봤는데?'
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제 소설 '경제대통령'에 나왔던 장면입니다. 상황이 같다보니 다시 써먹었네요. 양해하시고 그래도 그럭저럭 읽을 만 하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추천이라도 한 번..........? 꾹~!
갈수록 주인공 대정을 닮아가 뻔뻔해지는 매검향입니다!
^^도 한 번..........? 꾹~!
^^해량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