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대정(大正)-- >
"요즘 수정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나?"
내심
'알고 있거든요!'
소리가 또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어떻게 지내는데요?"
"국동건설 사장과 곧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네. 그때는 자네도 초청하지. 그 덕분에 내 일거리도 쏠쏠하네. 그러니 내 자네에게도 일거리를 많이 밀어주도록 하지."
'아이고, 죽겠다. 저 영감탱이(?)가 오늘은 말끝마다 사람 분통을 터트리네.'
"끙........! 알겠습니다."
돌아서서 허둥지둥 계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어떻게 내려왔는지 도통 기억에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니 이건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인내의 한계에 달했다.
그래서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영진 일거리는 맡지 마세요."
"그 사람 하는 짓이 정말 밉상이네요."
마 부장도 대충 감을 잡았는지 수정이네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성적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절제가 안 되었던 것이다. 나는 말없이 마 부장과 안 과장을 태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머지 직원들은 회사 트럭으로 따라 올 것이다. 그날 오후.
나는 금성사 청주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외주 과장 양 재기(楊 才器)라는 사람이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양 재기 씨 맞죠?"
"네, 그렇습니다만?"
"한국일보의 강 대정 기자입니다."
"네? 기자님이 무슨 일로 저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퇴근하고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잠시면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저 선약이 있어서........."
"상경정밀의 박 이사도 함께 나오기로 했거든요."
"그 사람이 왜...........?"
"이송 릴 문제 때문에........"
"네? 어디로 가야 됩니까?"
화들짝 놀란 양 과장이 당황한 음성으로 황급히 물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서 뵙시다. 공단오거리의 진성식당이라고 잘 아시죠?"
"네, 네!"
"6시에 그곳에서 뵙시다."
"네, 네. 꼭 나가겠습니다."
나는 그 길로 바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오후 6시, 진성식당.
나는 10분 전에 이 식당으로 들어와 칸막이된 방 중의 하나를 잡아놓고 있었다. 일반식당이지만 삼겹살을 주문하면 주기도 하는 집이었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밖에서 나를 찾는 음성이 들려왔다.
"혹시 여기 한국일보의 강 대정 기자라고......."
거기까지 듣자 나는 장지문을 활짝 열고 양 과장이라 추측되는 사람을 불렀다.
"여기요. 들어오시오."
"아! 네, 네!"
황급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는 양재기 과장이었다.
"여기 고기 2인분 하고 소주 1병만 주세요."
"네, 네!"
나는 문을 연 김에 아예 주문을 했다.
엉거주춤 선 양 과장이 물었다.
"그런데 상경의 박 이사는.........?"
"아, 좀 전에 갑작스런 볼 일이 생겨서 늦는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네, 그렇군요."
뭔가 맥 빠진 대답을 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양 과장이었다.
내가 그런 그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뭐가 집히는 게 없습니까?"
"그게 글쎄........."
"확연히 안 떠오르는 모양인데 그럼 제가 기억을 재생시켜 드리죠."
나는 말과 함께 품에서 소형녹음기를 꺼내 틀었다.
잡음과 함께 좀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약소하지만 회식비에 보태 쓰십시오.][얼맙니까?][약소합니다. 1백만 원 밖에 안 됩니다.][좋습니다. 내 이송 릴 5천 개를 추가 주문하도록 하죠. 그리고 이번 단가 네고 건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과장님! 이 후의는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물건만 제대로 만들어, 제 날짜에 납품해주시면 됩니다.][아, 네.]
"더 들으실까요?"
"되, 됐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것을 혼자만 먹지는 않았을 테고, 허 웅 부장님에게는 얼마를 상납했습니까?"
"아, 안했습니다."
"그럼, 그 내용도 들어볼까요?"
"아, 아닙니다. 50만 원 드렸습니다."
"좋습니다. 허 부장님도 이곳으로 모실 수 없을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그럼, 제가 직접 하죠."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아십니까?"
"네. 곧장 집으로 퇴근하신다고 했으니, 아마 집에 계실 겁니다."
"전화 거시고 오세요."
"네, 네!"
양 과장이 나가자 나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괜히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 집 역시 고기를 하도 구어 먹어, 기름기가 벽의 도배지에까지 절어 있었다. 잠시 후 들어온 양 과장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집에 안 들어오셨다는 데요."
"하하하.........!"
대소를 터트린 내가 웃음기 머금은 음성으로 말했다.
"강서의 버드나무집이라고 보신탕집에 잘 가시죠? 아마 그곳에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네에?"
"이사님하고 함께 가셨으니, 요령껏 잘 빠져나오라고 하세요."
"네, 네!"
내가 저네들 동선을 확실히 궤고 있자, 확연히 놀란 표정으로 다시 밖으로 나가는 양 과장이었다. 사실 허 웅 부장이라는 사람에게는 오늘 최상철을 미행 붙여 놓았다. 잠시 들어온 양 과장이 말했다.
"금방 오신답니다."
".........."
내가 말없이 웃고만 있자, 속이 탄 양 과장이 찬물 아니, 벌써 뜨뜻해진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채근을 했다.
"도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
이때 마침 아주머니가 고기와 술을 내왔으므로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아주머니가 모든 진열을 끝내고 나가자 내가 말했다.
"부장님 오실 동안 우리는 술이나 마시고 있지요."
"..........."
대답 없이 멍하니 나만 바라보는 양 과장이었다.
내가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름이 아주 특이하십니다. 결코 한 번 들으면 못 잊겠어요?"
"어릴 때부터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는 부모 원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제 이름을 사랑합니다. 말씀대로 한 번 들은 사람은 결코 잊는 법이 없으니까요."
"그렇겠습니다. 자, 내 술 한 잔 받으시죠?"
"그런데 정말 기자님 맞습니까?"
"내 이럴 줄 알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나는 옆에 놓여 진 서류가방에서 정주영 씨 기사가 실린, 며칠 전에 발행된 신문과 함께 내 신분증을 내보이며 말했다.
"보세요. 이름이 일치하지요?"
"아! 네, 네! 실례 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술병을 잡으려 하며 양 과장 말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팔 아프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은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단숨에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여 진 소주병을 손수 집어다 급히 자신의 잔에 따랐다.
"그러다 일찍 취하십니다."
내 말에 대꾸도 않고 다시 한 잔을 입에 털어 넣는 양 과장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술기운을 빌어 잊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술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그러다가 부장님이 오시기도 전에 취하겠습니다."
"아, 네!"
부장이 아킬레스건인지 그 때부터 자중을 하는 양 과장이었다.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나는 술을 들어 아주 천천히 마셨다.
"안주 좀 드세요."
"네, 네!"
나는 안주를 들어 여유 있게 상추쌈을 쌌다.
이때 밖에서 양 과장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양 과장 어느 방에 있소?"
"아, 네! 부장님 오셨어요? 이쪽으로.........."
여주인이 직접 안내를 하는지 우리 쪽으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며 허 부장이라는 사람의 노성이 방안을 찌렁찌렁 울렸다.
"양 과장, 그게 무슨 소리야? 다시 한 번 얘기해봐!"
이때 내가 호통을 내질렀다.
"조용히 하시오. 여기가 어디 라고!"
내 말에 깜짝 놀라 신발을 벗고 들어오던 그가 한 발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예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조용히 들어와 예 앉으세요. 이 식당에 손님이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 네! 실례했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더니 양 과장 옆에 나란히 앉는 허 부장이었다.
생김은 희멀건하게 아주 잘 생겼다. 소위 귀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양 과장은 촌의 먹 장아찌마냥 기지가 좀 검었다. 그러나 오관이 반듯한 게 인물은 그럴 듯했다.
"무슨 소리야?"
양 과장에게 속삭이듯 묻는 허 부장이었다.
"그 문제는 제가 답을 해드리죠."
나는 품에서 미리 준비한 사진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밀었다.
"이게 뭡니까?"
무심코 사진을 당겨 보던 허 부장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이건 이사님에게 내가.........."
사진은 허 부장이 금성사 이사라는 사람에게 하얀 봉투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이 건 또 어떻습니까?"
"아니, 이 건.........."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 허 부장이었다.
"내가 알기로 봉투를 건네주는 분은 상경정밀 사장님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안 겁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쩌면 두 사람의 묻는 것이 한결 같은지. 그러나 나는 동문서답을 했다.
"양 과장, 고기 다 타잖아요. 좀 뒤집기도 하고 그러세요."
"아, 네, 네!"
또 그 소리. 오늘 내가 저 소리를 얼마나 듣는 것인지.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비굴해진 표정으로 애원의 표정을 짓는 허 부장이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여전히 느물거리는 말뿐이었다.
"그 봉투에 든 돈의 액수까지 제가 맞춰볼까요?"
"아, 제발 그러지 마시고........"
비로소 내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분 똑바로 잘 들으세요."
그 바람에 고기를 뒤집던 젓가락이 멈추어지며 다시 고기가 타기 시작했다.
"오늘부로 두 분은 대 대정전자(大正電子)로 특채되셨습니다."
"네?"
둘 다 한결같은 물음을 던지며, 이해를 못해 당혹한 표정이었다.
"양 과장은 내 이름이 뭔지 알 텐데........?"
"아! 그럼 대정전자라는 것이 강 기자님이 차리신 회사입니까?"
"뭔 소리야?"
양 과장의 대답에도 여전히 이해를 못한 허 부장의 물음이었다.
"맞습니다. 내가 곧 그 회사의 사장입니다. 이제 뭔지 감이 좀 잡히십니까?"
"아, 네!"
어물쩍 대답하나 양 과장도 확실히 이해를 한 표정은 아니었고, 더 더군다나 허 부장은 전혀 이해를 못해, 나와 양 과장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특채를 했으니 당연히 봉급도 오늘 날짜로 아니, 정확히는 내일 날짜부터 계산을 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는 그들을 위해 내가 조목조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서 한 가지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데, 제품 개발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양산 체제를 갖추려니 두 분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특별히 두 분을 모시는 것입니다. 즉 이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부품회사들이 상당히 많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부품 조달 역이 두 분이십니다."
물로 잠시 목을 축인 나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두 분을 특별히 모셔도 되나, 그러면 신설인 우리 회사로의 이직을 두 분이 거절할 공산이 크고, 또 아니더라도 막상 우리 회사에 와서 그 부품 회사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개발하자면, 갑(甲) 을(乙)의 처지가 뒤바뀔 공산이 크므로, 이런 편법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의 요지는 두 분이 현직에 계시면서, 우리 대정이 개발하는 제품의 양산 체제를 갖추어 달라는 말입니다."
"대충 그 말뜻은 알겠습니다만......... 그 제품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요?"
"그것은 아직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이미 국내 특허 출원을 마쳤지만 노파심에서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두 분도 어느 정도 진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겁니다."
"흐흠..........!"
내 말에 깊게 침음한 허 부장이 돌연 양 과장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네 뜻은 어떠냐?'
는 의미였다.
허 부장의 눈길을 받은 양 과장이 물었다.
"그럼 우리의 봉급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아이고, 냄새야! 아예 불을 꺼버리십시오."
"네, 사장님!"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므로 내가 더 두고 볼 수 없어 말하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