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대정(大正)-- >
7월 24일 토요일.
기말고사도 끝나고 오늘부터 방학이었다. 홀가분한 기분인데 장맛비는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통상 이맘때면 장마가 끝나는데 늦장마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장마가 끝나면 아마 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나는 현관까지 쫓아 나와 우산을 받쳐주는 미정의 볼에 뽀뽀를 해주고, 승용차에 올랐다. 회사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내가 출근을 하니 아침부터 전화벨이 찌렁찌렁 울리고 있었다. 서 이사라도 있었으면 6시면 출근하는 사람이니 받았을 텐데, 일본과 미국의 특허출원 건 때문에 외국 출장 중이었다. 벽시계를 보니 7시 15분 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았다.
"네, 주식회사 대정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젊은 상대의 목소리에 나는 불쾌감을 가졌다. 자신의 신분부터 밝히고 상대의 신분을 물어야지, 예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장 강 대정입니다."
"아, 마침 사장님이 받으셨군요. 오늘 6시 반부터 몇 번째 전화를 거는지 모릅니다."
"실례지만 어디십니까?"
"아, 여기 현대 정주영 회장님의 비서실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말씀하시죠."
"다름이 아니라 오늘 낮 12시에 회장님께서 압구정 아파트 현장 함바에서 보자십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고요?"
"네. 끊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웬 난리야?"
나는 투덜거리며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대정입니다."
"사장님?"
"그렇습니다만?"
"여기 한국유리입니다."
"아니, 사장님께서 어쩐 일로 아침부터 다 전화를 주셨습니까?"
"큰일 났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복층유리를 연구하던 최고책임자인 과장 한 놈이 약 일주일 전부터 행방불명입니다."
"그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진즉 연락을 주셨어야 같이 협조해서 잡던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바로 잡을 줄 알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개발은 끝났습니까?"
"미처.........."
"저런, 저런......... 그래 이제 어쩌시려고요?"
"계속 찾아서 회수해와야지요."
"샘플도 같이 가지고 도망쳤습니까?"
"면목 없습니다. 사장님!"
처음 대리점을 개설하러 갔을 때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던 양반이, 오늘은 기가 팍 꺾여 나에게 깍듯이 예우를 하고 있었다.
"제가 곧 직원을 한 명 파견하겠으니, 같이 협조해서 잡아봅시다."
"알겠습니다. 아침부터 좋지 않은 일로 기분을 상하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또 뵙죠."
나는 화가 난듯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곧 청주 최 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그놈이 전화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지만 혹시나 해서 걸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달리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최상철 심부름센터입니다."
그러나 역시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아니, 네가 이 시간에 사무실에 웬일이냐?"
"요즘 집보다 여기가 시원해, 이곳에서 잔다."
"알았다. 또 하나 건수가 터졌다. 사람을 하나 추적해서 잡아오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네가 서울로 올라와야겠다."
등록일 : 14.01.16 00:08
"접수했음. 경비는?"
"이 미친놈은 매번 돈 문제부터 꺼내고 지랄이야. 내가 언제 돈 안 주디?"
"아, 미안, 미안! 습관이 돼놔서 실언."
"당장 준비해서 올라와!"
"넵! 접수했음!"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꼭 울고 싶은 사람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꼭 울고 싶은 사람에게 뺨 때리는 격이었다. 그렇잖아도 대리점 거래를 끊으려 했는데, 잘됐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12시 5분 전.
나는 전 갑원 상무와 함께 함바 안에서 정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서, 비를 피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 왔어?"
간부들과 함께 떼로 몰려든 정 회장이 나를 아는 체했다.
"네, 회장님!"
내가 간단하게 대답하고 가만히 있자 그가 말했다.
"맛도 없는 밥 자꾸 먹자고 이리로 불러내 미안 허이. 내 시간을 아끼자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어."
"압니다. 저도 어려서 거친 밥을 많이 먹어봐서,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합니다."
"입에 발린 소리를 안 해서 좋 고만. 자, 앉지."
그의 자리는 감히 어느 누구도 얼씬도 못하고 비어 있었다.
"여기 강 사장 밥도 같이 타와."
"네, 회장님!"
"제 밥은 제가 알아서........."
내가 엉덩이를 들썩이자 정 회장이 나를 주저앉히며 말했다.
"좋은 밥 주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앉아 얻어먹기나 해."
"알겠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말씀하십시오."
"자네 철 구조물 공사 한 번 해보지 않으려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베일 산업 항에 들어갈 철 구조물도 울산에서 제작할 생각이야, 게다가 월성원자력발전소 공사도 해야지. 일이 한꺼번에 너무 몰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10층 건물 높이의 550ton짜리 대형 철 구조물을 우리나라에서 제작해 사우디로 옮긴다고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수만km를19번이나?"
"자네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취재를 하려면 사전 지식 없이 어떻게 취재를 합니까?"
"하긴 맞는 말이네만, 다 반대를 하니......... 원."
"저는 적극 찬성입니다."
"뭐? 하하하.........! 모든 사람들이 다 무모하다고 반대하는데, 유일한 동지를 만난 것 같아 반갑네. 그런데 자네가 찬성하는 이유라도 있나?"
"회장님이 하시면 뭐든지 다 잘될 것 같거든요."
"그 말 아부 아니야?"
정 회장의 말에 모두 미소를 띠었지만 나는 웃지도 않고, 아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가 알기로 콘크리트 소요량만도 5톤 트럭으로 20만대가 들어가고, 철강 자재만도 만 톤짜리 선박으로 12척 분량이 들어가는데, 이 자재를 현지로 옮겨서, 그 열사의 땅에서 공기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가 볼 때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한국에서 이 모든 것을 제작하면, 오일 쇼크로 죽은 한국경제가 살아남은 물론, 공기도 맞출 수 있습니다. 요는 암초와 어떻게 태풍권을 피해가느냐 인데, 태풍이야 주로 여름철에 발생하니 이 시기를 피해야겠고, 바지선 운반에는 이 지역을 운항한 경험이 있는 항해사 중에서, 최고 베테랑들만 구해 투입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 정말 다시 봐야겠고만.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아니야? 오늘 정말 든든한 원군 한 사람을 만났어. 막상 나도 그렇게 결정을 하고도 내심 망설이는 바가 많았어. 모두 안 된다고 반대만 하니, 나도 인간인 이상 내심 불안하지 않겠나? 그런데 자네 말을 들으니 자신감이 팍팍 생기는 거야. 이봐! 원갑이 자네 들었어?"
"네, 회장님!"
"나 밥 여기서 안 먹어!"
"네?"
"날도 굳고 한데 우리 어디 가서 대포나 한 잔 하지? 가세! 강 사장! 원갑이 자네도 따라와."
"네, 회장님!"
졸지에 생각도 못한 날궂이를 하게 생겼다. 나는 미처 트렁크에서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아까는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 전 상무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산을 씌워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가 와 함바에 가깝게 대어 놓은 내 차로 뛰었다. 그리고 급히 시동을 걸어 두 사람 앞에 차를 대었다.
그리고 얼른 뒷문을 열고는 정 회장에게 말했다.
"타 시죠!'
"자네 차가 포니가 아니었으면 안타려고 했는데, 마침 우리 차니 타겠네. 뭐 하고 있어? 자네도 타."
"네 회장님!"
전 상무는 예의상 조수석에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회장님!"
"전 상무 잘 아는 곳 없어?"
"요 앞에 새로 생긴 횟집이 있는데, 맛도 서비스도 괜찮더라고요."
"언제 그런데는 다 가봤어?"
정 회장의 물음에 전 상무가 대답했다.
"일전에 하청업체 사장 하나가 접대를 한 다고하기에, 점심 한 끼 얻어먹었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그럼, 그곳으로 한 번 가보지."
"네, 회장님!"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물구덩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새로 포장한 도로가 나오자 속도를 내어 밟았다. 곧 전 상무가 말한 집이 나타났다. 새로 지은 5층 건물인데, 1층이 횟집이었다. 우리는 곧 종업원에 의해 안내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 또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 회장이 전 국민에게 너무 알려진 인물이라 나 역시 도매금을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전 상무가 주문을 했다.
"아나고회 3인 분하고......... 회장님 구이도 괜찮습니다. 구이도 시킬까요?"
"그래, 시켜!"
"구이도 3인 분!"
주문을 받던 30대 초반의 여종업원이 물었다.
"술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막걸리 있어?"
정 회장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까지 저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사다드릴까요?"
"그럼, 그냥 소주로 줘."
"알겠습니다. 회장님!"
"나 알아?"
"전국구 스타를 왜 모르겠습니까? 회장님!"
"하긴 나 모르면 간첩이지. 스끼다시 많이 줘."
"네, 특별히 많이 챙겨드리겠습니다."
갑부도 그런 걸 챙기나 싶은지, 살짝 웃던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나갔다.
"아까 철 구조물 얘기하다 말았습니다만.........?"
"아! 그랬지?"
"어때 해보겠어?"
"그런 거대 철 구조물은 할 자신이 없습니다. 괜히 덥석 받아먹었다가 소화도 못 시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
"하하하........! 그게 아니야. 내가 시키려는 건. 지난번에 얘기한 유리 공장을 짓는 철 구조물을 말하는 거야. 그놈들까지 전부 빼서 원자력이나, 울산 조선소에 투입해야겠어."
"그럼, 울산 조선소에서 주베일 항에 들어갈 철 구조물을 제작하는 것입니까?"
"눈치 한 번 비상하군. 맞아 그러다 보니 상영이 놈한테 내 시달릴 생각을 하면 끔찍하단 말씀이지."
"금강 스레트 공장을 운영하는 막내 동생 말씀하시는 거죠?"
"우리 가족사도 아주 꿰고 있고만. 맞아! 내가 다 빼내 가면 평소부터 내 말도 안 듣는 놈이 가만히 있겠어? 내가 유학 보내준다 해도 굳이 마다하고, 그 짓한 놈인데."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주에 지을 거야. 벌써 기초공사 다 끝났어. 빔(Beam)으로 짓는 거야. 해봤어?"
"해보지는 안았지만, 그 정도는 자신 있습니다."
"암, 그렇게 나와야지. 일단 여기 전 상무한테 도면 얻어다가 견적부터 내봐. 그리고 통과되거든 바로 시작하는 걸로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작은 규모가 아니야. 단단히 각오해."
"네, 회장님!"
"이 사람들은 뭐가 이렇게 늦어?"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장지문이 열리며 밑반찬부터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구이가 먼저 들어왔다. 내가 이를 보고 물었다.
"아나고가 곧 붕장어 아닙니까?"
"나도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상무의 대답에 예의 여종업원이 대답했습니다.
"붕장어 맞습니다."
온갖 양념이 발라진 구이가 곧 석쇠에 얹어져 맛있게 구어지기 시작했다. 곧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각각 소주 한 병식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곧 두 사람을 다시 현장으로 태워다 주고 도면을 얻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곧 견적작업에 착수했다. 전생에서 큰 공장도 꽤 지어봐 자신 있었다. 그날 나는 꼬박 견적에 매달렸다. 이생에 와서는 처음 내보는 빔 위주의 견적이라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물량산출부터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견적을 내고 보니 총 7천2백만 원이 나왔다. 나는 최소 이 금액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500만 원을 다시 부풀렸다. 그러니까 총 견적 가가 7천7백만 원이 되었다. 나는 이 견적을 가지고 이튿날 다시 정 회장을 만났다. 최종 7천5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내심 나는 5백만 원을 추가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장마도 끝나려는지 오늘은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지루한 장마 끝에 보는 푸른 하늘이라 기분마저 상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