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대정(大正)-- >
나는 다음 취재원으로 지목한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취재하기 위해, 미리 비서실에 전화를 넣었다. 어제 삼환의 최 사장을 취재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시간 낭비한 생각을 하니, 그런 시간적 손실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낭비는 줄였지만 장소는 내가 예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래도 한국의 대표적인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 회장실에서 정중하게 격식을 갖추어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터뷰는 현대건설이 짓고 있는 압구정 신축아파트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즉 우리 회사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아무튼 그것도 자신의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함인지, 12시 정각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을 할애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은 인터뷰였다. 나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가 지정한 함바로 10분 전에 도착했다. 나는 미리 나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 사기를 달고 들어갔다. 사전 지시가 있었는지 정문부터 검문 없는 무사통과였다. 이윽고 내가 물어물어 함바 100미터 전방에 차를 세우고 가방과 녹음기를 챙겨 함바로 걸어갔다. 이때의 시간이 12시 10분 전이었다.
내가 기자증까지 패용하고 나타나니 한 사람이 내게 접근해 물었다.
"혹시 한국일보의 강 대정 기자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반갑습니다. 전 갑원 상무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악수가 끝나자 내가 물었다.
"회장님은 요?"
"혹시 늦을지 모른다고 저를 보고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를 하라고 했습니다."
"현장에 계시는 게 아닙니까?"
"현장에야 계시지요. 그래도 워낙 바쁘신 분이니, 결례가 될까봐 그렇게 지시하셨던 것이지요.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내가 전 상무의 말에 따라 뒤를 돌아보니, 너무나 잘 알려진 정 회장이 수많은 부하들에 에워싸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벌써 60대 노인이라,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걸 떠나,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맞았다.
"어제 전화 드렸던 한국일보의 강 대정 기자입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허허........! 반갑소. 그런데 내 예상보다는 너무 젊소?"
반갑게 내 손을 잡으며 한마디 하는 정 회장이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회장님!"
"아무려면 어떻소. 자, 가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 나눕시다. 식전이지요?"
"그렇습니다."
"합바 밥도 먹을 만 하다오. 그렇지만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은 맛이 없어.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꿀맛이고."
나는 전 회장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내가 의혹이 일어 전 회장에게 물었다.
"설마 이곳에서 인터뷰를 하시겠다는 것은 아니시죠?"
"시끄러워서 뭐가 되겠소? 밥 먹을 때는 열심히 밥이나 먹읍시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소란스러움 속에서 간단히 점심을 마쳤다. 그리고 우리는 현장사무실로 이동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우선 세계적인 공사를 수주하게 된 것에 대해 축하를 드립니다."
"고맙소! 나는 그래도 이 공사를 수주하면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을 줄 알았는데....... 내심 섭섭했었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사우디 현지의 통신 사정도 아주 열악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맞소. 내 현지에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우리 현장이 위치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현지 국내 통화를 해도 몇 시간은 기다려하는 곳이 현지실정이라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보다도 더 열악하지."
"본론으로 들어가죠, 회장님! 이번 공사 금액이 지금까지 공사로서는 물량만큼이나 액수도 최대인 9억3천만 달러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우리나라 금년도 전체의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오. 내 사담을 좀 하리까?"
"말씀하시죠. 회장님!"
"내가 이 공사를 따가지고 선수금 2억 달러가 예치되는 대로, 인사차 박 대통령을 찾아뵙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요?"
기자는 상대말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추임새가 중요하다. 그런 여파인지 정 회장이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각하, 오늘 선수금으로 2억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각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드만.
'고생했소! 정 회장 덕분에 외환위기라는 목전의 큰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소!'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글쎄..........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시는 게야. 민망한 게 아니라, 나도 괜히 가슴이 북받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지."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얼마인데요?"
"아, 경제 기자라는 양반이 그것도 몰라!"
내가 변명하기도 그래 뻘쯤하니 있자, 미안했던지 먼저 스스로 답을 하는 정 회장이었다.
"고작 2천만 달러야. 그러니 그 10배가 넘는 금액이 하루아침에 입고되었으니, 얼마나 기뻐하셨겠어? 상상이 가지?"
"네!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제 좀 다른 비화로 넘어가죠. 이 공사를 따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면서요?"
"말도 말아. 늦게 정보를 접해. 딱 열 군데만 입찰서를 발주한다는데, 벌써 개는 세계적인 건설사들로 꽉 채워진 거야. 일본 업체도 하나 못 낀 거기에 발을 디밀라니,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 거기에 막상 입찰을 하는데 이번에는 글쎄........ 전갑원이라는 놈이 내 말을 안 듣고, 7천7백만 달러를 더 써낸 거야."
숨을 돌린 정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발표하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어. 이게 다가 아니야. 막상 입찰이 진행되자,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은행이나 국책은행의 담보를 요구하는 거야. 이게 또 사람 잡는 일이지. 허허........ 것 참!"
"지금이야 너털웃음을 웃으시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피가 말랐겠습니다?"
"기자 양반이 정말 잘 표현했네. 정말, 정말 아주 피가 마르는 나날이었지."
"이제 앞으로가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20세기 최대의 프로젝트답게 공사도 난공사라면서요?"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나는 그런 건 걱정 안 해.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 우리의 근면한 뇌동자들이 있거든."
정 회장 특유의 표현이 있는데, '노동자'를 꼭 '뇌동자'로 발음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장시간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벌써 끝난 거야?"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잘 좀 써줘. 내 대포 한 잔 톡톡히 사지."
"저도 알고 보면 회장님하고 이웃입니다. 종종 찾아 뵈도 되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 옆에 모래땅 보이시죠? 10만 평이 넘는........?"
내가 먼저 일어나 창가로 가서 지칭을 하니, 정 회장도 자연히 나를 따라 창가에 섰다.
"저게 뭔데?"
"저게 제 땅이고요. 저기서 저는 전문건설업을 하고 있습니다. 새시, 철물 뭐 그런 종류죠."
"그래? 거참, 세상은 이래서 좁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그럼, 진즉에 한 번쯤 찾아오지......."
"이제라도 늦지 않았지 않습니까? 이게 기회가 되어서........"
"그야 그렇지. 그런데 일거리는 좀 있는 거야?"
"일거리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맞죠. 주택공사의 잠실 단지 건 하며, 대우빌딩 신축공사 등 굵직굵직한 공사만 나열해라도 해가 저뭅니다."
"이 사람 허풍은?"
"남자는 허풍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회장님처럼 요?"
"내가?"
"아니십니까?"
"그런 면이 나한테도 좀 있기는 하지. 이번 건만 해도 그래. 내 동생 인영이 알지?"
"네. 정인영 씨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 말은 어린애도 하겠네. 내 동생이라 했으니 성은 당연히 정 씨 일 테고."
"하하하.........! 회장님 잠시 제게 PR 기회를 좀 주시겠습니까?"
"앉아봐. 이왕 시간 낸 것. 거 얘기를 하다 보니 죽도 맞고."
다시 사무실 책상으로 걸어가며 내가 물었다.
"정 인영 씨하고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 얘길 하다 말았지. 그 녀석이 끝까지 반대하는 걸 내가 밀어붙여서 이번 공사도 따낸 것 아니야. 그 과정에서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쳐가면서 말이지. 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 정 회장이었다.
"아무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셨으니, 됐고요. 제가 시공하고 있는 방화문과 난간 그리고 새시들입니다."
"어디 보자.........!"
내가 제공한 앨범을 넘겨보던 정 회장의 반응도 여느 사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이걸 자네가 만드는 거야, 아니면 수입을 해왔다는 거야?"
어느새 정 회장의 말투가 변해있었다.
"제가 직접 공장을 차려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 직접 실물을 볼 수 없겠나?"
"당장이라도 가셔서 보시면 될 것 아닙니까? 차로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가세!"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정 회장이었다. 곧 우리 공장을 둘러본 정주영 회장이 말했다.
"당장 다음 아파트 건부터는 자네들이 철물분야는 시공하시게."
나는 그의 말에 한술 더 떠 물었다.
"새시와 유리는 안 되겠습니까?"
"새시와 유리? 흐흠.........! 좋아! 새시도 시공하시게. 그러나 유리만은 안 돼."
"왜요?"
"우리가 곧 '금강유리'라고 유리 공장을 하나 세울 텐데, 거기 것을 써줘야지."
"그럼, 저도 대리점을 금강으로 옮기겠습니다. 그러니 유리도 주십시오."
"거참, 못 말릴 젊은이이군. 자네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이. 좋아! 자네말대로 이행을 한다면 그것도 시공권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왕 회장님!"
"내가 왜 왕 회장이야?"
"곧 여러 회장들을 두고 최고의 회장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나는 욕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우리 그룹이 번창하라고 축수하는 것이 고만."
"그렇습니다. 회장님!"
"아무튼 오늘은 자네 덕분에 즐거운 시간 되었네."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제 자주 봄세."
"네, 회장님!"
이렇게 해서 나는 큰 수확을 거두고 오늘의 만남을 접어야 했다. 다음 날 현대건설에 대해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린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오늘 나는 건설 5인방의 하나인 국동건설(國東建設)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제 미리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느긋하게 시간에 맞추어, 이 건설사가 위치하고 있는 충무로 사옥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이 회사 사장실을 찾아드는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사장이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건설사 사장과 달리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다. 사장과 함께 있는 사람이 꿈속에서도 상상치 못한 황수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서
'억!'
소리가 나오는 것을 금치 못하는 순간, 사장과 장난을 치고 있던 황수정도 나를 발견했다.
"아니, 네가........?"
"두 사람이 아는 사이야?"
"네, 한 고향 후배에요."
이럴 때는 여자가 더 침착한가 보다.
재빨리 현장을 수습하는 황수정이었다.
"그런 사람치고는 서로들 너무 놀라는 것 아니야?"
"서로 안면이 있는 친구인데, 이런 데서 만나니 얼마나 놀라워요."
"친구?"
"말꼬리 잡지 말아요."
한 마디 톡 쏜 그녀가 녀석의 무릎 위에서 내려와 휑하니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거 성질머리 하고는......... 어떻게 오셨소?"
비로소 시선을 내게 맞추며 묻는 놈 씨였다.
"아, 네! 어제 연락을 드렸던 한국일보의 강 대정 기잡니다. 혹시 사장님 되십니까?"
"사장 아닌 놈이 여기 들어와서 장난을 칠 수 있다고 보오?"
"너무 젊어서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지.'
막상 보니 분노로 덜덜 떨려오는 몸을 억제하며 나는 정신을 다 잡고 있었다. 왜 나도 분노로 몸이 떨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어찌 됐든 나는 취재야 임해야 했다.